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도의 기운을 육화한 사람들을 담아내다
2015-10-27
글 : 윤혜지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조 감독
김영조 감독

2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출 2013 <사냥> 연출 2009 <목구멍의 가시> 연출 2008 <태백, 잉걸의 땅> 연출 2007 <가족 초상화> 연출 2003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연출부

2013년 영도대교 재개통 직후 ‘점바치골목 활성화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영도 점바치골목도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이 땅에 살던 이들은 하나둘 영도를 떠났다. 가게터 주위엔 철거 작업용 철조망이 둘러졌고, 조선소가 있던 자리는 녹슬어 폐허가 되어갔다. 주인 없는 빈집엔 먼지만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보다 조금 더 앞선 3년6개월 전부터 “영도의 곳곳을 알리고 싶어” 영도를 찍기 시작했던 김영조 감독은 제작비 조달이 힘에 부쳐 슬슬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점바치골목 활성화사업이 시행되었고, 감독은 영도가 더 많은 모습을 잃기 전 카메라를 고쳐잡았다. 작은 땅 영도에마저 휘몰아친 재개발 광풍.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백 폐광촌의 개발 불균형을 다루며 그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찍은 <태백, 잉걸의 땅>, 조선족 주인공의 가족사를 통해 “우리이면서 우리가 아닌 그들”을 관찰했던 <목구멍의 가시>에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도 “개인의 몸”을 통해 시대와 역사를 살피는 다큐멘터리다. “부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영도에 대해선 외부인보다도 아는 게 없었던” 감독은 영도 토박이인 권민기 선박용접기사를 통해 누구를, 어떻게 찍을지 구체화할 수 있었다. “지금은 민기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다. (웃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셔서 손님이 오면 꼭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영도를 소개하더라. 같이 다니다보니 다른 분들도 알게 됐고, 신기한 광경도 많이 봤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강아지를 업고 다니는 임간난 할머니, 소문난 대구 점집 배남식 할머니, 장미화 점집 김순덕 할머니, 해녀 강해춘 할머니, 권민기 선박용접기사까지 다섯명. 감독은 1년6개월 동안 이들의 생활을 관찰하며 자연스레 영도 땅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얘기지만, 대상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녹이기 위해선 “친해지는 과정이 우선”이었다. 싹싹한 성격의 감독은 먼저 배남식 할머니네 점집에 점을 보러 다녔다. 슬슬 얼굴을 익히고 난 뒤엔 종종 손님을 끌어오기도 했다. 한동안 할머니들을 모시고 구청과 법률사무소도 오갔고 밥도 같이 먹었다. 해녀 할머니를 섭외할 때도 그랬다. 해녀 할머니네 가게에 가서 회나 해물을 먹었고, 그렇게 지내다보니 감독이 거기 있는 것이 언젠가부터 자연스러워졌다. “처음에 ‘그냥은 안 된다’고 하셨던 배남식 할머니가 나중엔 미안하시기라도 했는지 밥 사먹으라고 돈도 주셨다. (웃음)” 돈 대신 감독은 카메라를 집 안으로 들여주십사 부탁했고, 촬영은 무리 없이 진행됐다. 배남식 할머니가 동전을 짤랑이며 점을 치는 모습, 귀가 잘 들리지 않아 고래고래 목청을 높여 딸과 대화하는 강아지 할머니의 모습, 딸을 그리워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해녀 할머니의 모습, 색소폰으로 근사하게 <부산 갈매기>를 연주하는 권민기 기사의 모습 등이 그렇게 카메라에 차곡차곡 담겼다. 주민들이 영도에 발붙이고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육화한 어떤 기운들은 보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감동으로 전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감독이 가장 욕심낸 부분은 수중촬영이다. 원래 바닷속에서 찍으려던 장면은 어느 용접기사가 바다 밑으로 들어가 용접을 하는 장면이었다. “처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구상할 땐 그 모습이 영화의 인트로였다. 잠수헬멧을 쓰고 물속에 뛰어든 용접기사는 흡사 우주인 같은 모습으로 어두운 물속에서 홀로 불꽃을 튀기며 용접 작업을 한다.

어두운 와중에 보일 듯 말 듯 불꽃에 의지해 일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강렬했다.” 그 이미지만은 꼭 자기 손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해 감독은 스쿠버다이빙까지 배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찍으려던 기사의 일거리가 떨어져 다른 곳으로 일하러 가는 바람에 감독은 새로운 대상을 찾아야 했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관심을 갖게 된 대상이 해녀 할머니였다. 더 좋은 장면을 찍고자 하는 욕심에 감독은 “감히 해녀 할머니의 물질을 흉내내겠다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며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그러다 현기증이 나 물가에서 기절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어쨌건 그 고생을 하며 카메라를 들고 있던 덕에 관객은 해녀 할머니가 일하는 풍경을 진득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자못 숭고하고 신비롭기까지 한, 나이 든 노동자의 묵묵한 움직임을. 김영조 감독의 영화사 이름은 ‘월요일 아침’이다. <목구멍의 가시>를 연출하면서 창립했다. 듣기만 해도 “힘들고, 피곤하고, 싫은” 그 이름을 왜 영화사 이름으로 내걸었을까. “독립영화 만드는 일이 으레 그렇잖나. 힘들고, 피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는 거고. 피할 수 없으니 힘이라도 내보려고 그랬다. (웃음)” 한주가 지나면 꼭 돌아오고야 마는 월요일 아침은 또 다른 한주의 시작이기도 하다. 홀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아마도 그는 앞으로도 매번 힘겹고 피로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은근한 긍정’으로 그는 매주 아침을 즐거이 맞이할 것이라 짐작해볼 뿐이다.

요즘 꽂힌 것

사진을 그리는 사람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아이템이다. 부산에 사진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오래돼 희미해지거나 알아보기 힘들어진 사진 위에 물감으로 덧칠을 해 다시 예쁘게 사진을 살려주는 사람이다. 요한 판데르 쾨컨의 <이도상 사진관>(1997)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는데, 거기 보면 네덜란드로 이민 온 중국인 사진사 도상이 사진을 찍은 뒤 현상이 안 된 나머지 부분에 색칠을 해준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다. 부산의 그분은 호객을 할 때도 ‘사진 찍어요~’ 대신 ‘사진 그려요~’라고 외친다. 그 예술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앞으로 한동안은 그분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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