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이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어떤 이미지에서 출발한 이야기일까 궁금했다. 한 남자가 총을 들고 좁고 긴 복도를 걸어가고(<달콤한 인생>(2005)), 한 무리의 사나이들이 말을 타고 벌판을 내달리고(<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연쇄살인범이 사람을 끌고 가 토막살해하고(<악마를 보았다>(2010)), 보안관이 자신의 울타리를 침범한 악당들을 쫓아내기 위해 총을 잡는(<라스트 스탠드>(2013)) 등 그는 누아르, 서부극, 하드코어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순회하며 그 장르를 대표할 만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8번째 장편영화 <밀정>은 그림과 공간을 먼저 잡아낸 뒤 서사를 꿰맞추었던 전작과 다른 궤적에 놓인 작품이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고, 누구의 편인지 몰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며, 계층을 불문하고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었던 시대의 표정을 담아내는 것이 이미지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경계에 선 인물이 상황에 맞게 처세하다가 어떤 일을 계기로 신념을 갖게 되는 순간이 의미심장한 것도 그래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간과 일제강점기의 심장부인 경성, 식민지 아시아의 용광로인 상하이라는 공간 그리고 적과 아군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선 인물 등 삼박자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밀정>은 김지운 감독의 새로운 변화라 할 만하다.
스파이 장르의 공식에서 출발하지만
1920년대 경성. 의열단 핵심 단원 김장옥(박희순)은 투쟁 자금 확보 작전을 수행하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경찰에 발각돼 목숨을 잃는다. 상해임시정부에서 김장옥과 함께 일했던 조선인 일본 고등경찰 이정출(송강호) 경부는 상관인 경무국 히가시(쓰루미 신고) 부장으로부터 의열단의 친구가 되어 핵심 정보를 캐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정출은 김장옥이 혁명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팔려고 했던 불상을 들고 고미술상을 운영하는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김우진은 미술품을 들여와 장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경성과 상하이를 오가며 의열단 활동을 은밀하게 하는 핵심 세력이다. 김우진이 이정출이라는 자가 자신에게 접근해온다는 소식을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에게 보고하자 정채산은 “적의 첩자를 역으로 우리 첩자로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상하이에서 김우진은 이정출을 정채산에게 소개했고, 이정출은 “한번만 눈감아달라”는 김우진의 부탁을 받고 마음이 흔들린다. 의열단은 헝가리 폭탄 전문가 루비크가 개발한 폭탄을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반입하기 위한 작전을 실행하고, 이정출과 또 다른 일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는 의열단을 쫓는다.
스파이 소설에서나 볼 법한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황옥 경부 사건’을 소재로 했다. 1922년 3월, 의열단 김시현은 경기도(경성) 경찰부 고등경찰계 소속의 황옥 경부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에서 운반된 폭탄과 유인물(신채호가 의열단을 위해 쓴 조선혁명선언문)을 톈진에서 만주 안둥현으로, 안둥현에서 경성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제 공안 당국은 3월15일 황옥을 포함한 폭탄 운송 관련자 18명을 체포했고, 달아난 김시현도 경찰에 붙잡혔다. 법정에서 황옥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경찰 당국에 분개했다. 폭탄이 경성에 들어오기만 기다려 경성에서 의열단을 일망타진하고, 폭탄을 압수해 공을 세우기 위한 계책으로 의열단에 거짓으로 가담했다고 밝혔다. 황옥의 발언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분명한 건 그 사건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를 잡기 위해 한국인 고등경찰을 적극 활용했고, 한국인 고등경찰이 독립운동단체에 침투해 공작 수사를 펼친 일제 공안 당국의 수사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황옥이 의열단에 가담한 데는 자신의 말대로 의열단원을 체포하기 위한 목적만 있었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의열단에 잠깐이나마 가담했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게 아니라면 의열단과 뜻을 함께했지만 혼자 살기 위해 거짓 진술을 한 것일까. <밀정>은 의열단 역사에서 조연으로 잠깐 등장하는 이중간첩 황옥의 존재를 끌어와 창조한 이정출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의열단과 밀정에 관한 이야기다.
