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로얄 테넌바움>과 웨스 앤더슨 [2]
2002-03-22
글 : 김혜리

어린아이의 눈, 어른의 손

<로얄 테넌바움>에서 일급 스타들의 앙상블을 지휘한 웨스 앤더슨 감독이지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서 동경해온 명코미디언 빌 머레이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에게 연기를 지시할 때마다 귓전에 속닥거렸다고 한다. 혹시 머레이에게 무안을 당해도 스탭들 앞에서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귀여운 궁리 끝에 나온 복안이었다. 이 일화에서 보듯 이제 3편을 헤아리는 웨스 앤더슨 영화를 양쪽에서 버티는 북엔드는 세상을 바라보는 사춘기적 경이로 상기된 소년의 눈과 원숙한 장인의 손끝이다. 유년과 성년의 ‘문턱’에 머물러 있는 감독의 정신을 변명이라도 하듯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서 아이들은 어른스럽고 어른들은 아이 같다. <로얄 테넌바움>에서 한팀으로 게임하는 아들에게 총을 쏘고, 양녀를 꼬박꼬박 “나의 입양한 딸”로 소개하는 아버지 진 해크먼은 기회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유치한 인물이다. 의젓한 손주들에게 사소한 규칙위반과 짓궂은 장난을 가르치는 일은 그의 큰 낙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이 여동생 피비를 만나는 대목을 곧장 연상시키는 <바틀 로켓>의 한 장면에서, 정신병원으로부터 퇴원한 루크 윌슨이 어디 갔었냐는 동생에게 “과로로 입원했다”고 말하자 똑똑한 동생은 바로 받아친다. “오빠는 평생 하루도 일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과로를 해?” 할말을 잃은 오빠는 탄식한다. “아, 너 어쩌다 그렇게 냉소적으로 됐니?”

그러나 미숙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소년기의 비전을 스크린에 옮기는 웨스 앤더슨의 태도와 솜씨는 투철하고 치밀하기 그지없다. E.L. 코닉스버그의 동화 <클로디아의 비밀>에 나오는 가출 에피소드부터 J.D. 샐린저의 <프래니와 주이>(Franny and Zooey)의 가족 묘사까지 세련되게 인용한 <로얄 테넌바움>에 이르면, 웨스 앤더슨 감독의 머릿속이 혹시 듀이십진분류표가 붙은 서가로 구획지워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마저 든다. 한편 원경에 스쳐가는 인물들의 의상까지 통제하고 심지어 특정한 고딕체를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글씨에 적용하는 앤더슨의 지독한 미장센은 앙리 루소의 그림 또는 책거리(冊架圖)를 떠올리게 한다. 언젠가 앤더슨의 방을 방문한 제임스 칸은 “일생 그렇게 많은 물건을 한꺼번에 본 적이 없었다. 앤더슨의 집에 가려면 탐조등이 필요하다.”고 혀를 찼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이같은 태생적 불균형은 “어른들의 서재를 기웃대는 어린이의 독서가 낳을 법한 영화”라는 탐탁지 않은 평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컨트롤 강박증은, 과장이나 왜곡을 싫어하고 병적으로 예민한 손을 가진 젊은이가 어지러운 세상사를 정갈한 액자에 가두고 싶어하는 당연한 욕구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빌 머레이는 웨스 앤더슨-오언 윌슨 콤비가 제시한 영화의 밑그림에 대해 “뭘 어떻게 찍고 싶어하는지 완벽하게 명쾌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과연 앤더슨의 손에서 가로가 널찍한 와이드 스크린 화면은 단 1제곱센티도 낭비되는 법이 없다. 90도로 굽어보는 앵글로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정물을 말끄러미 주시하고, 인물을 정중앙에 놓고 같은 초점거리를 유지하면서 롱숏에서 클로즈업으로, 다시 반대로 밀었다 당기기를 즐기는 그의 카메라는 앤더슨 영화의 주역인 사랑스런 괴짜들이 바라보는 세계상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한다.

우정에 관하여

하이퍼 리얼리즘에 입각해 그린 정밀한 회화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돌연 상상화처럼 보이듯 한땀 한땀 이어붙인 퀼트 같은 웨스 앤더슨의 영화도 등신대의 현실을 재현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분명히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 나오는 구식 벤틀리 자동차나 <로얄 테넌바움>의 70년대식 액세서리가 보여주는 시대착오는 영화에 묘한 환상성을 불어넣는다. 공중전화 부스와 집시 택시, 고고학 발굴 현장이 공존하는 <로얄 테넌바움>의 뉴욕은 현존하는 그곳이 아니라 텍사스에서 나고 자란 웨스 앤더슨이 그림과 소설, 영화를 통해 상상해온 ‘아무 데도 없는’ 도시다.

