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는 저 스스로 만들어지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
2015-10-27
글 : 윤혜지
사진 : 백종헌
<스틸 플라워> 박석영 감독
박석영 감독

2015 <스틸 플라워> 각본, 연출 2014 <들꽃> 각본, 연출 2013 <찡찡 막막> 촬영 2009 <뭘 또 그렇게까지> 제작부

스틸 플라워. 박석영 감독의 전작 <들꽃>을 봤다면 그 제목의 의미를 ‘여전히, 꽃’(Still Flower)이라 짐작하겠지만 <스틸 플라워>는 ‘강철 같은, 꽃’ (Steel Flower)이다. 메마른 땅 위에 홀로 선 세 소녀의 이야기 <들꽃>의 막내로 출연한 정하담이 홀로서기를 시도한 작품이다. <들꽃>의 하담이 곧 <스틸 플라워>의 하담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만일 같은 인물이라 가정한다면, 하담은 <들꽃>의 언니들로부터 약간의 시간을 두고 버려진 아이다. 자기 손으로는 수습하기도 힘든 무겁고 번거로운 짐을 안고 하담은 홀로 부산의 어느 바다에 당도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건지, 짐의 무게에 휘둘리는 건지 <스틸 플라워>의 오프닝에서 하담은 바닷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한다. 그러고 나선 자립을 위해 걸음을 내딛는다. 스스로 집을 찾고, 일을 찾고, 사람을 찾는다.

<들꽃>은 박석영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작품이 되었지만 그는 <들꽃>의 일부를 괴로움으로 반추한다. “가출 청소년의 현실을 그리고 있음에도 내가 그들을 이용한 꼴이 된 건 아닌가 하는 부채감이 있었다. 일을 도왔던 어느 기관의 봉사자 선생님께 영화를 완성하고 보여드리려 했는데 안 보겠다고 하셨다. 매일 보고 있는 풍경을 굳이 영화로 볼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때 알았다. 난 이 사람들에게 <들꽃>을 보여줄 수 없겠구나. 자괴감이 성취감보다 컸다. 데뷔작을 낸 건 신기한 일이었지만 안으로는 곪아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여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해나갈 수 없겠다는 불안에 박석영 감독은 다음 영화를 찍기로 했다.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난 <유골의 얼굴>의 샤카완 이드레스 감독에게서도 에너지를 얻었다. “내가 머릿속에 구상한 그림을 얘기해줬다. 쫓겨나 굶고 있던 여자아이가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눈물을 닦고 카메라 밖으로 나갈 때 멀리 이 친구의 탭댄스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이미지. 이야기를 마치자 샤카완 이드레스 감독이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 눈물까지 내게 힘을 만들어줬다.”

<스틸 플라워>

<들꽃>을 함께하는 동안 감독은 정하담에게서 “특별한 정직함”을 발견했고, 정하담을 주인공으로 <스틸 플라워>를 떠올렸다. 정하담은 <들꽃>의 오디션을 볼 때 A4 용지 한장에 전사를 꽉 채워오라던 감독의 요구도 듣지 않았고, 오디션 중 옆에 있는 스탭을 한대 때려보라던 감독의 말에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어 못 때리겠다고 거부하며 그 자리에서 눈물을 비친 이상한 아이”였다. 이름이 뭐냐는 감독의 질문에는 말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왜 답을 안 하냐는 물음엔 “목소리는 부드러운데 어쩐지 냉정한 말처럼 들려서 대답을 못하겠다”고 대꾸했다. “<들꽃>에 출연한 조희봉 선배님께 전화해서, 이런 애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선배님이 그러셨다. ‘걔는 말을 듣는 게 아니라 감정을 듣는 애야. 들을 수 있는 애인 거야.’ 그 뒤로도 몇번 더 하담이를 시험했는데 내겐 이 애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았다. (웃음) 그리고 이 애가 <들꽃>에 흙처럼 존재해주지 않으면 다른 애들이 그 위에 심길 틈이 없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자기 소리를 낼 줄 알고 주관이 뚜렷한 정하담은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되었다.

전작과 완전히 분리해서 볼 순 없지만 <스틸 플라워>는 <들꽃>과 많이 다른 영화다. 서사는 훨씬 간결해졌고, 영화적 기운은 더욱 세졌다. 두편 모두 홈리스 소녀의 생존기를 그리고 있지만 <들꽃>의 소녀들과 <스틸 플라워>의 하담은 엄연히 다르다. “<들꽃>에 소녀들의 조력자가 없는 것은 보는 너희들이 도와주라는 뜻이었지만, <스틸 플라워>에 하담의 조력자가 없는 것은 하담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영화의 첫 장면, 바다를 앞에 둔 하담은 제 몸만 한 짐을 안고 어쩔 줄 모른 채 휘둘린다. 마지막 장면도 인물과 공간은 같다. 다만 그때 하담은 제 몸밖에 지킬 것이 없다. 하담은 가슴을 꼿꼿하게 펴고 마주 오는 세찬 파도를, 그에게 닥칠 세상의 위협을 씩씩하게 견디어낸다. 오프닝에서 엔딩으로 영화가 흘러가는 도중, 말수가 적은 하담이 제 소리를 낼 다른 방도로 찾은 것이 탭댄스다. 자신의 존재를 또렷하게 알리기라도 하려는 양 탭슈즈를 신은 하담의 발은 자기만의 리듬으로 소리를 낸다. 감독은 춤을 추는 하담의 모습에서 “긍지”를 보았다고 했다. “나중에 나이가 많이 들더라도 하담이 탭댄스를 추는 장면을 돌려 보면 마음이 맑아지고 너그러워질 것 같다. 이렇게 엉망으로 사는 인간인 내가 영화를 통해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스틸 플라워>는 내 다음 영화의 다른 씨앗이 될 거다.” <들꽃>과 <스틸 플라워>를 거치며 “영화는 저 스스로 만들어지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를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박석영 감독의 다음 영화는 <재꽃>(Ash Flower, 가제)이다. “모든 것이 다 타서 없어질 정도로 끝까지 부딪치고, 그렇게 불탄 뒤 깨끗해지는 정화의 과정”을 담은 가족 드라마다. 전작들보다도 훨씬 명확한 드라마의 구조를 갖추게 될 작품이란다. “영화에 애정을 갖고 이야기를 하면 어느샌가 필요한 사람이 모이고, 필요한 조건이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지금은 그렇게 얻게 된 것들 하나하나에 감동하고 감사하고 있다.” 감독에게 영화 만드는 일의 온전한 기쁨과 긍지를 안겨준 이 영화의 다음에 필 꽃은 분명 더 사랑스럽고 진한 향기를 품고 있으리라 기대해본다.

요즘 꽂힌 것

아프리카

세편의 꽃영화를 마무리한 뒤에 감독은 아프리카로 떠날 예정이다. 프랑스의 감독 겸 프로듀서 바스티안 메르손과 함께다. 감독은 아프리카로 날아가 종군 사진작가를 소재로 영화를 찍겠다고 한다. 국내 투자사에 말하니 돈이 너무 많이 든다고 하여 둘이 단출하게 만들 생각이다. 인물도 배경도 전작들과 아주 달라지겠지만 그가 향하게 될 곳은 결국 또 다른 인간과 인간애가 존재하는 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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