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순박한 드라마의 정공법 -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
2016-09-05
글 : 송경원
<고산자, 대동여지도>

기획영화의 미덕은 이제껏 본 적 없는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보이는 데 있지 않다. 설사 처음 접하는 소재일지라도 모두가 친근하게 소화할 수 있는 평균의 감각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강우석은 데뷔 이래 꾸준히 한국 상업영화의 제일 앞줄에 서 있던 감독이자 제작자다. 당대에 유효하게 통용될 장르를 전면에 내세워 웃음과 시대성을 버무리는 감각은 눈높이를 맞출 줄 아는 친숙함과 쉽게 넘볼 수 없는 과감함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런 그가 정작 사극을 연출한 경험이 거의 없다는 건 차라리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그는 <혈의 누>(2005), <황진이>(2007), <신기전>(2008) 등 적지 않은 사극영화의 기획을 맡았지만 직접 메가폰을 잡은 적은 없었다. 이는 아마도 최근 몇년간의 조용한 행보와도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최근 2, 3년간 극장가를 휩쓸었던 사극 열풍은 올해 다소 잠잠해진 모양새인데, 이 시점에 강우석 감독이 자신의 스무 번째 작품이자 첫 번째 사극을 들고 나왔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강우석의 첫 번째 사극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제목 그대로 두발로 전국 팔도를 누비며 대동여지도를 완성한 김정호의 일대기를 다룬다. 김정호는 구전으로 기억되는 위상과 기록으로 남겨진 사실 사이에 격차가 큰 인물 중 한명인데 남겨진 기록을 다 합쳐도 A4지 한장을 채 넘지 않는다는 점이 도리어 영화적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는 측면이 있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박범신 작가의 동명 소설을 드라마의 뼈대로 삼고 크고 작은 행간의 의미를 보탰다. 영화는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과정을 일일이 따라가고 보여주는 대신 지도에 미친 김정호가 독도를 제외하고 나머지 대동여지도를 이미 완성한 시점부터 본격적인 드라마를 시작한다. 위대한 지도를 만든 빼어난 재능의 ‘위인 김정호’를 조명하는 게 아니라 지도가 좋아 지도에 파묻혀 살아온 사람 김정호의 생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대동여지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산자 김정호’가 주인공인 영화이며 대동여지도의 위대함이나 당대의 역사적 상황은 이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좋은 장치일 따름이다.

사극을 다뤄도 강우석의 영화는 여전히 강우석답다. 자신의 첫 번째 사극의 주인공으로 고산자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김정호라는 인물에게 느낀 친숙함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고산자 김정호는 조선말기 강철중이다. 강우석의 대표 캐릭터라 해도 좋을 <공공의 적>(2002)의 강철중(설경구)은 감독이 애정을 느끼는 포인트들의 압축판이라 할만하다. 배운 것 없이 기술(권투) 하나로 지금의 자리에 섰고 그래서 어떤 이권이나 집단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 강우석 영화 속 수많은 ‘강철중’들은 서민의 흙냄새가 묻어나는 눈높이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본다. 때론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세상 모진 풍파를 다 겪어 생존을 위한 능청도 부릴 줄 알지만 그래도 끝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명확한 기준을 자신의 속에 단단히 품고 사는 ‘사람 냄새 나는 사람’. 고산자 김정호의 삶이 꼭 그러하다. “영화화하기 쉬운 내용이 아니라서 고민했다. 책을 읽고 박범신 작가에게 3개월만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이 작품을 안 하면 일생을 후회할 것 같았다”는 감독의 고백은 왜 이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대변한다. 변두리 인물의 질박함을 사랑했던 강우석이 사극을 한다면 이보다 나은 인물도 드물 것이다.

