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전설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015-05-29
글 : 백준오 (플레인아카이브 대표)
<매드맥스> 클래식 3부작 훑어보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임모탄 역으로 귀환한 휴 키스 번. <매드맥스>에서 악당 토커터 역을 맡았다.

1970년, 외과 의사를 꿈꾸며 의대에 진학한 청년은 시드니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수련의로 근무하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부상자를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특히 그는 당시 도로 상황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퀸즐랜드주에서 빈번히 발생한 교통사고 탓에 끔찍한 부상을 입은 다양한 중상자와 사망자들을 숱하게 목격했고, 그 역시 10대 시절부터 함께하던 친구 셋을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청년의 이름은 다름아닌 조지 밀러(George Miller). 외과 의사 출신으로 호주에서 가장 성공한 영화감독 중 한명이자 영화사에 숱한 기록을 남긴 액션 프랜차이즈영화 <매드맥스> 3부작의 아버지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청년 조지 밀러의 관심사는 전공으로서의 의학 외에도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영화에 대한 열정 또한 남달랐다. 1971년 여름, 그는 멜버른대학에서 계절 학기 수업으로 개설한 영화제작 특강을 통해 아마추어 영화 제작자 바이런 케네디를 만나면서 인생의 방향타를 돌려 잡기 시작한다. 영화에 대한 식견과 성향이 비슷해 좋은 짝을 이룬 두 사람은 카메라 하나 둘러메고 초저예산의 단편영화들을 찍기 시작하는데, 병원에서 벌어들인 거의 모든 돈이 영화제작에 투자됐다. 특히 <시계태엽 오렌지>와 일련의 샘 페킨파 영화들로 상징되는 1970년대 당시 윤리적 금기에서 일탈한 폭력를 테마로 한 영화들을 패러디한 1500달러 예산의 15분짜리 16mm 단편 <Violence in the Cinema, Part One>이 2개의 호주영화학교(Australian Film Institute, AFI) 어워드를 수상하고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의 호평 속에 소개되면서 둘의 영화 활동은 대외적으로도 주목받기 시작한다. 조지 밀러의 동생인 빌 밀러 또한 협동프로듀서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엔터테인먼트 전문변호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조지 밀러 사단’의 영화 경력 첫머리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폭력이라는 주제에 유독 집착을 보인 조지 밀러의 영화적 관심사가 온전하게 응축된 ‘전설’의 시작 <매드맥스>(1979)는 물론이거니와 더 나아가 무자비한 파괴적 일탈행위와 신체훼손 등으로 대표되는 70년대 호주 영화계의 이른바 ‘막 나가는’ 익스플로이테이션 장르영화들이 유행했던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조지 밀러의 단편 <Violence in the Cinema, Part One>은 중요한 상징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어떤 전문가가 등장해 영화 속 폭력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와중에 여러 유형의 폭력이 그에게 가해지는 것을 보여준다. 슬로모션으로 총 쏘기, 폭발, 건물 밖으로 내던지기 등 온갖 난리법석인 상황이 벌어지지만, 주인공은 강의를 계속 진행한다. 이 괴상한 영화에 대해 조지 밀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윤리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영화 속의 폭력 장면을 의도적으로 건조하게 보여줌으로써 연출된 폭력이 관객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되물었죠.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작업이었고, 이 영화가 제 영화제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칸영화제 단편부문에서도 소개됐다니까요!”

<매드맥스>

<매드맥스>: 호주 사회의 혼란상을 그대로 반영하다

<Violence in the Cinema, Part One>이 주목받은 바로 그해에 조지 밀러와 바이런 케네디는 자신들의 이름을 딴 영화사 ‘케네디 밀러’(Kenedy Miller)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그들의 첫 번째 장편영화 <매드맥스>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후 7년여간 밀러는 의사로서, 케네디는 카메라맨과 트럭 운전이라는 생업에 집중하면서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절망적인 시기를 보낸다. 최악의 대공황과 오일쇼크로 국가 기반이 황폐화되고 무법천지로 변모한 근미래의 호주. 버려진 고속도로를 누비며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갱단 토커터 일당으로부터 아내와 아이를 잃은 경찰 맥스의 무지막지한 복수극을 그린 <매드맥스>는 여러모로 호주의 지역색을 진하게 녹여낸 액션영화다.

