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과학으로 미래를 상상하기
2016-03-22
글 : 윤혜지
<엑스 마키나> 알렉스 갈랜드
<엑스 마키나>

도발적인 마이웨이의 끝은 어디인가. <엑스 마키나>까지 보고 나니 ‘대니 보일과의 협업은 연출의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다만 마이웨이를 걷는 만큼 대중성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편. 원작이 있는 영화보다 원작 없이 만든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훨씬 흥미롭다. 엔딩에 이르러 담담하게 내지르는 한방이 회심의 무기.

영화 <절멸>(Annihilation, 2017) 연출•각본 <엑스 마키나>(2015) 연출•각본 <저지 드레드>(2012) <네버 렛 미 고>(2010) <선샤인>(2007) <테저렉>(2003) <28일후…>(2002) <비치>(2000)

TV시리즈 <배트맨: 블랙 앤드 화이트>(2009)

게임 <인슬레이브드: 오디세이 투 더 웨스트>(2010)

작가는 스스로 태어나는 존재일까, 환경에 의해 키워지는 존재일까. 알렉스 갈랜드의 작가적 기질과 취향은 이미 유전자에서부터 기록됐는지 모른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 <텔레그래프> <인디펜던트>에 정치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였고 어머니는 정신분석학자였다. 196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생물학자 피터 메더워를 외조부로 두었고 외조모는 작가였다. 아마도 그는 종종 지적인 대화가 오가는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며,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호기심과 탐구심은 자연스레 그가 과학과 인간성의 연관에 대해 질문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맨체스터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알렉스 갈랜드는 기자가 되는 것도 잠시 고민했지만 소설가로 먼저 데뷔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아시아 대륙 배낭여행을 즐기곤 했는데 그 여행의 기억들은 이후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마닐라 여행은 <비치> 집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6년에 출간한 첫 소설 <비치>는 환각과 광기에 물든 유토피아를 독특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평단으로부터 “X세대를 위한 <파리대왕>”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영화화까지 진행되었으나 영화 <비치>는 제대로 통제되지 못한 프로덕션 과정, 흥행 실패, 환경파괴 논란 등에 휩싸여 모두의 기억에 악몽으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대니 보일과의 연은 이후로도 계속돼 둘은 <선샤인>과 <28일후…>까지 세 작품을 함께했다. 알렉스 갈랜드의 두 번째 소설 <테저렉>은 <비치>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이국적 정서와 영적 모험에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겉멋만 든 작품 정도로 평가절하됐다. 다만 <테저렉>에서 시도한 비선형적 스토리텔링은 그의 이후 작업 스타일에도 상당한 참고가 된 것 같다.

“예술가들이 직관적인 방식으로 탐구 주제와 일 사이를 유영하는 데 반해 과학자들의 세계는 융통성 없고 창의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경험적으로 나는 훌륭한 과학자들이 웬만한 예술가보다도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그들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데에 있어서도 말이다.” 알렉스 갈랜드는 이십대 초반을 지나면서부터 과학에 깊은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주제의식이 개인의 삶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의 사상을 증명 혹은 전달하는 주요한 장치로 과학이 활용됐다.

이시구로 가즈오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바탕으로 쓰인 <네버 렛 미 고>는 클론의 한계와 슬픈 운명에 관해 말하는 서정적인 SF 멜로드라마였는데 어떤 식으로든 <엑스 마키나>에 영향을 미쳤음이 틀림없다. 알렉스 갈랜드가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엑스 마키나>는 클론이 자신의 한계와 운명을 극복한다는 요지의, 신선한 접근방식이 돋보이는 SF다. 인간과 클론을 구분짓는 기준은 무엇인가, 클론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 진화 가능한가 등 기존의 하드SF 장르에서 줄곧 제기되었던 이슈를 알렉스 갈랜드는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풀어간다. 서사는 작가의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어가고, 과욕을 부리지 않아 이야기는 깔끔하고 간결하게 마무리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덤덤한 엔딩 덕에 <엑스 마키나>는 외려 파괴적인 영화가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각본을 쓴 많은 작품에서 알렉스 갈랜드가 인간의 종말 또는 종말 위기에 맞닿은인간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선샤인>의 인물들은 사위어가는 태양에 도로 불을 붙이기 위해 무려 ‘이카루스’라는 이름의 우주선을 타고 핵미사일을 운반한다. <28일후…>에서 인류와 문명에 거대한 위기를 몰고 오는 바이러스와 폐허가 된 도시의 심판자를 그리는 <저지 드레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딱히 구원에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과학이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대신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차기작으로 거론되는 영화의 제목은 <절멸>(Annihilation)로, 법이 허락하지 않은 신비의 영역에까지 가보려는 생물학자의 고투를 그린다고 한다. 알렉스 갈랜드의 또 한 차례의 실험은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것인가.

명대사

<엑스 마키나>엔 중요한 변곡점이 있다. 일곱 차례의 테스트를 거치는 중간, 칼렙(돔놀 글리슨)이 인공지능(A.I.)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에게 진심으로 흔들리자 에이바를 만든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은 칼렙에게 테스트의 취지를 상기시킨다.

“진화된 인공지능의 등장은 수십년 전부터 예고된 일이었어. 문제는 그게 언제인가야. 에이바는 창조된 게 아니라 진화된 거야. (…) 에이바가 가엾나? 자네 걱정이나 해. 곧 인간은 저들에게 아프리카 화석처럼 기억될 거야. 원시적인 언어와 도구를 쓰며 먼지 속에 사는 직립보행 유인원 말이지. 멸종을 눈앞에 둔 존재로 말야.”

신과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네이든의 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너무나 인간다운 인간 칼렙은 무력하게 버려지고, 에이바는 자신만의 창세기를 여는 데 성공한다. 작가 알렉스 갈랜드가 과학의 어떤 모습에 매혹되었는지도 어렴풋이 짐작된다.

게임 시나리오에도 강점이

과학에 흥미를 둔 작가가 게임으로 손을 뻗어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알렉스 갈랜드는 게임사 닌자 시어리(Ninja Theory)의 CEO 타밈 안토니아데스와 함께 콘솔게임 <인슬레이브드: 오디세이 투 더 웨스트>의 각본도 썼다. <서유기>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역시 과학기술의 일부가 활용된 이 게임 시나리오는 2011 영국작가조합어워드에서 베스트 컨티뉴잉 드라마상도 수상했다. 그 뒤 알렉스 갈랜드는 <DmC: 데빌 메이 크라이>의 스토리 슈퍼바이저로도 일했고, 상당 금액의 개발비와 함께 엑스박스의 킬러 콘텐츠 <헤일로>의 영화화도 손에 쥐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전 회장까지 “‘스토리 예술’로서의 비디오게임 분야에서도 <헤일로>는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고 말했을 만큼 <헤일로>는 중대한 프로젝트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영화화는 엎어졌지만 <헤일로>의 팬들은 여전히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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