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그들 모두가 크리에이터
2015-10-30
글 : 오정연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과 오랜 시간 동등한 창작자의 관점에서 작품 완성해가는 배우들 이야기
<뉴튼 보이스>

애드리브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연기 연출을 둘러싼 반복되는 오해 중 하나였다. 그의 영화 속 모든 장면들은 일상의 한순간을 솜씨 좋게 베어낸 듯 감쪽같았기에 어디까지가 연출이고 실제인지 관객은 궁금했다. 그러나 링클레이터로 말하자면, “나쁜 연기는 나쁜 시나리오의 다른 말”이라고 믿는 감독이다. “느슨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꼼꼼하게 구축되어 있을 뿐이다. 임기응변을 통해 정확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는 그의 촘촘한 영화 설계도에 애드리브를 위한 자리는 없다. 느슨함을 연출하는 치밀한 구성의 레시피를 완성하는 것은 “첫째는 시나리오고 둘째는 리허설”.

배우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대사를 완성함으로써 캐릭터를 넘어 영화 전체의 주인이 되도록 독려하는 것은 <슬래커>부터 이어진 그의 연기 연출법이고, ‘비포’ 시리즈를 거치면서 이는 그의 영화론으로 발전했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어떻게 셀린느를 기차에서 내리게 할 것인가 등을 두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데 그쳤던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시리즈에서 어떻게 시나리오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는지를 살피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비포 선라이즈>는 링클레이터 감독과 킴 크리전이 썼고, <비포 선셋>은 링클레이터와 크리전이 만든 이야기를 감독과 두 배우가 각본으로 옮겼으며, <비포 미드나잇>은 링클레이터와 크리전이 만든 원안을 감독과 두 배우가 각본으로 발전시켰다. 두 배우는 마지막 영화에 이르면, 그리스의 로케이션 장소에서 10주 동안 매일같이 만나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이후 2주 동안 리허설을 반복했다.

<보이후드>

비포 시리즈 18년, <보이후드>의 12년

<비포 선라이즈> 이후 작업을 시작하여 <비포 미드나잇> 직후에 마무리된 <보이후드>에는 링클레이터가 이러한 레시피를 완성하기까지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숏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촬영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구체적인 구조 안에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만이 정해져 있었다. 이런 연기, 이런 드라마, 이런 비주얼은 우리가 피해야 한다는 식으로.” 링클레이터는 출발지와 도착지, 그리고 반드시 피할 것의 리스트가 적힌 쪽지만을 들고 있을 뿐, 그외 모든 여정과 일정의 디테일은 동행들과 함께 결정하는 가이드였다. 재료를 제공하는 대상에 불과했던 어린 엘라 콜트레인과 로렐라이 링클레이터가 촬영이 진행됨에 따라 동등한 공동 창작자로서 여정을 스스로 이끌기까지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미 촬영한 분량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리의 삶도 그런 식 아닌가.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과 내 앞의 현실을 수용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엄청난 도전이지만 굉장히 흥미롭기도 하다.” 재촬영의 유혹을 느낀 적은 없었냐는 질문에 대한 감독의 대답이다. 그러므로 콜트레인에게 극중 메이슨처럼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콜트레인은 이에 “메이슨보다 내가 먼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대답했고, 링클레이터는 “그의 아버지처럼 엘라 역시 음악가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시각예술쪽에 눈을 돌리더라. 그가 만일 250파운드의 레슬러로 자랐더라도, 완성된 영화가 지금과 조금 다른 궤적을 가질 뿐 별 상관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안과 설득, 논의로 점철된 <보이후드>의 배우와 감독 사이에 존재했던 유일한 ‘불화(?)’는 알려진 대로, 메이슨과 사만다가 ‘해리 포터’ 행사에 참여하는 장면을 촬영하던 해 로렐라이 링클레이터가 자신의 캐릭터를 죽여달라고 부탁했던 일. 해리 포터의 세계를 어른들에게 침범받는 것이 불만스럽던 차에, (헤르미온느가 되고 싶은) 자신에게 맥고나걸 교수 분장을 시킨 아버지를 향한 반항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링클레이터는 짐짓 진지하게 덧붙였다. “아버지-딸의 갈등이지, 감독-배우의 불화가 아니다.”

