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퀴어영화와 성 역할로 바라본 <아가씨>
2016-06-15
글 : 이예지
<아가씨>

케이퍼물의 형식을 취하는 <아가씨>는 남근 중심적 세계에 지배되는 듯 보이지만 곧 그 법칙에서 전력으로 탈주하는 영화다. 익숙한 문법을 제시한 후, 장르적 트릭인 양 시치미를 떼며 변칙적으로 그 세계를 전복하는 것이다. 뒤집어진 세계에서 등장한 것은? 이런저런 말로 에둘러 가릴 수 없는 레즈비언이다. 그간 한국영화에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를 비롯해 <창피해>(2010), <도희야>(2014) 등에서 레즈비언이 등장했지만 극소수에 그쳤고 이는 남성 퀴어영화에 비해서도 척박한 불모의 수준이었다. 그러니 <아가씨>는 등장만으로도 얼마나 반갑고 기꺼운 영화인가. 한국에서 여성 퀴어영화를 대중적 화법으로 풀어낸 첫 주자가 박찬욱 감독이라는 것은 여성 주체에 보여온 그의 일관된 관심을 상기해보면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다. <친절한 금자씨>(2005)의 금자(이영애), <스토커>(2013)의 인디아(미아 바시코프스카)가 적대자 혹은 혈족의 위치에 있던 남성을 파괴하고 단독자로서 세계 밖으로 발돋움했다면, <아가씨>에서는 두 여성이 서로의 존재를 응시하고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남근 중심적 세계에서 서로를 구한다. <박쥐>(2009)에서 사랑은 인물들을 죽음 충동과 파멸로 몰고 갔지만 <아가씨>의 사랑은 다르다. 탐해지던 대상이 탐하는 주체가 되어 서로를 탐하는 탐미의 무한순환 속, 주체를 탈환한 두 여성의 사랑은 곧 구원의 몸짓이 된다.

<아가씨>의 두 구원자는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라는 여성 주체다. ‘여자의 적은 여자’ 같은 피곤한 관용어구처럼, 고전적 레퍼토리에서 복수의 여성 주체는 동시에 양립할 수 없으며 두명의 여성이 존재한다면 둘 중 하나는 다른 하나로 치환되거나 대체되어야 했다. 판단의 주체가 남성임은 물론이다. <아가씨>도 그런 운명에 처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게임의 법칙상 히데코와 숙희 두 여성 중 단 한명만 존재할 수 있다. 한명이 자유로운 신분이 되려면 한명은 정신병원에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핑거스미스> 속 석스비 부인의 역할을 대폭 축소하며 모든 권한을 백작(하정우)의 손에 쥐어주고, 대비 구도는 선명해진다. 우리는 이 게임을 백작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것으로 오인하지만, 2장 후반부터는 이면의 진실이 드러난다. 언제나 선택당하는 존재였던, 내가 존립하려면 타자를 밀어내야만 했던 운명을 지닌 동족인 여성들이 손을 맞잡은 것이다. 서로에게 “내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가 된 이들은 함께 선다. 히데코가 숙희의 자리 대신 차지하는 것은 게임의 지배자였던 백작, 어리석은 남성의 자리다. 단순하지만 얼마나 짜릿한 변주인가. 바뀌어야 했던 운명은 함께하는 운명이 됐다. 두 여성의 운명을 바꾼 건 연민할 줄 아는 능력, 연대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매혹과 성애가 빚어낸 사랑이다.

박찬욱 감독은 동등한 두 주체간의 대칭을 구현하기 위해 강박에 가까운 노력을 기울인다. 첫 베드신에서 히데코와 숙희는 여성들만이 할 수 있는 시저링 체위를 거의 판타지에 준하는 완벽한 자세로 해낸다. 그들은 서로를 탐하기 위해 백작이라는 대상을 전제하지만, 그것은 가상의 성적 대상을 지칭하는 임의적 기표에 불과하다. 이들은 백작, 즉 남성기 없이도 쾌락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남근은 최종적으로 제거된다. 선실 베드신에서 이들은 나란히 서로를 마주 본 데칼코마니 같은 양식적인 섹스를 선보이며 속박의 상징이던 구슬을 주체적 쾌락의 도구로 이용한다. 환한 조명과 정면 구도의 풀숏으로 조형미를 강조한 이 신은 정직하고 명확하다. 양 주체 사이에서 대칭을 이루는 건 섹스의 체위뿐 아니다. 영화는 그들의 관계에서 이성애적 관점의 성 역할의 구분을 지워낸다. 담장을 넘을 때는 숙희가 히데코를 끌어올려주지만, 남장을 한 히데코는 숙희의 신발끈을 고쳐 매준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계급, 성 역할이 사라진 온전히 동질적인 항들이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은 대칭 관계로 서로를 구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항은 영원히 회귀하는 탐함과 탐해짐, 구원함과 구원받음, 능동과 피동이 온전히 일치하는 정경을 보여준다. 이것이 <아가씨>라는 케이퍼무비의 외피를 두른 퀴어영화가 지향하는 지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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