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절연한 채 타지에서 홀로 생활 중인 범죄소설가 노라. 고립을 자처하며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하던 어느 날, 낯선 사람으로부터 메일 한통을 받는다. 오래전 연락이 끊겼던 소꿉친구 클레어가 결혼을 앞두고 있으며 그녀의 싱글 파티에 노라를 초대한다는 내용이다. 노라는 클레어의 저의를 짐작할 수 없지만 관계 회복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품고 파티장으로 향한다. 북적여야 할 파티는 예상외로 지나치게 단출하다. 파티가 열리는 곳도 유리로 지어진 숲속의 외딴 별장으로, 어딘가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다. 노라는 그곳에서 클레어와 반갑게 재회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과 마주한다. 흥청대는 분위기 속에 시작된 파티는 서로를 향한 날선 말들, 예고 없는 방문과 총성 등이 이어지며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서른여섯개의 소챕터로 나눠진 이 소설은, 읽는 동안 마치 서른여섯개의 영화 속 장면을 보는 느낌이다. 작품의 전개방식과 구성이 영화적 감흥에 한몫한다. 병원에서 눈을 뜬 주인공의 회고와 다양한 국면으로 변하던 파티 현장을 교차편집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중요한 장면에 챕터를 넘기는 완급 조절도 돋보인다. 또한 밀실에 고립된 여섯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만큼 캐릭터의 특징을 살려낸 활기 있는 대화문이 이야기를 추동한다. 하지만 주연 격인 클레어와 노라에 비해 조연들의 매력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이 소설의 영화화 작업에 돌입했다. <와일드>(2014), <나를 찾아줘>(2014) 등을 통해 탄탄한 제작 실력을 입증한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을 맡았다.
뜸 들이는 것만큼 소설이 제시하는 반전의 강도가 세진 않다. 하지만 인적 없는 외딴집, 끊어진 연락수단, 고립된 인물들 등 고전적인 미스터리 소설의 장치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한달음에 읽을 만한 흡인력을 선보인다. 특히 어린 시절의 권력 관계가 지니는 불가항력적인 면모나 갈등, 질투,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물들의 심리묘사도 촘촘한 편이다. 영국 출신 작가 루스 웨어의 데뷔작이다.
과거로의 초대
뇌는 완벽하게 기억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야기를 들려준다. 구멍을 메우고 환상을 기억인 양 각인시킨다. 진실을 찾아야 한다. (중략) 나는 작가이다. 거짓말이 직업인 사람이다. 멈춰야 할 시점을 도통 모르겠다. 이야기에 구멍이 보이면 적당한 이유나 동기, 그럴듯한 설명으로 메워야 직성이 풀린다. 더 밀어붙일수록 진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222쪽)
사람은 심하게 아플 때 사소한 부분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우리 할아버지도 정신이 흐려지실 때 그랬다. 덩어리가 큰 일은 더는 신경 쓰이지 않고 갈비뼈를 불편하게 압박하는 가운의 허리띠나 허리 통증, 손의 촉감 따위 아주 소소한 걱정들로만 세상이 쪼그라든다. 그나마 그렇게 집중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지도 모른다. 더 넓은 세상은 의미가 없다. 병세가 악화할수록 세상은 더 작아진다. 마지막에는 숨을 계속 쉬는 것만 중요할 뿐이다.(2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