동시에 선뜻 영화화할 수 없었던 고민도 짐작 가능하다. 상당 부분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라 부담도 있었을 테고 우리에게 김정호가 알려진 과정에 일제 식민사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도 압박이었을 것이다. ‘위대한 지도’에 초점을 맞출지 백성의 눈높이에서 지도 보급에 매달렸던 ‘사람’에 무게를 실을지 극의 균형을 잡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다. 다행히 기획영화가 갖춰야 할 균형감각, 언뜻 투박해 보여도 본론까지 직진하는 뚝심에 관한 한 강우석은 신뢰할 만한 이름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느라 길을 헤매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기대하는 볼거리나 드라마를 성실히 수행하는 안정적인 영화다. 영화는 이를 달성하기 위해 풍광, 웃음, 드라마 세 가지 각기 다른 톤의 영화를 순서대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타이틀이 올라가기 전까지의 초반, 영화는 조선 팔도의 수려한 풍광을 스케치하듯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김정호가 지도 제작에 빠지게 된 이유를 플래시백으로 짧게 설명한 뒤 그의 발걸음을 따라 스크린 위에 지도를 새기듯 빼어난 절경들을 훑는다. 합천 황매산, 여수 여자만, 울진 왕피천, 겨울의 북한강, 백두산 천지까지 CG가 아닌가 싶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장관들이 그림엽서처럼 화면을 수놓고 지나간다. 그간 비주얼보다는 드라마의 짜임새에 공을 들였던 강우석 감독이 이와 같은 오프닝을 선택했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지점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그간 한국영화를 이끌어온 감독으로서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에도 이만큼 자신이 있다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기획영화로서 할 도리를 다하겠다는 태도다. 김정호에 관한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관객이 으레 바랄 수밖에 없는 화면들, 그러니까 조선 팔도의 풍광을 익스트림 롱숏으로 풍성하게 선보인 뒤 자신의 장기인 유머와 드라마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이다.

투박한 진심, 정공법의 힘

사실 강우석의 색을 진하게 녹여낸 사극이 아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길게는 <음란서생>(2006)부터 <관상>(2013), <역린>(2014), <사도>(2015)까지 최근 몇년간 유행했던 웰메이드 사극영화들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제껏 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은 없지만, 세련되게 다듬어진 화면은 순박한 드라마를 전달하기 위한 잘 닦인 그릇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어쩌면 당대 가장 유효한 연출, 화면, 톤을 자신의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는 유연함이야말로 강우석 감독다운 색깔인지도 모르겠다. 눈이 즐거울 때나 적당히 눈물샘을 자극할 때도 익숙하고 편안한 흐름을 유지하는 게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가장 큰 강점이다. 초반 풍광들을 보면 작가적 야심을 발휘할 법도 하건만 영화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평균적인 즐거움에 맞춰져 있다. 무난하고 친숙하다는 수식어는 이 영화에서 흠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철저히 계산된 무난함이고 목표를 정확히 수행하는 뚝심이다. 영화 속 김정호의 삶처럼 고되고 힘들 땐 해학과 웃음으로 한숨 쉬어가면서 뚜벅뚜벅 걸어간다.

어쩌면 다소 낡고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순박한 드라마의 정공법은 몇 가지 난제를 돌파하는 데 꽤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이 김정호를 둘러싼 역사 왜곡에 대한 우려를 걷어내는 방식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어독본>에 실린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에는 일정 부분 조선의 전근대성을 부각시키려는 욕망이 자리한다. 두발로 일일이 걸어다니며 지도를 그렸다는 부분은 지도 제작 기술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흥선대원군이 국가정보 누설을 우려하여 김정호를 핍박했다는 부분도 조선 관료의 무지함을 강조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다. 하지만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온전히 사람 김정호에 초점을 맞추며 역사 왜곡의 논란을 피해가려 애쓴다.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그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한 부분은 오히려 과잉된 면이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인물들을 단순화시키거나 드라마의 도구로 삼지 않으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하다. 덕분에 유준상이 맡은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고집하는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좀더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흥선대원군, 김정호, 안동 김씨 일문의 갈등도 어딘지 소박하고 순진한 구석이 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어디까지나 지도를 백성들에게 보급하고자 했던 김정호의 우직한 걸음을 따라가는 영화다. 굵직한 역사보다는 소소한 호흡과 흙냄새가 먼저 느껴지는 건 질곡의 시대보다는 사람 김정호의 진심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을 애써 메우기보다는 하고 싶은 이야기, 잘하는 부분을 부각시킬 줄 아는 영리함이 있다. 다소 과장된 듯 보이는 차승원, 김인권의 연기나 아재개그의 향기가 느껴지는 몇몇 웃음 코드들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영화의 톤에 적절히 부합한다. 언제나 그렇듯 정공법은 실패할 확률이 적다. 참신함으로 기억되진 않을지언정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할 줄 아는 이 영화의 미덕은 되새겨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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