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페미니즘 리부트’를 말하다 - 손희정 문화평론가, 정은영 미술작가,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2016-06-27
글 : 송경원
사진 : 최성열
손희정, 조혜영, 정은영(왼쪽부터).

손희정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여/성이론> <문화과학> 편집위원이자 땡땡책협동조합 조합원이다.

정은영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작가이다. 오랫동안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으며, 현대미술의 장에서 여성주의적 언어 생산을 언제나 고민하고 있다.

조혜영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현재 디지털 이미지와 페미니즘을 교차하는 이론에 대해 고민 중이다.

마치 지금 처음 접하는 개념인 양 갑자기 모두가 페미니즘을 말하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늘어난 관련 강좌나 매일 반복되는 언론의 기사들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 욕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들 페미니즘을 말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필요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체감한다.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왜 지금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를 되짚어보고자 3인의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 정은영 미술작가,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모여 페미니즘을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이야기를 나눴다.

-<씨네21>_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지금,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는 느낌이 어떤지 묻고 싶다.

=조혜영_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런데 특정한 사건이 벌어지면, 마치 언론이 난생 처음 듣는 단어를 대하는 것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질문을 시작한다는 게, 현재 미디어가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시선이라 생각한다. 사실 조금만 찾아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내용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는 무지하니 지금부터라도 알려달라는 태도, 달리 말하자면 무지해도 괜찮다는 태도에서 페미니즘을 대하는 저널의 욕망, 또는 대중의 욕망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다.

정은영_그간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 채워진 단어이다 보니 서로 눈치 보기를 하는 분위기도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분위기는 확실히 바뀐 것 같다. 10년 전엔 대학 강의에서 페미니즘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남학생들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페미니즘에 대해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자주 하곤 한다. 남학생들의 적극적인 요청도 꽤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근 10년간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대중적으로 활발했다고 보긴 어렵다.

조혜영_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하나도 없다가 지금 갑자기 터져나온 건 아니다. 그런데도 꾸준하게 이어져온 활동은 아예 없던 것으로 하고 갑자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분위기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모두가 아주 원론적인 개념부터 알려달라고 요청할 때 보면 내가 말 걸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가 혼란스럽다.

손희정_대중적인 인식에 있어서 소통이 원활하지 않던 지점들이 몇 가지 이슈를 중심으로 폭발한 건 분명해 보인다. 2005년 이후 페미니즘이 대중적인 이슈 한가운데 들어가지 못한 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거다. 전반적인 사회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데 대표적으로 IMF를 겪으면서 다른 어젠다들이 전면에 부각되며 관심에서 밀려난 경향이 없지 않다. 대학교만 해도 학부제로 바뀌고 학생회 자치가 무너지는 등 대학의 신자유주의화와 함께 토론과 고민을 나눌 집단이 사라져버린 시기가 10년가량 지속된 것 같다.

정은영_ 90년대 중반만 해도 모든 대학가에 캠퍼스 페미니즘이라 부를 만한 움직임들이 있었다. 1994년 이화여대 대동제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난입했던 사건 이후로 성차별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의 장이 마련됐다. 문제의식을 가진 학생들이 모여 토론회를 열었고 각 대학 총여학생회나 여성위원회를 유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만 해도 학내에서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운동들이 일어나는 걸 체험하고 학교를 다닌 세대다. 그런데 10여년 전 강의를 다니기 시작할 때, 한 대학 총여학생회에서 하는 행사를 보니 네일아트하기, 남친과 케이크 만들기 같은 대중사업에 매진하고 있더라.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평등한 관계나 사안에 대해 문제 삼기보다는 무관심이 일상화되어왔다.

SNS, 특히 트위터는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보여줬다

-<씨네21>_2000년대 중반부터 근 10년간 페미니즘 이슈가 대중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져간 건 사실이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조혜영_정확히 ‘이것이 원인이다’라고 몇 가지로 단언하는 건 더 위험하다고 본다. 조금 둘러서 시네 페미니즘의 쇠퇴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한국영화계에서 어느 순간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과 주목이 사라진 건 더이상 새롭게 할 말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대안적인 영화, 새로운 영화들이 나와주어야 비평가의 발언도 의미가 있는데 제작과 비평의 밸런스가 맞지 않은 것 같다. 김기덕 영화에 대한 논의나 여성주인공의 실종은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한 상황에서 반복적인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은 하는 이도 듣는 이도 지겨울 따름이다. 그런 맥락에서 일정 정도 방치해뒀던 것이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는 사이 상업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부재나 심각할 만큼 불균형한 성비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본다. 지금이야말로 젠더의 관점에서 정책적인 개입과 대안이 필요한 때다.