특히 멸망 이후의 세계를 다룬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공동 각본가인 제임스 매코스랜드의 역할이 컸는데, 그는 70년대 당시 호주를 강타한 오일쇼크로 인한 혼돈에서 주요 아이디어를 얻었다. 드넓은 대륙의 땅 호주에서 이동수단으로서의 자동차는 곧 생존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오일쇼크는 거대한 사회적 갈등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 매코스랜드는 퀸즐랜드 지역 매체인 <쿠리어 메일>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동 수단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어요. 몇몇 발견된 석유 매장지에는 곧 주유소가 세워졌고, 바로 이때 호주인들이 차에 기름을 채우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 겁니다. 주유소에는 긴 줄이 생겼고, 혹여나 새치기를 하는 사람은 폭력을 당했죠. 조지 밀러 감독과 저는 사람들이 오직 차를 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매드맥스> 각본을 쓰게 된 겁니다. 국가에서 대체에너지를 위한 막대한 인프라 구축 비용을 고민할 때가 되어도 이미 늦은 상황인 거죠.”

매코스랜드가 스토리의 기본 뼈대를 구축했다면 밀러 감독은 ‘자동차’라는 테마의 상징성과 영화적 활용을 흥미롭게 극대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우선 밀러는 <매드맥스>의 각본이 여러모로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익스플로이테이션영화의 문화적 코드들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코믹북, SF, 호러, 카액션 등과 같은 것들은 70년대 미국과 호주 양쪽의 대중이 모두 즐기던 하위문화의 대표적인 범주라는 것이다. 그러나 밀러가 집중한 것은 그런 미국적인 것들과는 차별화된 호주만의 색깔을 영화에 녹여내는 것이었고 그 핵심이 바로 자동차였다. ‘총’이 미국인의 힘과 불안의식을 상징한다면 호주에서는 ‘자동차’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 이는 서두에 언급했듯 그가 응급실 병동에서 근무하던 중 수많은 자동차 사고 환자들과 사망자를 겪으면서 무의식중에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닌 ‘힘’과 ‘공포’의 상징으로서 자동차를 인식하게 된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매드맥스2: 로드 워리어>

아날로그 카액션

과연 영화에서 펼쳐지는 자동차를 활용한 카체이스 및 액션 장면은 영화에서의 비중도 절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카메라앵글의 구성과 속도감, 파괴력 넘치는 충돌 장면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도 그럴 것이 호주 문화부로부터 일부 제작 지원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40만호주달러에 불과했던 이 영화의 제작비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길은, 당시 인지도 제로의 멜 깁슨이 받은 출연료가 고작 21달러였으니, ‘자동차’와 ‘액션’이라는 이 영화의 핵심 키워드에 말 그대로 ‘올인’하는 것이었다. 일례로 <매드맥스>의 미국 예고편이 멜 깁슨의 등장 한번 없이 질주하고 충돌하고 폭발하는 카액션 장면의 연속으로만 편집됐음을 상기해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그야말로 ‘정신나간’ 카액션 장면들은 지금 봐도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다. 예컨대 빠르게 달리는 차를 지면에 거의 맞닿은 채로 따라가는 카메라앵글이라든지 근접거리에서 차와 차가 실제로 충돌하고 파괴되는 장면들은 CG 기술은 물론 리모트 컨트롤 카메라와 카-마운트 방식의 특수촬영 자동차도 존재하지 않던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문자 그대로 ‘목숨 내놓고’ 찍은 대담함 덕에 가능한 것들이었다. 물론 미니어처를 제작할 예산조차 없었기에 당연히 모든 카액션 장면들은 ‘트릭’이라고는 전혀 없는 실제 도로 위에서의 주행 상태에서 촬영되었으며, 촬영현장에서는 테이크마다 상식을 초월하는 촬영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조지 밀러의 의견에 스탭조차 아연실색할 정도였다고 하니, 영화 속의 놀라운 카액션 장면들에 당시 관객이 경악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닌 셈이다. 최근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매편 스케일을 키우며 기상천외한 카액션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지만, 그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는 <매드맥스> 1편의 박력 넘치는 아날로그 카액션만큼은 이후의 어느 영화도 흉내내지 못한 전인미답의 경지로 남아 있다.

