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감독들의 고민을 들어보고자, 올해 의미 있는 독립영화를 선보인 세명의 감독을 만났다. 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자력으로 <들꽃>(2014), <스틸 플라워>(2015), <재꽃>(2016)까지 완성한 박석영 감독, 단편 <손님>(2011), <콩나물>(2013) 등으로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고 올해 빛나는 데뷔작 <우리들>을 선보인 윤가은 감독, 첫 번째 장편 극영화 <걷기왕>을 통해 꿈과 열정을 강권하는 사회에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 백승화 감독이 귀한 시간을 내주었다. 독립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며 어떤 현실적 어려움에 부딪혔는지 또 창작자들에게 필요한 지원과 정책은 무엇인지, 다양한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였다.
박석영
데뷔작 <들꽃>(2014)을 시작으로 <스틸 플라워>(2015), <재꽃>(2016)까지 세편의 ‘꽃 시리즈’를 완성했다. 세편 모두 혹독한 세상에 내던져진 소녀들의 이야기다. <재꽃>은 올해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백승화
다큐멘터리 <반드시 크게 들을 것>(2009), <반드시 크게 들을 것2: WILD DAYS>(2012) 등을 만들었고, 올해 첫 장편 극영화 <걷기왕>을 선보였는데, 한국영화계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최초 실시한 영화로 화제를 모았다.
윤가은
<사루비아의 맛>(2009), <손님>(2011), <콩나물>(2013) 등 단편 작업 때부터 아이들의 세계를 섬세한 터치로 그려냈다.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6) 역시 초등학교 4학년 소녀들의 질투와 배신과 우정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슈에 대해
=박석영_ 첫 번째 영화 <들꽃>을 만들 땐 처음 경험하는 것투성이였다. 독립영화에 대한 개념도 자리잡고 있지 않았고, 아는 사람도 없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도 몰랐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 자체로 굉장히 기뻤다. <들꽃>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틸 플라워>와 <재꽃>까지 완성했는데, 개봉 과정을 거치면서 깨달은 건, 영화를 만드는 일이 굉장히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과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힘든 게 배급이라는 거였다. 제작과 배급과 상영은 굉장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화를 전체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특히 독립영화감독은 마지막까지 자기 작품을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결국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주는 사람과 그것을 물리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극장이 긴밀한 운명공동체 안에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모두들 너무 상황이 힘들다. 독립영화 배급사, 제작사, 극장이 쓰러져가고 있다. <들꽃> <스틸 플라워> 두편의 영화를 개봉하면서, 다같이 손잡고 이상한 게임에 뛰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윤가은_ 순간적으로 내 얘기인 줄 알았다. (웃음) 첫 장편 <우리들>을 통해서 영화의 유통 과정을 처음 경험했는데, 지금까지는 내가 영화를 반만 알았구나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상업영화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면, 다음에도 이같은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 마음을 먹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우리들>의 경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CJ엔터테인먼트의 산학협력 프로젝트여서, 자본으로부터 완벽히 독립해서 만든 영화는 아니다.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투자사는 투자사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나는 또 나대로 각자가 원하는 방향이 조금씩 달랐다. 좋은 작품, 작가가 중심에 놓이는 영화를 추구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지만 세부적인 목표는 조금씩 달랐고 거기서 오는 압박도 있었다.
=백승화_ CGV아트하우스가 제작에 참여한 <걷기왕>도 저예산영화라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자본으로부터는 독립하지 못했지만 태도 면에선 독립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애초 <걷기왕>은 지금의 제작사인 인디스토리뿐만 아니라 시네마달, 서울독립영화제, 인디플러그 같은 독립영화 제작사들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준비하던 프로젝트로 출발했다. 하지만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중에 CGV아트하우스가 관심을 보이면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CGV아트하우스와 작업하면서 도움도 많이 받았다. 심은경이라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배우와 함께 작업할 수 있었고, 개봉했을 때 상영관 확보에도 유리했다. 하지만 개봉하면서 느꼈던 건 이 영화의 정체성이 애매하다는 거였다. 관객 역시 이 영화가 독립영화인지 상업영화인지, 또 심은경이 나오는 독립영화인지 헷갈려하더라. 사실 내게는 그런 구분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의 방식으로 할 수 있다면 독립영화가 됐든 상업영화가 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독립영화의 ‘자립’이라고 생각한다. 박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의 독립영화 제작사와 배급사는 오히려 영화를 제작하면 할수록, 배급하면 할수록 손해가 발생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런 상황을 꽤 오래전부터 지켜봤다. 예전엔 외부의 압력으로부터의 독립, 거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독립보다는 자립을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독립영화는 그 자체로 새롭고 흥미로워야 한다. 독립영화라는 브랜드 자체도 그래야 한다. 나 역시도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모두 패배에 익숙해져 있다고 해야 하나. 항상 잘 안 되니까. 그러나 변화를 고민해야 하고, 실은 훨씬 전부터 그런 고민을 했어야 한다.
