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한국영화 베스트5
올해의 한국영화 1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홍상수의 영화를 새롭게 느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매년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난감한 숙제를 사랑한다.” (김소희) ‘홍상수 영화’라고 명명할 때 당신의 뇌리에 떠오르는 어떤 형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감히 그의 영화들 앞에 반복이란 단어를 가져다놓을 순 없다. 홍상수의 가장 놀라운 점은 늘 같은 듯 완전히 다른 형태의 감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감독 본인에게 그렇듯 홍상수 영화는 관객에게도 이미 아는 것들과 다시 만나 기적처럼 새로운 경험을 하는 여행이다.” (김혜리) 익숙한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해나가는 건 우리가 일상의 시간을 쌓아가는 방식이다. 동시에 영화이기에 가능한 새로운 체험이기도 하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역시 “작고 미묘하며 사소하고 우연한 차이들의 배열만으로, 가능한 한 다른 세계들의 존재를 영화적으로 믿게 만드는” (박소미) 영화다. ‘영화적’이란 표현은 너무도 모호해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지만, 오직 관람을 통해서만 전파되는 그 체험은 영화적이란 말 이외에 다른 말로 포착되지 않는다. 반복과 도식 속에서 한끗 비틀어 새로운 풍경을 제시하는 건 홍상수 영화의 인장과도 같지만 이번에는 그 태도를 좀더 친절하게 영화에 녹여내 다시금 도약한다. “리드미컬한 반복과 재배열이 새것을 탄생시키다”(윤혜지), “일상 속에서 영화적 시간을 만들어낸다”(이현경), “최소한의 목적을 위해 많은 것을 비운 결과, 관객은 더 많은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이지현) 등 필자들의 상찬도 이 점에 집중하고 있다. 왜 매번 홍상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홍상수의 영화는 한번도 같았던 적이 없다. 반복되는 건 아주 미세한 변화에서 출발해 우리를 완전히 새로운 장소로 이끄는 신비한 체험뿐. 그러니까 홍상수는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이동진).
올해의 한국영화 2
<한여름의 판타지아>
느낌에 반하고, 연기에 빠지고, 태도에 매혹된다. 많은 필자들이 이 영화를 꼽았지만 선정의 변이 겹치는 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감상이 쏟아졌다. 장건재 감독은 “각본에 의지해서만은 나올 수 없는 말과 말 사이의 여백과 머뭇거림, 틈새에서 빚어지는 영화적 마술의 충만함”(조재휘)을 통해 “삶의 생동과 죽음의 정적을 맑고 애잔하게 담아냈다”(정지혜). “현장의 공기를 담아내는 멜로드라마는 오랜만”(김수)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 영화의 방법론 자체가 창작에 대한 고민과 모색의 플롯을 갖고 있고 작품 자체가 영화 만들기에 대한 겸허한 배움의 산물로 다가온다.”(이동진) 그리하여 영화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맑게 담아”(김소희)내고, “하나의 시공간이 완벽하게 다른 두 세계로 빚어지는 놀라운 기적”(김지미)을 선보인다. “분석하게 만들지만 가슴이 먼저 다가가는 영화”(이화정)는 그렇게 태어났다. 무엇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최근 한국영화를 지배하는 분노와 무력, 폭력과 죽음의 과잉된 이미지에 피로감을 느낄 때 도착한 드물게 담백하고 청량한 영화”(박소미)라는 점에서 올해의 발견, 신선한 바람이라 할 만하다. 이 맑고 선선한 바람을 마주한 사람들이 응당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올해의 한국영화 3
<베테랑>
때로 영화는 감독과 한몸이 되기도 한다. 올해 극장가를 점령한 <베테랑> 열풍을 두고 부당한 현실을 대리 해결하고 싶은 시대적 욕구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영화에는 한국 사회를 향한 예리한 풍자가 촘촘히 깔려 있다. 하지만 비슷한 주제의 영화를 만들 순 있어도 누구도 류승완 감독처럼 만들 순 없다. “거칠지만 주저하지 않는 류승완표 해석과 액션” (이화정) 은 다른 누가 흉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류승완 감독은 “액션을 위한 액션에 그치지 않고 시각적, 정서적으로 조율한”(김현수) 끝에, “재미있고 통쾌하지만 찝찝한 여운도 잊지 않고 남기는” (김지미) 영화를 완성해냈다. 류승완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장르를 내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 스타일로 장르를 해석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보자고 생각했”고, 보란 듯이 장르를 씹어 삼켜 류승완표 액션 쾌감으로 빚어냈다. <베테랑>의 성취는 “통쾌하고 깔끔하며 유려한 감각이 메시지나 카타르시스에 대한 강박보다는 전작들을 관통하는 스타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유의 작품들과 차이가 있으며, 그래서 수긍이 간다”(박소미). 액션의, 액션을 위한, 액션에 의한 에너지. 그렇게 “액션 키드 류승완이 액션 마스터가 되어 돌아왔다”(김성훈).