한편 다른 측면에서 <매드맥스>가 주목받은 점은 이전의 SF영화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낙후된 미래상’을 인상적인 비주얼로 제시했다는 데 있다. 물론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는 프로덕션 디자인에까지 제작비를 투입할 여력이 없었던 이유도 크지만, 발전적이고 이상적인 미래상에 집착하던 그간의 SF영화와 달리 황폐화된 땅과 도로, 약탈과 폭력의 무질서로 점철된 근미래의 설정은 카메라에 담아내는 그 자체만으로 뜨거운 공기와 황량한 분위기가 물씬 전해지는 호주 대륙 특유의 스산한 풍경과 묘하게 어울리며 기이한 기운을 뿜어낸다.

이같은 영화의 화제성은 곧 영화사에 남을 거대한 성공으로 이어졌다. 제작비 40만호주달러로 만들어진 <매드맥스>는 개봉 이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전세계적으로 1억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려 제작비 대비 최고 수익률을 올린 영화로 한때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이 기록은 1999년 2만2천달러로 2억4천만달러를 번 <블레어 윗치 프로젝트>가 경신한다).

<매드맥스2: 로드 워리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의 최고봉 <매드맥스2: 로드 워리어>

당연하게도 <매드맥스>의 믿을 수 없는 성공은 속편 <매드맥스2: 로드 워리어>(1981, 이하 <로드 워리어>) 제작으로 즉시 이어졌다. 450만호주달러가 투입된 제작비는 1편보다 10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당시 기준으로 호주 영화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였고, 뉴사우스웨일스주의 브로큰힐 사막에 지어진 생존자들의 요새 건물은 이전의 호주영화에서 전례가 없었던 규모의 세트로 지어져 화제를 모았다. 무명에 불과했던 멜 깁슨은 이제 꽤 알려진 액션 스타가 되었으며, 전세계 배급사들이 영화를 사기 위해 줄을 섰다. 모든 면에서 1편보다 더없이 풍족해진 제작 환경이었지만 그만큼 커진 부담감 속에 여기저기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영화의 세계관을 머릿속에 그려왔던 조지 밀러의 준비된 자신감은 결과적으로 <로드 워리어>를 전편보다 나은 속편의 리스트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작품으로 만들었다. 전편의 오일쇼크와 대공황이라는 위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핵전쟁 이후의 세계로 배경 설정을 확대한 만큼 카액션의 스케일과 박력은 물론 다양한 개성으로 확대된 악당 캐릭터의 진용, 당시 비교적 관대했던 호주의 영화 검열 체계에도 불구하고 상당 부분이 가위질당했을 정도로 시리즈 중에서도 악명 높은 폭력성 등 모든 면에서 속편에 걸맞은 면모를 갖췄다.

특히 <로드 워리어>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 불리는 SF 하위 장르의 전형을 1편으로부터 더욱 지독하리만큼 극대화된 설정으로 진화시켜 완성된 세계관을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핵전쟁 이후 황폐화된 무법천지의 땅, 더이상 잃을 게 없는 떠돌이 주인공과 그의 곁을 따르는 개 한 마리, 가죽 재킷의 라이더 패션과 허리에 찬 샷건까지 <로드 워리어>의 숱한 상징적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워터월드> <나는 전설이다> <일라이> 같은 후대의 할리우드영화는 물론 <로드 워리어>의 설정을 거의 그대로 가져오다시피한 일본 만화 <북두의 권>과 유명 게임 시리즈 <폴아웃>에 이르기까지 <로드 워리어>가 일련의 묵시록적 SF 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또한 70년대에 집중적으로 쏟아진 호주산 B무비를 일컫는 ‘오즈플로이테이션’(Ozploitation) 영화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당시의 미국영화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무자비한 액션과 폭력성을 꼽을 수 있는데, 그같은 흐름의 결정판이랄 수 있는 <매드맥스> 역시 쿠엔틴 타란티노와 같은 하위 장르 영화팬들에게 가히 열광적인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로드 워리어>의 미국 개봉은 소규모 배급사에 의해 이루어졌던 1편과 달리 메이저 배급사인 워너브러더스가 담당하여 1982년 당시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2320만달러를 벌어들였는데, 이 영화를 인상적으로 본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가 제작한 옴니버스영화 <환상특급: 극장판>(1983)에서 가장 충격적인 에피소드로 평가받은 <발렌타인의 악몽> 편에 조지 밀러를 연출자로 섭외하기도 했다.