웨스 앤더슨 감독이 이처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현실을 흉내내는 판타지를 필요로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영화를 통해 무엇을 비밀히 꿈꾸는 것일까. <바틀 로켓>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로얄 테넌바움>의 단서가 가리키는 답은 가족애도 로맨틱한 감정도 아닌 우정에 가깝다. 앤더슨 영화 속에서 위협받고 파괴되고 다시 복구되는 드라마틱한 여정을 반복하는 것은, 길 위에서 만난 인간들 사이의 우정과 파트너십이다. <바틀 로켓>의 주인공 앤소니는 그릇된 낭비임을 알면서도 극단까지 가고자 하는 친구 디그넌을 위해 우매한 강도짓을 거들고,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사업가 블룸은 생의 내리막길 중턱에서 마주친, 상승욕구로 가득 찬 소년 맥스에게 진한 동료애를 느낀다. 두 영화의 인물들이 끝없이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대체가족이다. 명실상부한 '가족드라마' <로얄 테넌바움>에서도 웨스 앤더슨은 테넌바움 식구들을 각각의 층에 분리 수용한다. 가구도 성격도 섞이지 않는 이들 사이에 엉키는 끈적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영화 말미에 테넌바움 가족이 회복하는 것은 혈육애가 아니라 공존의 법칙,말하자면 일종의 우정이다. 가족영화의 어느 걸작보다 찰리 브라운과 친구들, 스누피가 어울려 살아가는 <피넛츠> 만화에서 <로얄 테넌바움>과 가장 근접한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웨스 앤더슨 영화는 X세대의 방향감각 상실, 역기능을 일으킨 가족관계가 낳은 노이로제 등 리처드 링클레이터, 케빈 스미스, 토드 솔론즈, 에드워드 번즈 등 1990년대 선댄스영화제가 배출한 젊은 인디감독들과 테마를 공유하면서도 기질적으로 1990년대 독립영화계의 스타들보다 코언 형제의 <애리조나 유괴사건>, 조너선 뎀의 <섬씽 와일드>처럼 유머와 괴이함과 통찰력을 겸비한 1980년대 후반 인디영화계의 ‘이상한’ 영화들과 닮았다는 인상을 준다. 첫째로 앤더슨의 영화는 1990년대 중반을 풍미한 ‘슬랙커영화’ 계보에 잇대기에는 너무 야심만만하고 의욕적인 낙오자들을 다룬다. 운동장에 수족관을 짓고 냉동 창고를 터는 앤더슨의 주인공들은 선명한 목표를 향해 돌진하거나 돌진했던 기억을 갖고 있으며 문전박대를 당하면 가만있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야망을 갖고 있으며, 그 꿈이 그저 부자되는 게 아닌 사람들을 실제로도 좋아한다”는 것이 앤더슨 감독의 고백.

또한 앤더슨의 영화는 평론가 마크 올센이 지적했듯이 주로 영화광적인 인용구를 빌려 삶에 코멘트를 던지고 결과적으로 인물과 관객에 대한 우월감을 숨기지 못하는 그렉 아라키나 할 하틀리의 영화에 비해 따뜻하고 친밀하다. 그가 묘사하는 197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의 생 감각은 권태나 분노보다 멜랑콜리에 가깝다. <라스트 픽처 쇼> <페이퍼 문> 등 중요한 청년영화를 남긴 피터 보그다노비치 감독의 평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영화는 더럽거나 외설적이지 않으면서도 솔직하다. 섹시해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나는 그 점을 매우 고무적인 징후라고 본다.”

웨스 앤더슨은 캘리포니아로 이사한 지금도 대학 시절 룸메이트였던 윌슨 형제들과 여전히 같이 살며 그들의 농담과 추억담을 소재로 영화를 쓰고 그들의 연기로 영화를 찍는다. “아직도 같이 산다는 건 정말 미숙함의 징후다. 빨리 각자의 집을 찾아야 한다”는 오언 윌슨의 말대로 그들은 머지않은 미래에 각자의 이삿짐을 쌀 것이다. 그러나 영광이나 성공의 순간과 거리가 먼 인생의 한때를 느린 화면으로 하염없이 보여주는 앤더슨 영화 세편의 라스트신은 조금 더 이 자리에 머물고 싶어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말없는 바램을 들려주는 듯하다. 네모난 화면을 쪼개고 또 쪼개어 공간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빈틈없이 채워넣었듯이 그는 생의 시간마저 연장하고 싶은 것이다.

사진제공 브에나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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