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스페셜 포커스’ 프로그램으로 기획된 ‘몰락한 신화: 그리스 뉴웨이브의 혁신’은 2000년대 후반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했던 그리스영화의 실상을 소개한다. 통념적으로 그리스영화에 일어난 변화의 출발점은 2009년으로 공인되어 있다. 2009년 국내에 개봉하여 반향을 일으켰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두 번째 영화 <송곳니>가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하고, 2009년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란티모스의 <알프스>가 각본상을 받은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비평가들과 시네필들은 이제 그리스영화를 우리 시대의 아방가르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 나라의 영화를 하나의 개념으로 매핑하는 것은 복잡하고 때로는 무익한 작업일 수 있다. 2011년 스티브 로즈가 <가디언>에 그리스영화에 대한 글 ‘<아텐버그> <송곳니> 그리고 그리스영화의 기이한 뉴웨이브’라는 글을 기고했을 때,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우리의 공통점은 펀드가 없다는 것, 그래서 매우 싸고 작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란티모스의 말 속에는 동시대 감독들이 어떤 미학적 노선을 함께하고 있다기보다는 그저 영화 제작의 곤궁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녹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새로운 작가들이 영화언어의 쇄신을 시도하는 유럽 예술영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란티모스의 말처럼, ‘그리스 뉴웨이브’에 포함된 대다수 영화들은 초저예산 독립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그리스 뉴웨이브영화들은 내러티브와 이미지, 서사적인 테마와 시각적인 테마를 구분 짓기 힘들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만든 영화 안에서 스크린에 투사되는 이미지들은 대개 정신적인 함의를 품고 있다. <송곳니>와 아티나 레이첼 탕가리의 <아텐버그>, 실라스 트주메르카스의 <폭발>, 엑토라스 리지조스의 <새 모이를 먹는 소년>은 파괴적인 영화언어와 제약을 불허하는 대담한 표현 등 ‘익스트림 시네마’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몰락한 산업화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을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토니오니적인, 도시 풍경의 표현주의적인 잠재력을 미장센화하는 작품은 란티모스의 데뷔작 <키네타>, 바비스 막리디스의 <L>이다. 특히 <송곳니>의 촬영감독 티미오스 바카타키스가 촬영한 <L>은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에서처럼 이야기의 중심성이 사라진 독창적인 내러티브를 구사한다.
올해 전주에서 만날 수 있는 10편의 그리스영화에서는 섹스와 폭력, 도착, 관계의 파탄상이 대담하게 묘사된다. 경찰과 사진사, 호텔 여급이 한적한 휴양지 해변에서 죽음의 미스터리를 탐문하는 <키네타>, 낮에는 빵공장에서 밤에는 청부살인자로 이중생활을 하는 중년 남자의 이야기인 <스트라토스>, 아테네를 어슬렁거리는 중년 뱀파이어의 기이한 어드벤처를 따라가는 <노르웨이>, 신경쇠약 직전의 아테네에서 궤멸하는 청춘의 이야기인 <고갈된 청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윤리를 시험받는 경찰조사관의 위기를 다룬 <언페어 월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카나리아의 모이를 먹는 테너 가수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새 모이를 먹는 소년> 등 극적 설정부터 괴상하기 그지없다. ‘괴상한 뉴웨이브’(Weird Wave)라는 개념이 어떤 유익이 있다면, 그들의 엇나간 내용만큼이나 형식적인 독특함을 인정하는 말이라는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