‘디지털 삼인삼색 2014’에서 ‘전주 프로젝트: 삼인삼색 2015’로 프로젝트 이름을 바꾼 올해, 전주가 호명한 이름은 벤자민 나이스타트, 김희정, 이현정이다. 실험적인 데뷔작 <공포의 역사>로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한 벤자민 나이스타트 감독은 1년 만에 신작 <엘 모비미엔토>를 들고 다시 전주를 찾는다. <열세살, 수아>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을 통해 여성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들려준 김희정 감독은 알코올중독 남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설행_눈길을 걷다>를 선보이고, 다큐멘터리 <원시림> <용문>으로 생경한 소재를 시각화해온 이현정 감독은 첫 번째 극영화 <삼례>를 공개한다. 영화적 순간들로 가득 찬 삼인삼색 영화들을 소개한다.
<엘 모비미엔토> El Movimiento
벤자민 나이스타트 / 한국, 아르헨티나 / 2015년 / 70분
<엘 모비미엔토>는 1835년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편의 묵시록적 흑백영화다. 남부 팜파스는 무정부 상태이며 전염병과 가난이 휩쓸고 있다. 이곳에 등장한 야심가 세뇨르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농민들을 위협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마치 국가의 탄생을 위해서는 폭력을 동반한 정치운동은 피할 수 없다는 듯 행동하는 그에게서 독재의 기운이 뻗친다.
장편 데뷔작 <공포의 역사>로 2014년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고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한 벤자민 나이스타트의 두 번째 장편이다.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그의 주제의식은 공포와 폭력의 근원에 있다. <공포의 역사>의 공포가 실체가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 무지나 몰이해에서 기인했다면 이번에는 광폭한 권력자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 오직 자신만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세뇨르에게서 왜곡된 집착과 광기가 엿보인다. 이런 세뇨르를 텅 빈 눈으로 바라보는 농민들의 표정에는 예고된 공포의 그림자가 짙다. 의도적인 얼굴 클로즈업 숏들과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전자음이 극의 긴장감을 쥐락펴락한다. 벤자민 나이스타트의 또 다른 실험극의 탄생이다.
<삼례> Samnye
이현정 / 한국 / 2015년 / 103분
영화감독 지망생 승우(이선호)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전라북도 삼례로 떠난다. 삼례에 도착한 승우는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소녀 희인(김보라)을 만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촌구석”을 떠 스타가 되고 싶은 희인은 고요한 소도시를 서성이는 ‘이방인’ 승우에게 관심을 보인다. 희인의 관심과 유혹이 싫지 않은 승우는 그녀와 함께 삼례를 떠돌며 희인이 안내하는 기이한 세계를 체험한다. 무당 할머니를 둔, 강산에의 노래를 좋아하는, 전생에 특별한 인물이었던, “유난히 희한한 인간”이어서 유희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소녀는 그러고는 훌쩍 승우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그 유명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한 구절이다. 삼례로 가는 승우의 손엔 <데미안>이 들려 있고, 희인은 승우에게 이 구절을 들려준다. 투쟁하는 새,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려는 새는 승우와 희인이 처한 상황을 상징한다. 다큐멘터리 <원시림> <용문>을 만든 이현정 감독의 첫 극영화이다.
<설행_눈길을 걷다> Snow Paths
김희정 / 한국 / 2015년 / 110분
<열세살, 수아>와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으로 여자들의 성장통을 주로 다뤄왔던 김희정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설행_눈길을 걷다>는 비록 남자주인공이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를 꾸려가지만, 앞선 두 영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여자의 일생을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우(김태훈)는 알코올중독 치료차 가톨릭 교회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을 찾는다. 그곳에서 일하는 마리아 수녀(박소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정우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고는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기 시작한다.
요양원 생활에 제대로 적응할 마음이 없어 보이던 정우는 마리아와 크고 작은 일에 엮이면서 본의 아니게 그녀의 숨겨진 능력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정우와 마리아 수녀 두 사람의 비밀을 사실상 모두 알고 있는 원장 수녀는 묵묵히 뒤에서 지켜볼 뿐이다. 자기 자신의 기원을 찾는 과정, 즉 누군가가 방향감각을 잃고 삶을 헤매다보면 어김없이 찾게 되는 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섬세하게 풀어낸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