손희정_여성들이 사회에서 점차 힘을 가지게 되었다는 환상이 생기는 시점이 있었다. 하지만 학교만 벗어나도 당장 벽에 부딪히는 게 현실이다. 사회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화되고 각자도생이 생존양식이 되면서 스펙 쌓기에 열을 올려야 하는 등 경쟁에 내몰리는 상황이 왔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 같은 삶의 다른 가치에 관심을 둘 수 있는 조건이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여성들의 경제적, 물리적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로 다가오자 최근 2, 3년 사이 이런 위기를 가속화하는 여성 혐오의 문제에 관심이 높아지고, 다시 페미니즘의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경제적 불안과 공포가 인터넷이라는 미디어 환경과 만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온라인 소수자 혐오’로 드러나고 있고, 이런 시점에서 여성의 인권이 새삼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 여성의 약자로서의 생존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물리적인 압박이 가시화되니 실존적인 위협의 문제로 다가오는 거다.

정은영_사실 약간 얄미울 때도 있다. 지금 여성에 대한 위협을 절박한 문제로 인식하는 건 한편으론 중산층의 어떤 것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중산층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겠다. 강남역 여대생 살인사건에 사람들이 이토록 격렬하게 반응하는 건 그 일을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문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도 당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인 셈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강남역 여대생만큼 참혹하게 방치되고 보호받지 못한 여성들은 늘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예를 들어 2014년 조선족 여성들이 흉기에 찔려 사망했을 때 우리가 그에 대해 이렇게 불안해하고 무분별한 폭력에 대해 분노했었나. 결국 나와 동일시할 수 있는 존재에게까지 위협이 왔다는 게 핵심이고, 여성 혐오에 대한 최근 이슈들은 중산층의 붕괴와도 무관하지 않다.

조혜영_김수빈 감독의 <소꿉놀이>(2014)를 보면 집에서 충분히 지원을 받고 학교에서도 큰 차별을 느끼지 못한 20대 여성들이 나온다. 당당하게 나는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자랐다고 말하는 세대다. 그녀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여전히 마주할 부조리, 불평등과 좌절에 대해 분노가 생길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시스템이 만들어져왔다고 믿었는데 사실 크게 바뀐 게 없는 현실을 마주할 때의 좌절감이 있다. 지금까지 그런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 무력감, 혹은 불안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예를 들어 ‘일간베스트’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쏟지 않나. 참다 못한 여성들이 이제 나름의 방식으로 연대하고 스스로의 입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거다.

정은영_그런 점에서 SNS, 특히 트위터는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보여줬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는 종전에는 보지 못한 방식의 선언이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명명의 방식이 달라지는 거라고 할 수도 있다.

조혜영_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공동체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 같다. 각자가 왜 자신이 페미니스트인지를 구술함으로써,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얼마나 다양화하고 중층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또한 미래를 향한 선언적인 말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다. 선언을 한 다음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거다. 의미를 가두고 축소하는 대신 역동적인 상태로의 확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씨네21>_현재 나오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도리어 초기 단계로 돌아간 것 같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으론 인문학처럼 일종의 유행으로 소비되는 게 아닌가 싶은 우려도 있는데.

=손희정_그동안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의미로 텅 빈 기표에 가까웠다. 주류 사회가 원치 않는 가치는 페미니즘이란 그릇에 넣어 그냥 비판하는 거다. ‘무뇌아적 페미니스트’라는 칼럼에서처럼, 페미니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게 페미니즘은 누군가에겐 혐오와 위협의 대상으로 치환되기도 했다. 강의를 하다보면 여자들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위협을 느끼거나 위축된다는 남성의 하소연을 들을 때가 있다. 거꾸로 돌려말하면 대다수의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그런 불균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여성들은 그런 상황에 늘 억눌려 적응해온 셈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다양한 가치가 경합하는 풍부한 의미를 가진 이론적 실천이자 현실적 운동이다. 강남역 추모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저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의 목소리가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정은영_어떤 측면에서 페미니즘은 결코 정의내릴 수 없는 어떤 태도가 아닐까 한다. 현재는 공공의 목소리로 메아리 쳐 스며들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개인의 이야기에 멈춰 있기도 하다. 사실 창작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페미니스트라는 수사가 좋다고 하긴 어렵다. 유독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선입견이 많기 때문에 이를 호명하는 순간 일종의 낙인이 되어버린다. 예컨대 어떤 흐름을 가지고 남성성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표현했을 때 이를 페미니즘의 지평을 넓힌 시도로 봐주는 게 아니라 그게 무슨 페미니즘이냐고 반문하게 되는 식이다. 스스로 용어에 대한 엄밀한 개념화 없이 그저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구분의 언어로 사용할 때 페미니즘은 역동성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의 움직임은 계기가 무엇이 되었건 고무적인 게 사실이다.