박석영_ <들꽃>과 <스틸 플라워>는 은행의 도움으로 완성된 영화들이다. (웃음) <들꽃> 땐 누군가가 5천만원을 투자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5개월을 기다렸다. 그런데 영화의 엔딩을 바꾸라더라. 그래서 혼자 만들었다. 독립영화 역시 최소한의 수익을 내지 않으면 힘들다. 제 살 깎아먹기를 계속하면서 영화를 찍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내 영화는 애초에 상업적인 영화일 수 없었기 때문에 자력으로 만든 거다. 크게 망하고 또 망하고 아마 이번에도 망하겠지만 그건 스스로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흥행이 중요한 이슈는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정책이 몰지각한 인간들에 의해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문화융성을 얘기하지만 게임산업에 비하면 영화산업에 들어오는 돈은 조족지혈에 가깝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서 운영할 순 있는 돈이 많지 않다. 더 슬픈 건 이런 거다. 영진위의 다양성영화 배급 지원 심사 기준에 ‘상업성을 고려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상업성을 따질 거면 왜 다양성영화에 지원을 하나. 상업영화 배급 지원을 하면 되지. 영화인들을, 창작하는 사람들을 이토록 모욕적으로 대우하고 있다. 그런 체제에서 우리는 각자의 고민을 안고 열심히 영화를 찍고 있다. 영화 교육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극장에서 다양한 영화들을 체험하는 것, 그 영화들이 주는 새로운 가치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GV를 다니다보면 “독립영화 처음 봤어요”라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독립영화를 취향으로 좋아하는 군이 틀림없이 존재하고 그들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영화와 영화 교육은 보편적인 것이 돼야 한다. 독립영화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관객층을 만나야 한다. <재꽃>은 자체 배급을 계획 중인데, 가능하면 지방 중심으로 상영하려 한다. 참고로 <재꽃>은 영진위 제작지원을 받았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웃음)
영화를 만드는 ‘환경’에 대한 고민
백승화_ 영진위의 제작지원금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이면, 제작지원금을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 영진위가 상업영화와 관련해선 더이상 핸들링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얘기를 한다. 그렇다면 다양한 독립영화들을 지원하는 게 핵심 역할이 돼야 한다. 그런데 지원금이 너무 적다. 지금까지 무수한 독립영화들이 스탭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내부의 반성도 필요하다. 스스로 독립영화감독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독립영화라는 게 특별히 고귀한 무엇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치적 올바름의 산물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처음 단편영화를 만들고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는 독립영화계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곳이고, 독립영화인들 또한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지내다보니 반성할 것이 많더라. 상업영화는 돈이라도 주고 괴롭히는데 여기는 돈도 안 주고 괴롭히는 거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해 크게 반성을 하지 않는 건 아닌가 싶더라. <걷기왕> 현장이 성희롱 예방교육으로 이슈가 됐지만 그렇다고 현장이 천국 같고 다들 행복했던 건 아니다. ‘스탭들에게 이런 금액을 주고 이렇게 괴롭히면서 영화를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요즘은 영화를 만드는 ‘환경’에 대한 고민이 크다.
윤가은_ 공감한다. 저예산영화의 경우 예산을 줄여야 할 때 인건비를 먼저 깎는다. 스탭들이 기량을 제대로 뽐내게 하기 위해선 인건비 같은 기본적인 요건들이 충족돼야 하는데, 작업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이 있다. 스탭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 또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나는 독립영화와 예술영화의 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영화들에 얼마나 관객이 들었는지 찾아본 적이 없다. 이번에 <우리들>을 개봉하면서 처음으로 내가 좋아했던 독립영화들의 관객수를 찾아봤다. 내가 좋아했으니 다른 사람들도 많이 좋아했겠지 싶었는데 그렇지 않더라. 정말 충격이었다. 그 뒤로 나도 목표치를 확 낮췄다. 워낙 독립영화들의 흥행이 저조하다보니 관객이 1만명만 들어도 잘됐어 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런데 1만명은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숫자다. 1만명이 넘었어도 수익이 안 났으니 사실상 영화는 망한 거다. (웃음) 그 숫자에 의미를 두고 만족을 하라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오히려 또 다른 자괴감이 든다. 이런 구조 안에서 영화를 만들 때, 어떤 방식으로 제작을 하고 어떻게 배급을 할 건지 처음부터 그 구상이 감독에게 있어야 하는 건가 싶다.
