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정말 괴상한 시리즈다…
2015-09-16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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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블록버스터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굳이 후속작이 필요 없는 간소한 소품이, 어떻게 이어지는 불필요한 속편들로 인해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가 될 수 있었는지, 이들이 조금씩 쌓이면서 만들어진 위태로운 세계가 어떻게 원작의 의도와 계획을 거슬러가며 수많은 작가와 감독이 공유하는 놀이터가 될 수 있었는지, 그런 놀이의 결과가 어떻게 그 놀이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한 90%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착한 터미네이터로 나오는 <터미네이터2>를 진짜 원조 <터미네이터>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1편과 2편을 연달아 봐주기 바란다. <터미네이터2>가 정말로 쓸모없는 속편이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터미네이터> 1편은 자기완결성이 분명한 작품으로 속편 따위는 필요 없다. 스카이넷은 핵폭탄으로 인류의 대부분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카일 리스가 미래에서 와서 사라 코너를 구출했고 존 코너가 태어났으니 그는 멸망 이후 인류 군대를 이끌며 스카이넷을 파괴할 것이다. 물론 스카이넷은 멸망 직전에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 사라 코너를 죽이려 하겠지만 이 돌고 도는 순환의 굴레는 바뀌지 않는다. 인류 문명은 잠시 멸망하겠지만 스카이넷도 멸망할 것이며 인류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 <터미네이터> 1편의 세계에서 시간여행으로 만들어진 인과의 고리는 안으로 닫혀 있으며 영화의 결말이 주는 감흥도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나온다. 이것으로 끝이다. 정말로.

캐릭터가 어찌나 제각각인지

물론 여기엔 다른 문제도 있긴 하다. 스카이넷이 시간여행이 가능한 기계를 만들 수 있다면 인간도, 다른 기계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오로지 인과의 고리가 안으로 닫힌 여행만을 허용할 것인가? <터미네이터> 1편의 세계는 그래야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게 그냥 우연이었다면? 카일 리스를 보낸 존 코너가 사실 카일 리스의 아들이 아니었거나 카일 리스의 아들이더라도 우리가 개고생한 걸 목격한 카일 리스가 아닌 다른 평행우주의 카일 리스의 아들이었다면?

<터미네이터2>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곁가지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이를 이용해 1편을 배반하면서도 그게 심하게 눈에 뜨이지 않고 그러면서도 울림이 크고 주제도 만만치 않은 영화를 만들었다. 좋은 영화다. 아마 1편보다 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편과 2편을 연달아 보라. 2편이 1편의 설정을 파괴하고 결말의 여운을 망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해피엔딩은 도대체 왜 나오나? 그리고 왜 존 코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T-800을 보내는 걸까. 좋은 영화지만 이상적인 속편은 결코 아니다. 말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1, 2편까지는 한편으로 묶어서 볼 수 있다. 작가 자신이 허용한 한번의 배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자기 세계관에 대한 재검증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한번으로 족하다. 그 이상을 넘어가면 농담이 된다. 개인적으로 <터미네이터> 3, 4편에 대한 악평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3편은 의외로 괜찮았고 4편도 그렇게 조리돌림을 당할 정도로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 각자 자기만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전체 시리즈 안에서 이들을 보라. 이건 정말 괴상한 시리즈다. 일단 계속 나오는 주인공이 없다. 전체 시리즈에 나오는 T-800은 모두 다른 사이보그이고 역할도 악당에서부터 구원자에 이르기까지 다 다르다.

같은 건 오로지 배우뿐인데 CG 터미네이터가 나오는 4편에서는 그런 말도 할 수 없다. 사라 코너는 1, 2편에서 어떻게 캐릭터의 연속성을 유지하지만 (2편 감독판을 믿는다면) 세편의 영화에서 이 인물이 가는 길은 모두 다르다. 2편부터 4편까지 존 코너는 배우가 모두 다를 뿐만 아니라 캐릭터도 제각각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각의 작품들은 모두 앞의 작품을 배신하는 스토리 구조를 취하고 있다. 카메론 자신이 간신히 해피엔딩을 만들어놨더니 그걸 다시 멋대로 뒤엎는 3편을 보라.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를 실망 없이 제대로 즐기려면, <터미네이터>라는 시리즈가 원래부터 그렇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이보그 살인병기가 나오는 인류의 운명을 건 액션이라는 기본 재료는 옛날에 물 건너갔다. 이제 <터미네이터>는 시간여행과 평행우주라는 게임 보드와 T-800, 사라 코너, 존 코너, 카일 리스라는 말을 갖고 뭐든지 할 수 있는 샌드박스 게임 비슷한 것이 돼버렸다. 반드시 지켜야 할 캐릭터도, 설정도 없다. 그냥 막 하면 된다. 시리즈의 정통성으로 돌아간다는 부담도 없다. 그나마 지켰으면 하는 건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T-800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배우의 어쩔 수 없는 노화 때문에 이것도 좀 이상해져버렸다. 백발의 슈워제네거가 ‘파피’로 나오는 영화.

정상적인 시리즈였다면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거의 우상 파괴적인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4편까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존 코너는 악역이 됐다. 1편에서 장엄하게 죽어갔던 카일 리스는 살아남았다. 1, 2편의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패러디되거나 파괴되거나 변형되거나 뒤섞인다. 지금까지 인류의 운명을 건 장엄한 결말을 고집해왔던 전작과 달리 TV시리즈의 파일럿처럼 결말을 열어놓는다. 하지만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는 이는 전혀 전복적이지 않다. 2편부터 이들은 그냥 그래왔다. 하긴 끝없이 갈라지는 무한의 평행우주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하나의 우주가 해피엔딩을 맺거나 멸망했다고 이를 심각하게만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시리즈의 몰락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2편에서 평행우주를 처음 도입한 카메론을 탓하라.

저작권 문제와 자폭을 일삼는 속편들

걸작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게 좋은 영화도 아니겠지만,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더이상 눈치보지 않고 무심하게 선언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 전체가 팬의 재해석, 그러니까 팬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럴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게임의 뒤를 잇는 작가나 감독은 최소한의 논리만 확보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게임이 반복되는 동안 1, 2편의 무게는 완전히 날아가버릴 것이다. 게임에서 특정 이야기의 가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게임을 가능하게 하고 반복하게 하는 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의 운명 따위가 왜 중요하겠는가. 언제든지 뒤집어엎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유희에 불과한 것을.

물론 모든 게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터미네이터>의 자폭을 일삼는 속편들이 연달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한동안 이 프랜차이즈가 저작권 문제 때문에 카메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미국 내 흥행 실패 때문에 이런 식의 억지 제작이 중단될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카메론이 다시 프랜차이즈를 잡는다고 해서 지금까지 나온 영화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중국 내 흥행 성공 때문에 속편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소문이 도는 판이니 영화 외적인 상황을 갖고 시리즈의 미래를 예측하는 건 그리 의미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말은, 누가 전권을 쥐고 누가 각본을 쓰고 누가 감독을 하건 간에 <터미네이터>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지금의 설정을 따라가며 그 가능성을 실험하는 시리즈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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