올해의 한국영화 4
<무뢰한>
“날것의 감각으로 충만한 이마무라 쇼헤이의 세계에 장 피에르 멜빌의 누아르적 인물들이 던져진다면 이런 영화가 나올까?”(조재휘) <무뢰한>은 요즘 영화 같지 않다. 영화가 강조하는 반복하는 비극적 정서들이 일견 투박하고 예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신인감독들에겐 없는 무언가가 분명 이 투박한 영화 안에 들어 있다”(우혜경). <무뢰한>은 “생의 가장 애처로운 순간들은 결국 말로는 힘들다는 걸, 기척도 없이 온다는 걸 공기로 전하는 작품”(정지혜)이다. “오승욱은 형사 누아르물의 외피를 두른 이 영화에서 ‘억압의 미적 제스처’라고 할 만한 것들을 허다하게 만들어낸다.”(김영진) 공식처럼 채워지는 잔혹한 액션을 비우고 그 자리에 어떤 정념과 정서를 빼곡하게 채워넣으려 하는데, 이 몸부림 자체가 진득하고 눅진한 공기가 되어 스크린 너머까지 퍼지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분위기와 정서로 승부하는 뚝심”(김수)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태도이자 그 시절 영화들을 그립게 만드는 소중한 미덕이다. “활자로는 기록될 수 없는 무드와 공기, 얼굴과 제스처가 흉터처럼 깊은 흔적을 남기는 영화”(박소미)는 평이했던 2015년 한국영화들 사이에서 깊은 흔적을 남겼다. “2015년 한국영화계에서 이런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작은 기적”(이동진)이다.
올해의 한국영화 5
<위로공단>
표현에는 경계가 없다. 모든 단단한 것들이 녹아내리는 게 최근 영화예술의 추세라고 한다면 <위로공단>은 그 성공적인 결실이라 할 만하다. 올해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은사자상을 받은 <위로공단>은 다큐와 극영화, 현대미술과 영화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또렷한 목소리를 낸다. 그렇다고 생소하거나 어렵진 않다. “실험적이지만 어렵지 않고, 상투적이면서 상투적이지 않은”(이주현) 것이 <위로공단>의 가장 어여쁜 점이다. 그야말로 낮은 자리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깊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사실적 인터뷰와 환상적 인터뷰. 증언하는 강명자씨의 표정과 어투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이동진)는 평가처럼 이 영화는 우리 바로 옆자리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생생한 육성을 들려준다. “영화 마디마다 삽입된 영상작업이 미학적 완성도를 위해 봉사하는 장치가 아니라 마주한 개인(의 역사)들을 존중하는 감독 자신의 제스처처럼 느껴”(박소미)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위로공단>은 형식적으로도 돋보이지만 그녀들의 힘 있는 증언을 똑바로 담아냈기에 여느 다큐멘터리보다 훨씬 깊게 가슴을 후벼판다. “감독이 한층 원숙해졌음”(김태훈)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인 만큼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 명단에 임흥순 감독이 빠질 일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