조혜영_손희정 선생님이 최근 언급한 ‘페미니즘 리부트’가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지금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분명 상품적인 측면이 있다. 스타일화되는 페미니즘이랄까, 여기에 동조하지 않으면 왠지 멋지지 않은 것 같은 트렌드적인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의 지속과 확장을 위해 필요한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틀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 조건이나 체계가 바뀌었으면 당연히 리부트가 필요하다. 다만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곤란하다. 현재 쏟아져 나오는 집단적인 목소리들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욕망과 그동안의 울분, 분노가 동력이다. 여기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이를 동력 삼아 대중적인 층위와 소통의 접점을 늘려가는 건 마땅히 필요한 움직임이다.

정은영_물론 우려도 있다. 한편으로는 비극에 대한 반응이니 다시 희생자의 위치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된다. 요즘 학생들에게 부쩍 ‘시선 강간’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스스로를 희생자의 위치, 그러니까 취약한 존재에 머물게 하는 부작용도 있다. 초기 페미니즘이 그토록 저항했던 문제다. 하지만 그동안 여성들이 긴 투쟁의 역사를 통해 획득한 지위, 내적으로 축적한 힘들이 분명 있다. 단순하게 여성을 약자의 위치로 쉽게 가져다놓는 순간 그간의 역사를 지워버리는 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다.

“계급이냐 젠더냐” 선택하라는 것이 문제

-<씨네21>_강남역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충격적인 이슈들 때문에 확실히 여성 혐오라는 말이 강력한 키워드로 부상했다. 페미니즘은 이를 설명하기 위한 보조 개념처럼 사용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손희정_논의를 단순화하는 면이 없지 않지만 ‘여성 혐오’라는 단어는 현 상황을 적절하게 명명하는 단어라고 본다. 요즘 부쩍 페미니즘이란 일종의 잠재적인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현상이 나선형으로 돌고 도는 것 같은 기분이다. 흐름은 늘 존재해왔고 단절된 적이 없다. 다만 지난 10년처럼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는 있다. 페미니즘이 투쟁하고 성취해온 것들이 일시적인 조류에 밀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해도 결국에 현실적인 문제를 마주할 때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로 기록하는 과정이 중요한 거라고 본다. 최근 일련의 이슈들을 바탕으로 역동적으로 범주를 확장하고 연대를 이어나갈 수 있는 상태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물들어왔을 때 노 젓는다고, 신자유주의적인 삶의 조건 아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분노의 동력이 확보되었을 때 인식의 지반을 단단히 다져놓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조혜영_일정 부분 동의한다. 분노는 필요하다. 다만 장기적으로 볼 땐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결들을 좀더 풍성하게 확장해나갈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페미니즘 관련 강연이나 세미나를 해주겠다고 해도 듣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최근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요청을 해오고 이야기에 목말라하고 있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론 복잡한 기분이다. 고통을 받고 있다는 걸 증명한 다음에야 쏟아지는 관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가해자와 피해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이분법적 시선이 끼어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의 시선은 죄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라고 넘겨버린다면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 논의의 결을 넓힐 수 있는, 좀더 엄밀한 언어의 사용과 관찰도 고민해볼 시점이다.

정은영_최근 대만 선거를 보며 느낀 바가 많다. 적어도 그들의 진보진영은 다른 가치를 위해 소수자를 누락시키는 경우가 없었다. 당의 색깔이나 지향이 달라도 소수자에 대한 배려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페미니즘이 선택해야 하는 정치적 주제 중 하나가 아니라 진보운동의 공통분모 중 하나라는 말이다. 우리가 인식의 결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손희정_“계급이냐 젠더냐”라고 물으며 뭐가 더 중요한지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유독 페미니스트들에게 혹독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 같다. 이미 연대 안에서도 일정 부분 분리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물론 성차별, 젠더 문제가 최우선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전세계적인 우경화에 대한 반동으로 혐오라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여성 혐오’가 뚜렷하게 떠오른 게 사실이다. 그럼 한국에서 젠더 모순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최근 촉발된 여성 혐오의 담론은 일정 부분 언어적이고 감정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페미니즘의 언어가 대중인식 전반에 퍼질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여성 운동은 완성된 어떤 개념이 아니라 배워나가면서 함께 찾아가야 할 부분이다. 지금 우리가 그 논의의 출발점에 서 있는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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