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7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페미니즘에 대한 화두를 던진 작품들
2016-06-27
글 : 이주현
글 : 송경원

페미니즘 운동의 싹을 틔운 이래 그 정신이 스며든 해외영화들을 꼽았다. 소개하고픈 영화는 셀 수 없지만 지면 관계상 70년대 이후 작품으로 한정했다.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추천작도 함께 전한다. 편견 없이 여성을 직시하는 힘 있는 영화들이 여기 있다.

<잔느 딜망>

<잔느 딜망> Jeanne Dielman

감독 샹탈 애커만 1975년

잔느 딜망은 매춘부이자 주부이며 어머니인 동시에 여성이다. 때론 주어진 사회적 위치와 책임, 역할 등이 그 사람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호명들이 없어도 잔느는 그저 잔느일 따름이다. <잔느 딜망>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여성의 노동, 여성이라는 굴레 속에 갇혀 감당해야만 하는 길고 지난한 시간을 묵묵히 보여준다. 201분에 달하는 상영시간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잔느의 시간들을 드러내어 그 속의 모순을 관객이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극도의 권태와 압박 끝에 우리가 몰랐던, 혹은 외면했던 여성의 자화상을 마주한다.

<바그다드 카페>

<바그다드 카페> Out of Rosenheim

감독 퍼시 애들런 1987년

여성은 어떻게 연대하는가.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문을 연 바그다드 카페에서 카페 마담 브렌다와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 야스민이 만난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두 여인은 오롯이 자신의 두발로 일어서서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그다음에야 당당하게 상대를 마주보고 서로를 위한 위로와 안식처가 된다. 메마른 사막에 생기를 불어넣는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여성들이 빚어내는 마법 같은 순간들을 마주할 수 있는 영화다. <바그다드 카페> 제작 30주년을 기념한 무삭제 감독판이 오는 7월 재개봉을 앞두고 있다.

<불꽃 속에 태어나>

<불꽃 속에 태어나> Born in Flames

감독 리지 보덴 1983년

페미니즘 혁명을 다룬 SF영화. 1970년대 미국 내 핍박받던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여성 자치 단체를 만든다. 흑인 여성들의 라디오 방송국, 백인 펑크 여성들의 라디오 방송국, 여성 군대 등은 각자의 방식으로 여성 해방을 주장한다. 성 정치학뿐 아니라 인종, 계급, 미디어 권력의 문제까지 주제가 확장된다. SF라는 장르에 다큐멘터리적 스타일을 더한 연출 또한 흥미롭다. 리지 보덴 감독은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 미국 내 여성 운동 단체가 계급, 인종별로 나뉘게 되면서 그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상황을 재현해보고자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스위티>

<스위티> Sweetie

감독 제인 캠피온 1989년

<피아노>(1993) 이전에 <스위티>가 있었다. 제인 캠피온 감독의 장편 데뷔작 <스위티>는 9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감독의 등장을 화려하게 알린 독창적인 작품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언니 케이와 골칫덩어리 동생 스위티, 두 자매의 이야기를 냉소적으로 그려낸다. 여성이 받는 억압에 대한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예민한 감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로 직설적이고 과감한 연출과 화사하면서도 기괴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남성과 여성의 입장이 뒤바뀐 듯한 전복적인 여성상을 통해 사랑, 가족애, 여성의 역할 등에 대한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킨다.

<먼지의 딸들>

<먼지의 딸들> Daughters of the Dust

감독 줄리 대시 1991년

미국 조지아주 세인트 시먼스 아일랜드는 미국 내 아프리카계 흑인들의 문화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지역이다. 19세기 흑인 노예선에 실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이보족)이 이곳에서 반란을 도모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언어와 문화가 생성됐기 때문이다. 영화는, 1902년 세인트 사이먼스 아일랜드에 사는 아프리카계 흑인 가족의 이야기를 세 세대의 여성을 통해 들려준다. 블랙 페미니스트 영화의 고전으로 불리는 작품으로, 미국의 흑인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 중 최초로 상업 배급망을 탄 작품이기도 하다.

<안토니아스 라인>

<안토니아스 라인> Antonia’s Line

감독 마를렌 고리스 1995년

우리가 꿈꿔온 이상향이 여기에 있다. 4대에 걸친 모계가족의 이야기를 담아 페미니즘영화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안토니아스 라인>은 사실 성 역할과 구분 이전에 인간다운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남성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저항의 세월을 그려나간다. 상처 입고 밀려난 이들을 가리지 않고 품는 안토니아의 모습은 대지의 어머니라 부를 만하며 그 안에서 4대에 걸친 여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주체적인 삶을 이어나간다. 대안 공동체가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할 이상적 공동체의 초상이다.

