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긴 별별 영화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시국이 뒤숭숭한 와중에도 자신의 소명을 지키며 ‘열일’한 독립영화·독립영화인에게 고마움과 응원을 전하는 의미에서다.
올해의 오지라퍼_ <범죄의 여왕> 양미경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뭐든 궁금한 일이 생기면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는 못 견디는 여자, 올해의 오지라퍼는 단연 <범죄의 여왕>의 양미경(박지영)이다. 미경은 시골에서 불법 시술을 전문으로 하는 미용실을 운영하며 살던 중 서울 사는 아들 집 수도요금이 120만원이 나오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는 곧장 상경한다. 미경은 그를 창피해하는 아들의 태도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수상쩍은 관리실과 이웃집을 들쑤시고 다니며 ‘수사’를 시작한다. 아줌마 탐정 미경의 용의자 탐문 방식은 별것 없다. 일단 현관문부터 두드리거나 통성명으로 모든 관계를 평정하고 친구 되기다. 넘치는 애정과 오지랖으로 미경은 거친 아파트 관리인 개태(조복래), 은둔형 외톨이이자 게임 폐인인 진숙(이솜), 얼핏 모자라 보이지만 탁월한 관찰력의 고시 전문가인 덕구(백수장)를 차례차례 자신의 조력자로 만든다. 촉 좋고, 의리 있는 양미경은 특유의 넉넉한 마음으로 수평적인 연대를 이끈다. 실제로도 “항상 옆에 있는 사람들 사정이 신경 쓰여 죽겠다”는 박지영의 ‘오지라퍼 기질’을 그대로 투영한 인물. -윤혜지
올해의 스포트라이트_ <자백> <그림자들의 섬> <거미의 땅>
사회 이슈를 소재 삼은 독립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힘은 끈덕진 취재에서 비롯한다. <자백>은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을 취재해온 MBC <PD수첩>의 최승호 전 프로듀서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다. 탈북자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는 간첩 혐의로 수감됐다. 국정원 중앙합동신문센터에 6개월간 감금된 채 감시와 구타에 시달린 여동생 유가려씨의 허위 증언이 결정적 증거였다. 그 자백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왜 그 자백이 필요했는가에 관해 <자백>은 사건 담당 검사, 유가려씨의 조사관, 당시 대공수사국장을 지낸 김기춘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차례로 되묻는다. 끈질김에 있어선 김정근 감독의 <그림자들의 섬>도 못지않다.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이 대한조선공사로 불리던 1980년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노동조합의 30년 투쟁사를 조명한다.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사쪽의 무분별한 대규모 해고, 노동자를 향한 부당한 처우, 이에 맞서는 노조의 투쟁까지 모든 것이 나아짐 없이 현재진행형이다. 폐허가 된 기지촌과 그곳의 역사를 기억하고 살아낸 세 여성의 이야기를 이어붙인 <거미의 땅>(감독 김동령, 박경태)도 있다. 오랜 역사를 품은 인물의 기억과 트라우마를 독특한 형식적 실험으로 재연하고 있다. -윤혜지
올해의 ㅇㄱㄹㅇ(이거레알)_ <소꿉놀이> <야근 대신 뜨개질> <연애담>
격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에 요즘은 이렇게 댓글을 단다. ㅇㄱㄹㅇ. ‘이거, 레알’이란 뜻이다. 의도치 않은 임신으로 엄마가 된 김수빈 감독은 스스로 카메라를 들고 자신이 겪은 결혼과 출산, 육아의 고생담을 절절히 담은 다큐멘터리 <소꿉놀이>를 내놓았다. 23살의 감독은 “엄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나 사랑해? … 엄마, 수빈이 임신했어”라며, 어머니가 기절초풍할 멘트를 조심스럽게, 동시에 뻔뻔하게 날린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사고는 벌어진 것. 게다가 남편은 유학을 간단다. 한국 사회 속 20대 여성이 취업과 결혼, 출산과 육아의 거대한 늪에서 어떻게 허우적거리는지, 혼돈 속에서 ‘나’를 붙잡기 위해 어떤 싸움을 해야 하는지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작품. ‘야근과 휴근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공공의 가치와 혁신을 설파하는 사회적 기업 직원인 세 여성, 나나, 주이, 빽의 삶도 다르지 않다. <야근 대신 뜨개질>(감독 박소현)은 개인적인 삶의 변화가 일터로까지 확장되기를 바라며 세 여성이 연대 활동으로서의 뜨개질을 시작하는 과정을 그린다.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특히 여성이라면 <연애담>(감독 이현주)의 윤주(이상희)와 지수(류선영), 누군가에게는 한번쯤 깊이 공감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연애의 시작과 끝, 그 사이 두 사람의 온도차, 그리고 두 여성의 삶의 고단함을 담담하고 세심하게 담았다. -윤혜지
