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우의 말과 움직임으로만 할 수 있는 어떤 것
2015-10-27
글 : 윤혜지
사진 : 오계옥
<소통과 거짓말> 이승원 감독
이승원 감독

2015 <소통과 거짓말> 각본, 연출 2014 연극 <괴물> 각본 2014 연극 <모럴패밀리> 각본, 연출 2014 뮤지컬 <트루시니스> 각본, 연출 2012 뮤지컬 <짝사랑> 각본, 연출 2011 연극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각본, 연출 2009 뮤지컬 <더 스토리 오브 노틀담 드 파리> 각본, 연출 2004 단편 <모순> 연출

부산에서 오간 영화인들의 대화 중 빈번하게 들려온 말이 있다. “<소통과 거짓말> 봤어?” “뉴커런츠 섹션? 봤지.” “어땠어?” “…글쎄.” 여기서의 ‘글쎄’는 영화가 나빴다는 뜻으로 말을 흐린 게 아니다. 보았으되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는 망설임의 표시다. 이승원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통과 거짓말>은 독특한 구성과 형식,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상황 설정, 배우들의 열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올해 부산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였다.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과 올해의 배우상(장선)을 감독의 양손에 하나씩 쥐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4:3 화면비에 흑백화면을 고집스레 유지한 채로 카메라는 가급적 가까이에서 인물의 얼굴 혹은 신체를 담고, 인물들은 극단적인 거짓말로 서로에게 닿으려 애를 쓴다. 일련의 허언으로 조금씩 가까워진 두 남녀, 김권후와 장선은 도착적이고 파괴적인 섹스를 시도한다. 그들에게 섹스는 교감하기 위한 또 하나의 통로다. 서로에게 마구 내뱉은 말들처럼 그들의 섹스 또한 기이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다행히도 약간의 거리가 좁혀지고 둘은 설핏 객관적인 참말을 주고받으려 한다. 하지만 약간의 다행만큼 곧이어 덮쳐오는 불행은 너무나 거대하다. 남녀는 결국 이어지지 못한다. 그리고 남자는 그 단절의 이유를 알게 된다. 이후 이어지는, 이승원 감독마저 “촬영 중 함께 무너지고 말았던” 강렬한 엔딩은 <소통과 거짓말>의 시작이기도 했다. “북적북적한 건대입구역 근처에 택시가 한대 섰다. 어떤 백인 남자가 술에 만취해서는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영어로 한번만 같이 섹스를 해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소통과 거짓말>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인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저 슬퍼 보였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그 모습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쓸쓸한 남자의 이미지는 이승원 감독의 머릿속에서 <소통과 거짓말>의 단초가 되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남녀가 어쩌다 두 사람만이 통하는 길을 찾게 되는데 결국 맺어지지 못한 채 끝난다”는 큰 그림만 간직한 채로 감독은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장애를 가진 연인이 사랑을 키워나간다는 내용의 연극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문제 많은 집안 식구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 <모럴패밀리> 등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 주목해온 이승원 감독에게 어쩌면 <소통과 거짓말>도 필연일지 모른다.

감독은 관객이 두 배우의 말과 움직임에만 주목해주길 바랐기에 4:3 화면비와 흑백화면을 엄격하게 고수했다. 어떠한 가이드도 바라지 않아서 일체의 조명과 음악도 쓰지 않았다. 촬영감독에겐 가급적 인물을 집중적으로 잡아달라고 요구했다. 이 영화는 드라마로 밀고 가는 이야기가 아닌, 배우가 끌고 가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학교를 1년쯤 다니(다 그만두)긴 했지만 기술적으로는 배운 게 없고, 평생을 되짚어봐도 읽은 책조차 10권이 안 된다”는 이승원 감독은 “무대와 배우만 있으면” 작품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생계는 유지해야겠으니 아동극 극단에 들어가 연출을 도왔다. 거기서 아동극하는 배우를 처음 만났는데 그가 김권후다. 서로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만난 사이다. 그에게도 나에게도 비슷한 종류의 영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 이후로 김권후와 꾸준히 함께 작품을 하고 있다. 장선은 내 연극 데뷔작에 출연했던 배우인데 공교롭게도 영화 데뷔작에도 주연을 맡아줬다. 영화 속에서 학원 원장과 슈퍼마켓 주인으로 1인 2역을 맡은 김선영은 내가 첫 단편을 할 때 만난 배우인데 그걸 계기로 나와 결혼해 같이 살고 있다. (웃음) 가장 신뢰하는 배우들과 함께한 영화라 그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다.”

배우들과의 교감을 가장 중히 여기는 감독은 웬만해선 연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시나리오는 존재했지만 영화를 채워가는 건 순전히 배우들의 몫이었다. 감독으로서 배우들에게 반드시 얘기해두어야 했던 내용들, 가령 노출 여부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미리 이야기해둔 것도 없었다. “내가 한 건 여자의 가방 안에 묵직하게 옷가지를 챙겨넣어 준 것이 전부다. 가방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랐던 장선은 그걸로 가방의 용도를 깨달은 것 같았다.” 그 가방 속의 비밀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감독이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두려움에서 비롯했다. 이전엔 몰랐다지만 감독 역시 어린 자녀를 두고 있는 지금, 그에게 가장 절망적인 상황이란 바로 그 아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알고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라면 나도 인물들의 기행을 납득할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이미 고통의 한계를 넘긴 사람이라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배우뿐만이 아니다. 같은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 동문인 김상수 프로듀서도 지금은 감독에게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람이다. 연극만 계속하며 지내던 때, “영화와 다시는 연이 닿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회의감에 빠져 있을 때”에 김상수 프로듀서가 그를 찾아왔다. 오래전 이승원 감독이 썼던 장편 시나리오의 내용을 기억하고는 같이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하러 온 거였다.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그 손길은 감독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아마도 차기작 역시 김상수 프로듀서와 함께하게 될 거라고 감독은 말했다. “배운 것은 없어도” 로버트 알트먼, 쿠엔틴 타란티노,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영화라는 매체를 공부해왔다는 이승원 감독은 영화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결국엔 연출자가 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이야기에 맞는 틀을 자유롭게 선택하면 되는 것”이라고 시원스레 답한다. 오만도 자신도 아닌, 그저 앞날을 향한 희망으로. 남들과 다른 내 걸음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긍정을 담아서 말이다.

요즘 꽂힌 것

연극 <괴물> 희곡

이승원 감독 자신이 대본을 쓴 <괴물>이란 연극이 있다. 저마다의 괴이한 삶을 살고 있는 가족이 첫째 아들, 괴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다. 그가 먹을 음식에 독을 바른 채로 가족들은 괴물의 죽음을 기다린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가족은 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 보인다. 처음엔 “영화로 만들기 위해 써둔 글”이었다. 지인인 연출가의 제안으로 정기공연으로 먼저 올렸지만 감독은 <해피 버스 데이>라는 원제로 영화화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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