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코미디, 액션, 스릴러를 자유롭게
2016-03-22
글 : 송경원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 크리스 테리오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

크리스 테리오는 불협화음을 하나로 모으는 지휘자다. 서로 다른 톤과 캐릭터를 어떻게 쳐내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절묘한 균형점을 잡아나가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인다. 코미디, 액션, 스릴러를 자유자재 넘나드는 안정감도 큰 강점이다.

영화 <저스티스 리그 파트2>(2019) <저스티스 리그 파트1>(2017)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2016) <아르고>(2012) <하이츠>(2005) 연출•각본 <북 오브 킹>(단편, 2002) 연출•각본

담배를 벗 삼아 밤새 타자기와 씨름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다. 확고한 작품 세계가 있어 스튜디오와 매번 다투고 자신의 원고를 지켜낸다. 물론 그런 작가도 있을 수 있다. 다만 메이저 스튜디오와 함께하는 시나리오작가는 아니다. <아르고>로 제85회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크리스 테리오는 시나리오작가를 정교한 기능공에 자주 비유해왔다. “프로젝트를 넘겨받는 순간부터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글링이 시작됩니다. 큰 강줄기 하나를 두고 방향이 다른 각각의 물줄기가 이곳저곳에서 밀려들죠. 두 시간 동안 관객이 한눈팔지 않게 하면서, 파이프의 누수를 막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목소리들을 하나의 톤으로 정리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의무이자 가장 큰 도전 과제입니다.”

완성된 시나리오를 파는 작가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의뢰를 받아 작업을 시작하는 작가는 다르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한 덕목은 자신의 색깔을 자랑하는 대신 다른 색을 녹여낼 수 있는 캔버스를 준비하는 자세다. 각색의 경우 시나리오작가 업무의 대부분은 서로 다른 요구사항을 ‘말이 되게’ 연결하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건축에서 뼈대를 세우는 설계 작업이라기보다는 섬세한 미장쪽에 가까워요. 투자자, 원작자, 감독, 스튜디오 각자 자신이 원하는 재료들을 들고 오죠. 황당무계한 요구사항들도 있습니다. 그걸 다듬고, 고르고, 펴발라 감독의 목소리 안에 녹이는 게 일의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할리우드에서 시나리오작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게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 테리오에게 벤 애플랙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왜 대단한 필름메이커들이 늘 같은 스탭과 일하려고 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어요. 이전에 스크린 라이팅은 고독하고 긴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다. 벤과의 작업을 통해 서로 솔직해지는 법을 배웠고 협업이 덜 외롭고 창의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크리스 테리오는 뉴욕 인디영화계에서 나고 자란 영화인이다.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원까지 마친 엘리트지만 독립영화판에 있을 땐 배고픈 시절이 꽤 길었다. 그는 <하이츠>의 감독으로 선댄스에서 이름을 알리고 TV시리즈 <데미지>의 에피소드도 연출한 후에야 <아르고>를 통해 벤 애플렉과 만나며 그 재능을 본격적으로 메이저 무대에 펼쳐 보였다. 10년간의 무명 시절 동안 거의 무보수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며 각본 및 연출에 매진했던 테리오는 당시의 경험이 균형을 맞추는 감각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아르고>를 처음 받았을 땐 실화를 바탕으로 골격이 갖춰진 선물 같았죠. 하지만 이내 수많은 불안요소가 잠재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서로 다른 힘들이 나를 속박하는 숨 막히는 상황은 벤이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됐죠. 다만 스스로 끝까지 잘 정돈할 수 있을 거란 확신만큼은 놓은 적이 없습니다. 다들 작가가 전체를 그리는 마법의 지도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것도 없다는 걸 들켜서는 안 돼요.”

벤 애플렉과의 인연은 결국 개봉을 앞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의 각본, 2017년 11월17일 개봉예정인 <저스티스 리그 파트1>의 각본 집필까지 이어졌다. 조각조각 나 있는 저스티스 리그의 영웅들을 한데 모으라는 특명을 떠안은 건 <아르고>를 통해 증명한 조율의 기술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하나의 세계에 녹여내는 건 세부적인 파트를 담당하는 기술자의 기교를 넘어 전체 로드맵을 그리는 영역에 있다. 그리고 각본가로서 현재 크리스 테리오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이 점에서 감독, 기획자, 그리고 무엇보다 팬들에게 신뢰를 선사한다는 거다. <아르고>에서 코미디, 스릴러, 정치적 이슈까지 유연하게 녹여냈던 솜씨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발휘될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확신으로 이어질지는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 리그의 시작>의 개봉과 함께 알게 될 것이다.

명대사

“이게 최선인가.” “우리가 가진 최악의 방법 중에서 이게 최선입니다.”

<아르고>는 1979년 테헤란 미 대사관 직원 구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CIA 구출전문요원 토니 멘데스(벤 애플렉)는 <아르고>라는 가짜 영화를 제작한다는 명목으로 테헤란에 위장 잠입한다. 크리스 테리오는 작가의 일도 이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Best Bad Idea’를 꼽아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작가가 되기로 결정한 일이 아닐까. 스튜디오영화라는 큰 캔버스를 이용해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이들, 폴 그린그래스나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감독을 존경한다. 하지만 나는 뉴욕 인디필름 신에서 왔기 때문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늘 두렵다. 나의 심장은 늘 독립영화에 있다.” 어쩌면 프랜차이즈의 총아인 ‘저스티스 리그’를 맡게 된 건 일말의 회의적인 태도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시도와 실수

<아르고>는 극과 현실, 날카로운 비판과 농담의 밸런스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영화다. 크리스 테리오가 중점을 둔 것도 균형점을 잡는 일이었다. 그가 제시하는 시나리오 작법은 실로 단순하다. 끊임없이 감독과 소통하며 그게 이뤄질 때까지 시도하는 것이다. “실화를 드라마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두 가지, 시도와 실수다. 어떤 작가라도 항상 바른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순 없다. <아르고>를 각색할 때 내 앞에 놓여 있었던 건 볼륨을 키울 만한 몇 가지 사건에 대한 요약과 클라이맥스로 내정된 장면 정도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영화의 근본정신이다. 그걸 언어로 바꿔 확인시키는 작업이 작가의 일이다. 남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걸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어쨌든 계속 시도하고, 실수를 통해 배우는 과정의 연속 끝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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