올해의 인기상_ <최악의 하루> <춘몽>의 한예리
배우 한예리의 2016년은 무수한 구애의 연속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최악의 하루>의 은희. 배우 지망생 은희는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 신인배우이자 남자친구인 현오(권율), 과거의 남자 운철(이희준)을 차례로 남산 일대에서 만난다. 세 남자는 은희의 이름을 반갑게, 익숙하게, 애타게 부르지만 은희는 걷고 또 걸으면서 최악의 하루가 어서 지나가길 바란다. 자고로 사람은 인연을 잘 맺고 잘 정리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한예리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라 <춘몽>에서도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세 남자 익준(양익준), 정범(박정범), 종빈(윤종빈)의 애정을 한몸에 받게 된다. 그녀의 곁을 배회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았으니, 올해의 인기상에 한예리의 이름을 적는 게 마땅해 보인다. -이주현
올해의 탈조선_ <홀리워킹데이> <그물>
헬조선의 청년들은 탈조선을 꿈꾼다. 다큐멘터리 <홀리워킹데이>의 네명의 청년들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그곳에서 인생에 약이 될 만한 무언가를 얻고자 애쓴다. 하지만 ‘워홀러’들의 노동력은 딸기 농장과 양파 농장에서 시연될 뿐이다. 워홀러들의 고생담은 곧 청년 세대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로 이어진다. <홀리워킹데이>의 청년들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처절하게 탈조선을 감행하는 인물이 여기 또 있다. <그물>의 철우(류승범). 북한의 어부인 철우는 그물이 모터에 걸려 의도치 않게 남으로 떠내려오고 간첩으로 오해받는다. 남한을 뜨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는 결국 귀환으로 이어지지만 북한의 현실이 남한보다 나을 것은 없다. 한국이 싫어서 탈조선을 감행해도 마땅한 답을 찾기 어려운 현실. 이러려고 국민 된 거 아닌데…. -이주현
올해의 패밀리_ <철원기행> <사돈의 팔촌> <달에 부는 바람>
가족이란 말만큼 양가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게 또 있을까. 기타노 다케시는 ‘누가 보지 않으면 갖다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라 했는데, <철원기행>의 인물들은 아마 기타노의 말에 일정 부분 동감할 것이다. 자신의 정년 퇴임식날 폭탄 발언하듯 이혼 소식을 전한 아버지, 그 소식에 당황하는 어머니, 이 상황이 불편하기 그지없는 큰아들 내외와 작은아들은 폭설로 인해 2박3일간 함께 시간을 보낸다. 가족 공동체라는 운명 때문에 난관에 부딪혀야 하는 커플도 있다. <사돈의 팔촌>의 태익과 아리는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사촌지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금기의 선 앞에서 고민한다. 가족이기에 불가능한 것이 있는가 하면 가족이기에 가능한 기적도 있다. 다큐멘터리 <달에 부는 바람>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딸과의 소통을 간절히 바라는 엄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국 가족은 사랑이다. 사랑하니까 싸우고 사랑하니까 노력해야 한다. 이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을 올해의 가족으로 명한다. -이주현
올해의 할머니들_ <죽여주는 여자> <물숨> <할머니의 먼 집>
탑골공원에서 박카스를 들고 서 있는 할머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할머니, 수십년 동안 제주 바다에서 물질하는 할머니…. 올해도 무수한 할머니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파문을 일으켰다. <죽여주는 여자>가 노년의 삶과 죽음을 인정 많고 자기 삶에 떳떳한 박카스 할머니 소영(윤여정)을 통해 도발적으로 극화했다면, 다큐멘터리 <할머니의 먼 집>은 할머니의 자살 소식을 듣고 할머니에게 달려가 그 곁을 지키기로 한 손녀(이소현 감독)의 뭉클한 기록이다. 매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야 하는 제주 해녀들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물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굽은 등, 질긴 생명력과 욕망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게 해주었다. 올해의 할머니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