<패스트푸드 네이션>에는 에단 호크와 패트리샤 아퀘트와 엘라 콜트레인이 조• 단역으로 얼굴을 비춘다. 아퀘트는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미혼모로, 호크는 그녀의 철없는 동생이자 조카에게 맥주를 사주며 “23살까지 임신하지 않으면 1천 달러를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삼촌으로, 콜트레인은 주인공(그렉 키니어)의 어린 아들로. 이건 흡사 <보이후드>의 ‘평행우주에 존재하는 이복동생’ 아닌가. <패스트푸드 네이션>이 <보이후드> 촬영 기간 전반기에 제작된 만큼 그저 편의를 위한 캐스팅으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링클레이터 감독이 배우들과 관계맺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쪽이 맞을 듯하다.

<버니>

링클레이터는 18년에 걸쳐 같은 배우들과 ‘비포’ 시리즈 세편을 만들었다. <멍하고 혼돈스러운>에서 적은 비중의 역할 데이비드 우더슨으로 매튜 매커너헤이와 함께한 뒤, 오랜 시간 데이비드의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후속작을 논의했던 두 사람은 <뉴튼 보이스> <버니> 등을 통해 잊을 만하면 협업을 이어왔다. 자신이 감독과 함께 ‘출산한’ 데이비드를 몹시 그리워하던 매커너헤이는 급기야 한 뮤직비디오를 통해 데이비드의 후일담을 선보이기도 했다. 잭 블랙과 링클레이터는 <스쿨 오브 락> 이후 후속편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다 불발에 그친 뒤 <버니>를 통해 재회했는데 당시 블랙은 “우리는 8년 주기로 작업을 같이 한다. <스쿨 오브 락2>는 2020년 전에는 기대하지 마시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우리는 안다. 2020년 전이라도 언제든 링클레이터가 러브콜을 보내면 그가 응할 것을. 혹은 이미 9년과 12년을 기다려 본 전력이 있는 관객에게 8년 주기쯤은 예사라는 것을. 슈퍼맨과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이 돌아오기 전부터 링클레이터가 이미 ‘시퀄의 제왕’일 수 있었던 비결을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링클레이터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그와 함께 작업한 배우들은 절친이 되어 끝없이 그의 주변을 기꺼이 맴돈다.

12년 동안 참여자들 각자를 동등한 창작자로 변화시킨 <보이후드> 역시 이들 모두를 유사 가족으로 묶었다. 이들이 한 시절의 마감을 지켜보는 애틋함과 예견된 향수를 거듭 토로하는 것은 당연하다. “엘라는 아들보다는 조카에 가깝다. 육아의 좋은 점만 존재하는 관계.”(리처드 링클레이터) “이 영화의 일부가 아닌 내 인생이 어땠는지 기억할 수가 없다. 아직은 끝났다는 게 실감이 안 난다. 평소 여름의 끝 무렵 촬영을 했으니 여름의 끝이 되어봐야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겠지.”(엘라 콜트레인) “지난해 그 모든 과정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이 영화를 세상에 보내고 싶지 않고 이 영화, 이 사람들, 이 아이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은 그런 심정.”(패트리샤 아퀘트)

“친구란 당신이 선택한 가족”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예민한 소년이 배우이자 작가이자 감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비포’ 시리즈가 있다고 회고하는 호크는 “친구란 당신이 선택한 가족”이란 말로 링클레이터와의 소중한 인연을 설명한다. “젊은이가 주연인 이 바닥의 모든 좋은 시나리오를 다 받던 무렵의 에단을 기억한다. <비포 선라이즈>처럼 작은 예산의 영화를 위해 그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달려와준 그를 향한 무한한 감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링클레이터는 “당신의 친구는 결국 당신 세계관의 연장”이라고 화답한다. 지음, 절친, 혹은 가족이 되어버리는 그의 배우 활용법이 영화관을 넘어 세계관으로 확장된 것이다. “자동차보다 큰 심장에, 네가 기어다닐 수 있을 만큼 굵은 혈관을 가진 포유류가 바다에서 살고 있다는 것도 마법 아닐까?” 요정과 같은 마법은 세상에 없지 않냐는 메이슨의 질문에 대한 (에단 호크와 그 아들의 실제 대화를 인용한 상황이기도 한) 젊은 아빠의 대답을 빌려 말할 수도 있겠다. “영화가, 관객은 물론 만드는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여 그들을 예술가로 만드는 과정 역시 기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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