<나는 앤디워홀을 쏘았다>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 I Shot Andy Warhol

감독 메리 해론 1996년

‘스컴 선언문’으로 잘 알려진 급진적 페미니스트 발레리 솔라리스의 전기영화. 자신을 드러내는 최후의 수단으로 앤디 워홀에게 총을 쏘았던 그녀는 정신이상으로 3년간 구금됐다. 비교적 중립적인 시선을 견지하려 애쓰는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 뉴욕의 여성 예술가를 둘러싼 혹독한 환경이다. 솔라리스가 방아쇠를 당긴 건 앤디 워홀로 상징되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인 셈이다. 솔라리스에 대한 평가는 미뤄두고서라도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했던 적대적인 환경은 새삼 지금 우리 주변을 되돌아보게 한다.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 Searching for Debra Winger

감독 로잔나 아퀘트 2002년

<데브라 윙거를 찾아서>는 우피 골드버그, 다이앤 레인, 홀리 헌터, 멕 라이언 등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경험담과 고백이 담긴 다큐멘터리. 배우이기도 한 로잔나 아퀘트 감독은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다가 문득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선배 배우 데브라 윙거의 현재 삶이 궁금해진다. 데브라 윙거를 찾는 과정은 곧 할리우드에서 나이 든 여배우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엄마로서의 삶과 배우로서의 삶을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지를 질문하는 과정이 된다. 결국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유독 여배우(혹은 여성)에게만 강조되는 젊음과 아름다움이 이상하지 않냐고.

<노스 컨트리>

<노스 컨트리> North Country

감독 니키 카로 2005년

1984년 미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직장 내 성폭력 승소 사건인 ‘젠슨 대 에벨레스 광산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 광산에 취직한 싱글맘 조시 에이미스(샤를리즈 테론)가 남성 광부들로부터 당하는 폭력, 그 폭력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밀도 있게 그렸다. 영화에서 남성들은 자신들 고유의 경제적 영역이라고 여긴 광산에 여성이 들어오자 그들을 즉각 위협적 존재로 여기고 가차 없이 공격한다. 이것은 비단 1980년대를 살았던 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웨일 라이더>(2002)를 통해 운명이란 이름으로 사회가 규정해버린 성역할에 의문을 제기했던 니키 카로 감독의 작품이다.

<분노할 때 그녀는 아름답다>

<분노할 때 그녀는 아름답다> She’s Beautiful When She’s Angry

감독 메리 도어 2014년

2세대 페미니즘을 주도했던 케이트 밀릿, 베티 프리단을 비롯한 30여명의 행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과거 사진과 영상 등 기록을 현재의 인터뷰와 교차시키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페미니즘의 역사를 복원해나간다. 낙태, 성폭행, 동성애 등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던 문제들을 운동의 전면에 내세운 2세대 페미니즘의 역사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일임을 새삼 일깨운다. 흑인 인권운동 구호였던 ‘검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따온 제목에 걸맞게 현실에 대한 분노를 숨기지 않고 변화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당시의 정신을 생생히 복원한다. 2014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이다.

<와일드>

<와일드> Wild

감독 장 마크 발레 2014년

영화의 주인공이자 원작자인 셰릴 스트레이드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낭 하나에 우겨넣고 90일간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걸었다(배낭의 공간을 차지한 두권의 책 중 하나는 시인이자 페미니즘 이론가인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된 언어의 꿈>이다). 26살의 셰릴은 엄마의 죽음 이후 고통을 마주하기 위해 걸었다. 고통의 독대만이 아니라 자연의 공격과 사람(대개 남성)의 위협까지 스스로 이겨내야 했다. 진정으로 홀로 선다는 게 무엇인지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주연배우인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자로 나서면서 셰릴의 이야기가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질 수 있었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감독 조지 밀러 2015년

조지 밀러는 과거 자신이 만든 <매드맥스> 시리즈를 21세기로 소환하면서 혁명의 중심에 선 인물로 여전사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를 창조했다. 남성우월적 독재자 임모탄에 대항하는 인물들도 만삭의 여성들, 모계사회의 전사들이다. 블록버스터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볼거리 혹은 보호의 대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다반사인 현실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페미니즘의 태도를 주제로까지 끌어들인 영화였다. <노스 컨트리>에서도 열연한 샤를리즈 테론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후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추천영화 5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❶ <댄스, 걸, 댄스>(1940) 감독 도로시 아즈너 ❷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6) 감독 아녜스 바르다 ❸ <침묵에 대한 의문>(1983) 감독 마를렌 고리스 ❹ <우리들은 정의파다>(2006) 감독 이혜란 ❺ <서프러제트>(2015) 감독 사라 가브론

<댄스, 걸, 댄스>

도로시 아즈너 감독은 1930, 40년대 할리우드의 유일한 여성감독이었다. 그녀는 당대의 스타였던 캐서린 헵번, 조앤 크로퍼드, 모린 오하라 등과 작업하며 할리우드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선구적인 작품들은 70년대가 되어서야 페미니스트 고전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녀는 할리우드 제도권 내에서 종종 장르를 비틀며 남성 중심적인 지배질서에 의문을 던졌다. 그중 두명의 여성 댄서가 주인공인 <댄스, 걸, 댄스>에는 고전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가장 페미니스트적인 장면이라고 부를 만한 결정적 순간이 포함되어 있다. 주디(모린 오하라)는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그녀를 예술가는커녕 성적 대상이나 비웃음거리로 취급하는 남성들의 시선에 당황한다. 하지만 주디는 정면으로 그들의 시선을 되받아치며, 그저 남성들을 위한 이미지이기를 멈추고 연설을 시작한다. “실컷 비웃어보라고.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옷을 벗어던지는 것이겠지. 50센트 정도 내고 자기 마음대로 여자를 쳐다봐도 되는 특권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겠지….” 고전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자연화되었던 남성의 응시에 대해 “크게 떠들고, 설치고, 생각하게” 만든 페미니즘적 장면이었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