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비포(before)여야만 했을까? ‘비포’ 시리즈로 불리는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을 다시 보고 든 의문이다. 텍스트를 재독한 결과가 제목에 대한 단상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에 앞서, 한 가지 전제부터 밝혀야겠다. 어떤가 하면 나는 두번의 반복은 우연일 수 있지만, 세번 이상의 반복은 우연이 아니라고 믿고, 그 이유를 해명해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예컨대 영화 제목에 ‘~전에’라는 뜻의 비포가 거듭해서 쓰이고 있다면, 특정한 전치사가 내포한 시제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포를 고수하는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감독처럼 보인다. 그는 끝을 출발점으로, 시작을 종결점에 두고 시간을 사유한다. 반대의 경우였다면 제목에 비포 대신 애프터(after)가 사용되어, 이 영화들은 어쩌면 우리에게 애프터 시리즈로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가령 비포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비포 선라이즈>는 어떠한가. 링클레이터가 시작을 출발점으로, 끝을 종결점에 두었다면, 오전에 만나 함께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오전에 헤어지는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의 이야기는 <애프터 선라이즈>라고 명명되어야 했으리라. 물론 그랬다면 영화 내용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 테다.
이 말이 적잖이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비포 시리즈야말로 선형적인 시간관을 체현한 스토리 라인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루가 채 되지 않는 영화의 내적 시간은 천천히 흐르기는 하되, 플래시백 없이 앞으로만 나아간다. 외형적으로만 간주하면 비포 시리즈는 단순한 플롯을 가진 단선적인 3부작인 셈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비포 시리즈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복잡한 플롯을 가진 복선적인 영화를 보듯 독특한 시간 감각을 향유하게 된다. 영화 형식과 영화 체험이 상반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연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변을 구하기 위해서는 서두에 언급한 ‘왜 비포여야만 했을까?’라는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비포 시리즈에서 일출(sunrise), 일몰(sunset), 자정(midnight)은 서사가 진행될 수 있는 한계 시간을 상정한다. 내일 해가 뜨고, 오늘 해가 지고, 한밤중이 되면 영화는 막을 내린다. 동일한 현상에 대한 다른 해석을 해볼까.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한밤중이 되기 전까지 영화는 계속 상영된다. 명백히 링클레이터는 후자를 선택한다. 표면에서는 그가 과거에서 현재로 시곗바늘을 오른쪽 방향으로 돌리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이면에서는 그가 현재에서 과거로 시곗바늘을 왼쪽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 그는 충만한 현재 시간으로 과거를 탈환하려는 역사가의 태도로, 시간을 일일로 응축하여 비포 시리즈의 역사로 기록한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진정한 상을 붙잡아야 한다는 발터 베냐민의 역사철학테제는 놀랍게도 사랑을 다룬 영화를 통해서도 구현된다. 그러니까 링클레이터가 기억을 역사화하는 한에서, 비포 시리즈는 시간에 관한 영화로 호명되어온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방식은 <보이후드>에서도 일관되고 야심차게 이어진다. 그는 한 남자의 전사인 어린 시절을 테마로 삼아, 비포 시리즈보다 장구한 역사를 오롯이 담아낸다. 신세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미국의 정치•경제•문화적 편린들이 삶에 새겨지면서 소년은 성인이 되어가지만, 전술한 분석에 근거하면 이 영화가 실은 성장기의 외피를 쓴 연대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비포 시리즈에서 정련한 대로, 링클레이터는 아역배우들이 실제로 성장하는 모습을 찍으면서 사실과 허구를 뒤섞은 진짜 역사를 창조한다.
<보이후드>는 “이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다”라는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그렇지만 역사가로서의 링클레이터는 사진가를 꿈꾸는 주인공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으로 하여금 동시에 전도된 메시지를 전하게 하는 것만 같다. 별달리 첨언할 필요도 없이, 역사가와 사진가는 시간과 투쟁하고 흘러가는 순간을 포획하는 프로다. 그래서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나에게는 자꾸 이렇게 들린다. “우리가 이 순간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