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공동경비구역 JSA> 없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 됐을 것”
2015-11-04
글 : 이화정
사진 : 최성열
박찬욱 감독 인터뷰
박찬욱 감독

지난 10월16일 저녁,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슈퍼플렉스G관 상영에 맞춰 극장을 찾은 박찬욱 감독을 만났다. 박찬욱 감독은 요즘 신작 <아가씨>의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15년이 지난 지금 <공동경비구역 JSA>는 그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아 있을까.

-개봉 당시 연속 9주 박스오피스 1위를 하며 한국영화의 흥행 기록을 새롭게 썼다. 앞선 작품에서는 체감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살았구나 싶었다. (웃음) 세 번째 작품을 만든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그것까지 망하면 끝인 상황이었다. 걱정이 컸는데 결과 보고 안도가 되더라. 한창 젊을 때였고 기분이 좋아 배우들이랑 술을 많이 마셨다. 무대인사, 행사도 많아서 정말 매일 어울려서 술 마신 기억밖에 안 난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명필름의 제안을 받고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조영욱 음악감독이 친한 친구였는데, 그때 그는 명필름과 <접속>(1997)의 음악작업을 하면서 큰 성공을 거둔 직후였고, 그래서 명필름에 나를 추천한 거다. 준비해놓은 시나리오를 보여줬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훗날 <복수는 나의 것>(2002)과 <박쥐>(2009)로 만들어진 시나리오들이었다. 비록 가져간 시나리오는 다 싫다고 했지만 나로서는 명필름과의 인연이 금쪽같은 기회인데 놓칠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비주류영화, 반골 감독이라는 소문이 충무로에 파다했었다. 명필름에서 써놓은 각본이나 가지고 있는 원작이 없냐고 그걸 하겠다고 물었고, 그게 바로 박상연 작가가 쓴 <DMZ>를 각색한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프로덕션 단계에서 의견 충돌이 있거나 합의점 도출에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조영욱 음악감독이 그때 명필름과 만나면 “무조건 할 수 있다, 자신 있다, 시키는 건 다 할 수 있다고 해라”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라. (웃음) 영화 찍는 내내 명필름과 어떻게든 잘 지내려고 했다. 다행히 심각한 의견 충돌도 없었고, 프로덕션 과정에서 무리한 요구를 받은 적도 없었다. 굳은 각오가 무색하리만큼 원만하고 행복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당시로선 어떤 ‘타협’으로 보는 시선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언제나 온전히 내 영화라고 생각해왔다.

-<공동경비구역 JSA>에 참여하기 전 <간첩 리철진>(1999), <아나키스트>(2000) 등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그런 이방인, 국외자적인 시선은 소피(이영애) 캐릭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간첩 리철진> 각본은 나와 이무영 감독이 ‘박리다매’라는 팀이름으로 썼지만 당시 투자가 안 되면서 나온 거였고, 나중에 장진 감독 버전은 원래 내가 쓴 버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 작품에서 북한 사람에 대해서 좀 재미있게 그려보자, 인간미도 있고 황당한 면도 가진 사람으로 표현해보자. 북한의 교육을 받으며 우리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는 데서 오는 유머를 끌어내보자 한 것은 어느 정도 <공동경비구역 JSA>의 캐릭터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유영식 감독이 메가폰을 잡게 된 <아나키스트>의 의열단 역시 <공동경비구역 JSA>의 소피의 생부 설정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내가 처음부터 시작한 기획이 아니었을 뿐, 미스터리영화나 소설을 워낙 좋아했고 분단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던 터라 내가 깊이 녹아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가지는 기존의 관습을 벗어난 작품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북한 사람을 악마나 괴물로 묘사하는 전통은 이미 박정희 정권 동안 신물나게 보아온 시각이었다. 편향된 주입식 교육은 분단 현실을 극복하는 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한에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바로 보여줘야 통일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남북한 병사들의 조화를 보여준 것도 그런 지점에서 나왔다. 골목에서 같이 노는 친구들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극중 인물들이 장난스러운 거지, 영화를 만드는 내 태도는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만들 때는 개봉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만들면서 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나 고발을 당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겁도 났다. 우리 세대가 군사정권하에서 성장하다보니 그런 걱정을 안 할 수 없었다. 명필름 이은 대표도 “각오해야 한다. 감옥 갈 수도 있다”고 하더라. (웃음) 그런 비장함을 가지고 임하다보니 제작사에서 요구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전작들에서 보여준 엉뚱하거나 실험적인 것들을 하지 않으려고 자제했다. 이후 내 영화에서 종종 드러나는 의외성, 돌출성이 적은 이유도 ‘분단’과 ‘군대’라는 구체적 현실과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이 의견을 내 만들어진 장면들도 많았다고 들었다. 현장의 분위기는 어땠나.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나왔다기보다 그전부터 상당히 많은 대화를 나누고 반영을 한 결과였다. 처음으로 스토리보드 전체를 만든 영화였고, 그 과정이 내 작업방식에는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그전까지는 스토리보드를 만든 적이 없었는데 명필름이 나를 못 믿은 거지. 이상한 장면을 만들지 않을까 싶었을 거다. (웃음) 하여간 결과가 만족스러워서 그 이후에도 스토리보드를 만들게 되었고, 그게 다른 현장에도 유행처럼 되면서 모든 스탭들이 제본을 해서 스토리보드북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그 스토리보드를 그린 사람이 김상만 미술감독이었다. 프로덕션 디자인 일만 해도 바쁜데 스토리보드 담당이 따로 있지 않았으니 그가 전부 한 거다. 김상만이 완전 일중독자인데 그런 김상만도 힘든 일정이었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무식하게 일을 시켰나 모르겠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20년 영화사에서 가장 멋진 마지막 장면을 보여준 작품’으로 손꼽기도 한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탄생했나.