김장옥이 밀정 때문에 일본 경찰에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되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이정출이 김우진에게 접근하기까지의 영화 초반부는 스파이 장르의 공식에 충실하다. “여기 다들 밀정이 아니란 증거 있소?” 김장옥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다가 경찰에 잡힌 뒤 홀로 풀려난 탓에 이정출의 끄나풀로 의심받는 의열단원 주동성의 말은 누구나 밀정이 될 수 있는 시대이고, 밀정이 아직 의열단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정출이 의열단의 친구가 되기 위해 김우진을 찾아가면서 긴장감이 슬슬 구축된다. 술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이정출, 김우진 두 남자가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연기하는 장면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아 액션 신 하나 없는 데도 서늘하다.
그런데 <밀정>은 김우진이 이정출을 의열단의 친구로 포섭해 폭탄을 경성으로 안전하게 반입하는 과정에서 장르의 쾌감이 발생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정출이 의열단에 잠입해 의열단을 위험에 빠뜨리는 데서 서스펜스가 쌓이는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이정출이 예기치 않은 어떤 일을 겪으면서 진퇴양난에 빠지는 순간, 스파이영화로서 <밀정>의 진면목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얘기를 자세하게 이어가기 전에 이정출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살펴보는 게 중요하겠다. 이정출과 김우진이 바에서 술을 마시는 영화의 초반부에서 이정출에 대한 정보가 김우진의 입을 빌려 소개된다. “형(이정출)과 (김)장옥이 형은 임정 때부터 단짝이셨으니 그럼 우리도 아주 연이 없는 사이도 아닙니다. 아, 근데 임정 때 통역 일을 하시다가 어쩌다 관운이 트여서 일본 순사가 됐을까나?”(김우진)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더라고. 사내는 자기를 알아봐주는 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동물인지라 지금 부장님이 특별히 불러주시니 이렇게 완장을 차게 된 거지.”(이정출) “이봐, 이럴 줄 알았어. 이 형은 독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처음부터 딱 알아봤어. 순사가 안 됐으면 폐병쟁이 시인이 됐을 사람이야.”(김우진)
이정출의 얼굴, <밀정>의 미장센
그러니까 이정출은 어쩌다 상해임시정부에서 통역을 했고, 어쩌다 경무국 히가시 부장의 눈에 들어 일본 경찰이 되었으며 어쩌다 경부 자리까지 출세해 어쩌다 의열단의 기밀을 빼내기 위해 김우진을 만났다가 난처한 일을 겪게 된 것이다. 상해임시정부 일을 하긴 했지만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 만큼 대단한 신념을 가진 것도, 동료 경찰 하시모토처럼 경찰 일에 자신을 완전히 바친 것도 아니다. 그저 상황에 따라 생존을 위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뜨거운 감자를 입에 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의열단과 일본 경찰의 경계에 선 이정출의 얼굴은 음영이 드리우게 된다. 기차 총격 신, 경성역 액션 신 등 액션 신 역시 단순히 스펙터클을 전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정출의 심리를 뒷받침한다. “누아르는 표정”이라는 김지운 감독의 말대로 송강호는 의심, 곤혹스러움, 분노, 능청스러움 등 다양한 감정을 이정출의 얼굴에 세심하게 실어나르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정출의 표정은 신과 신을 단단하게 조이는 펜치가 된다. 그 점에서 이정출의 얼굴은 스파이영화로서 <밀정>의 분위기이자 미장센이라 할 만하다. 이 밖에도 김지용 촬영감독, 조화성 미술감독, 조상경 의상감독은 1920년대 경성과 상하이를 스크린에 펼쳐내 보인다. 공유, 한지민, 쓰루미 신고, 엄태구, 신성록 등 출연진의 연기 또한 서사에 깊이감을 불어넣는다. 특히 의열단장 정채산을 연기하는 이병헌은 잠깐 등장하는 데도 강렬하다.
<밀정>은 토마스 알프레드슨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 같은 서늘한 스파이영화보다 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1969) 같은 뜨거운 레지스탕스 영화에 더 가깝다(<그림자 군단>은 2차대전 때 프랑스 해방을 위해 활약했던 레지스탕스 이야기로, 실제로 레지스탕스를 경험했던 멜빌의 자전적인 영화다). 그건 <밀정>이 내일이 없는 삶을 살다간 의열단 청년들을 다루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밝힐 순 없지만, 이정출은 여러 일을 겪으며 어떤 신념에 도달하고, 결국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그게 스파이영화 <밀정>이 거둔 진정한 성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