IMDb에 소개된 트리비아 중 한 항목에 따르면 제임스 카메론 역시 <로드 워리어>를 <터미네이터>에 영향을 준 작품 중 하나로 언급했는데, 당시 미국의 영화언론은 영화산업의 변방이라 생각했던 호주에서 이같이 완성도 높은 컬트적 상업영화가 만들어진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곤 했다. 로저 에버트는 별 4개 만점에 3개 반을 매기며 “날것의 운동에너지로 가득한 순수 액션 그 자체의 영화”라 호평했다. 물론 일부 미국 언론은 “자극의 연속에만 집착한 값싼 B급영화”로 애써 깎아내리는 등 영화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듯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지만, 98%의 로튼토마토 지수(톱 크리틱 100%)가 대변하듯 <로드 워리어>가 남긴 명성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매드맥스3: 썬더돔>

거대한 실패 <매드맥스3: 썬더돔>

밀러 감독은 시리즈를 애초 2편으로 끝내려던 계획을 수정해 야생에서 원시부족으로 사는 아이들을 발견한 맥스의 이야기를 다룬 <매드맥스3: 썬더돔>(1985)을 기획하지만, 그의 영화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뜻밖의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매드맥스>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함께 키워낸 제작자 바이런 케네디가 로케이션지 물색 중 불의의 헬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것. 단순한 제작자로서가 아닌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함께한 동료를 한순간에 잃은 그는 3편의 제작 의지를 거의 상실하기에 이른다. 결국 밀러는 극중 액션 장면 연출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공동 감독으로 초빙한 조지 오길비가 연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완성되었다. 당시 최고의 팝스타였던 티나 터너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하는 등 화제를 모았지만, 결과적으로 <매드맥스3: 썬더돔>은 1200만달러라는 시리즈 최대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가장 실망스러운 프랜차이즈 속편 중 하나로 남게 됐다. 어설프게 강조한 신화적 코드는 전체 줄거리와 융합하지 못한 채 겉돌았고, 흥행을 의식한 전체 연령대의 대중성 확보에 집중한 나머지 이전 시리즈 특유의 컬트적 개성과 무자비한 폭력성이 희석되어 평범하다 못해 밋밋한 액션영화에 그치고 말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나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극중 비행기 탈출 장면과 폭주 기관차 액션 장면은 ‘탈것’으로 볼거리를 만드는 액션 연출에 있어서만큼은 대가의 반열에 오른 조지 밀러의 장기가 여전히 빛을 발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매드맥스3: 썬더돔>

‘전설’의 귀환

이후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조지 밀러의 행보는 대중과 평단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꼬마돼지 베이브>(1995), <해피피트>(2006) 등 가족영화의 제작, 연출자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드맥스> 시리즈로 그를 기억하는 장르영화 팬들에게는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 것이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할리우드에 불어닥친 프랜차이즈 리부트 열풍과 함께 들려온 새로운 시리즈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제작 소식은 “설마…?” 하고 상상했던 그것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으며, 백전노장 조지 밀러가 감독으로 컴백할 것이라는 소식은 곧게 뻗은 아웃백(Outback) 도로를 갈라놓을 듯 우렁차게 울리는 엔진 굉음처럼 골수 ‘<매드맥스> 팬’들을 열광케 했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된 칸국제영화제 일정에 맞춰 공개된 30년 만의 새로운 시리즈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쏟아지는 온갖 언론과 영화팬들의 극찬 세례는 ‘전설’의 명예로운 귀환을 알리는 신호로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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