박석영_ 독립영화 현장은 종종 영화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열정페이를 받아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독립영화 현장을 스탭들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첫 번째 훈련의 장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이유에서라도 영화 제작지원금이 지금보다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는 거다. 영진위의 후반제작지원도 있고 영상위원회의 장비지원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형태의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독립영화 배급사 및 극장에 대한 지원이다. 소중하게 만들어진 영화가 작게라도 소중하게 상영되고 끝이 났으면 하는 게 감독으로서의 바람이다.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된 영화 수만 해도 단편이 1천여편, 장편이 30~40편쯤 된다. 그런데 영화제가 끝나면 이 영화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이런 영화들이 상영될 수 있는 극장이 동네마다 있어야 한다. 영국 배우들이 왜 그렇게 연기를 훌륭하게 잘하는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영국엔 동네마다 극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미 영화는 많다. 어떻게든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 영화들이 상영될 공간이 없다. 영화는 보편적으로 향유되고 체험돼야 하는 문화다.
윤가은_ <우리들>의 경우도 개봉 초 영화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퐁당퐁당 상영임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많이 들었다. 그런데도 관이 늘어나진 않더라. 외딴섬에서 ‘여기 이런 영화가 있어요’ 하고 우리끼리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백승화_ 한국에선, 영화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에서 다양성의 가치를 크게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는 것이 늘 중요하게 여겨진다.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새로운 시도를 가능하게 하는 곳이 독립영화 신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영화 내부에서도, 독립영화만의 매력, 이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더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다.
박석영_ 독립영화가 됐든 문화예술 종사자가 됐든 그들이 시대의 흐름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지속되면, 처음에 영화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매우 소소한 이유들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순수하게 아름다운 순간들을 위해서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늘 사랑에 실패하면서도 다시 사랑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특히나 요즘 같은 시국에선 정말 정신을 못 차리겠다. 피식거리면서 ‘뭐 길라임?’ 이러다가도 ‘세월호 7시간’을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나라인가 싶다. 아무것도 대단하지 않고, 아무것도 소중하지 않고, 모든 것이 가치롭지 않고, 그럼에도 혼자서 버티고 또 싸워나가야 하는 게 힘이 든다. 어쨌거나 다음 작품도 준비 중이다. <재꽃> 작업이 마무리되면 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사진가에 대한 이야기다. 사진가가 총에 맞아 죽으면서 그의 카메라도 함께 흙 속에 묻혀 훗날 발견되는데 카메라 안에는 필름이 없다. 그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될 텐데, 그 장면만 생각하고 나이지리아로 갈 계획이다. 지금의 나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는 이야기다. 결국 찍어낼 수도 없고, 보여질 수도 없고, 스스로 필름만 채우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그럼에도 그 빈 카메라는 의미가 없는 건지 스스로 확인해보고 싶다. 뭔가를 찍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를 찾고 싶다.
환경과 시스템, 이야기만큼 중요하다
백승화_ 아직 구체적인 차기작 계획은 없고, 매번 그랬듯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모르겠으나 영화를 하면서 지키고 싶은 것들은 있다. 내게는 영화라는 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다. 영화보다 영화를 만드는 행위가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과 영화 만드는 걸 즐길 수 있는 환경에서 작업하고 싶다.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의 때문에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이 희생되는 것이 내게는 견디기 힘든 일이더라.
윤가은_ 나 역시 차기작의 그림은 아직 그리지 못한 상태다. <우리들> 이후엔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영화에 대해 칭찬을 할 때 그것은 나를 향한 칭찬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고 보여질 수 있도록 노력한 많은 사람들, 그 총합에 대한 피드백이란 생각. 그러니까 이 작품이 괜찮았다는 평을 듣는다면 그것은 이 영화를 함께한 팀이 괜찮았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아무리 끝내주는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더라도 환경과 시스템에 구애받지 않고 영화를 잘 만들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경우 3개월 동안 편집실에서 편집기사와 붙박이로 지내면서 모든 촬영 소스를 챙겨봤다. 오케이 컷을 그냥 쓴 게 아니라 엔지 컷을 찾아서 장면을 만들었다. 이런 편집 프로덕션은 지금의 팀이었기에 가능했던 작업이다. 영화는 산술적 계산으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에 맞는 유연한 작업방식을 앞으로도 많이 고민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