=예술가로서는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작용한 장면이기도 하다. 내 취향으로 그건 좀, 영화 다 끝났는데 뭘 또 보여주려고 하나, 사족 같은 생각이 들어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중반부에 외국인들끼리 “한국은 이렇대” 하면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말하는 장면을 꼭 넣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한국적 현실을 외국인들의 눈으로 보여주면 더 와닿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이게 주연배우가 나오는 장면도 아니고, 드라마 전개에 꼭 필요한 장면도 아니라 편집자나 제작자가 들어낼 수 있겠더라. 이걸 누구도 빼자는 소리를 하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엔딩 장면을 쓰기로 했다. 이 엔딩을 쓰려면 앞의 상황이 없으면 성립이 안 되니까 어떤 제작자라도 빼지 못하게 되는 거다. 장차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이런 영악한 계산도 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장면이었다. (웃음)

-<공동경비구역 JSA>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의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지금과는 다른 인생이 됐을 거다. 업계에서 인기가 있는 감독도 아니었으니 세 번째 영화를 못 만들 가능성이 컸고. 당연히 <복수는 나의 것>과 <박쥐> 같은 영화에 투자하려는 회사는 없었을 거다. 영영 기회가 안오는데 다른 길을 찾지 않았을까, 그런데 다른 길이 특별히 떠오르지도 않고.

-이후 바로 <복수는 나의 것>을 후속작으로 만들면서 박찬욱의 색깔을 공고히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흥행에서 고배를 마셨다.

=<복수는 나의 것>과 <박쥐>의 초안은 이미 명필름에 준 상태였고, <공동경비구역 JSA>가 분단 문제를 다루고 있으니 계급 문제를 다룬 <복수는 나의 것>을 먼저 하는 게 맞겠다 싶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워낙 크게 성과를 봤으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나, 그런 생각이 컸던 거다. 전작에서 대성공을 한 송강호씨가 있으니 본전은 할 줄 알았다. (웃음) 한편 할 때마다 생각해보면 그때마다 옳은 선택이었다기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지 싶다. <올드보이>(2003)를 하고나서 ‘복수 삼부작’을 하겠다고 했는데, 뭘 할까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뭔지 몰라도 여자가 주인공인 걸 해야겠다 했다. 그렇게 <친절한 금자씨>(2005)가 시작됐다. <올드보이>에서 미도(강혜정)가 진실에서 배제된 채 끝나고,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소피가 진실은 알게 되지만 이수혁(이병헌)이 자살을 하는 데 구실을 제공해주는 게 아닌가. 그런 면에서 여성 캐릭터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생각했다.

-차기작인 <아가씨> 촬영이 어느덧 후반부에 접어들었다.

=찍기 힘든 장면들은 거의 지나갔고 지금은 좀 수월해졌다. 그래서 요즘 재밌게 찍고 있다. 그런데 <스토커>(2013)에 이어서 <아가씨>까지 연달아 너무 우아한 세계를 다루다보니 다시 남자들이 많이 나오는 거친 영화를 하고 싶다. (웃음) 10월 말에 끝나니 촬영이 거의 막바지인데 <암살> 대성공의 혜택을 좀 보지 않을까. 하정우, 김민희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고, 신인 김태리는 내가 생각해도 정말 잘 캐스팅한 것 같다. 조진웅은 전에 없는 변태적인 모습으로 나오는데 정말 잘 어울린다. (웃음) 네 배우의 하모니를 보는 재미가 큰 영화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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