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6일 촛불집회가 열린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는 ‘안남대 리볼버과’ 깃발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안남대? 리볼버는 그 연발 권총? 깃발 로고 아래로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대문자 ‘JOSHINA BANGBANG’. 발음대로 읽으니 ‘조시나 뱅뱅’. 스무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자 그들 중 한명이 하야 피켓을 나눠준다. 피켓 한쪽에는 “박근혜 밖으로 나와!!! 야… 으뜩하냐…? 근혜야… 이 미친 새끼야…”라는 문구가, 반대쪽에는 “박근혜 밖으로 나와!!!”가 적혀 있다. 제법 호방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문구 아래로 보이는 안남시민연대. 마침 누군가가 “박성배 위의 위가 최순실”이라고 말한다. <아수라>에서 “천당 위의 분당, 분당 위의 안남”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뉴타운을 건설하려는 박성배(황정민) 안남시장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 또한 ‘박근혜 게이트’의 공범이자 주범인 최순실과 엮였을 거라는 상상에서 나온 재치 넘치는 표현이다. 잠깐만, 기자가 하고 있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면 당신은 ‘아수리언’일 가능성이 높다. 몰랐다면 걱정할 것 없다. 지금부터 알아가면 된다.
너는 성골 아수리언이냐
아수리언? 영화 <아수라>라면 환장할 지경에 이르는 팬들을 일컫는 말이다. 반복 관람은 기본이다. 아수리언들 사이에서 관람 횟수에 따라 계급도 나뉜다. 극장에서 5번 이상 본 관객은 성골, 4번 이하는 진골, VOD 관람은 6두품이다. 불법 다운로드로 봤다면 당신은 사람이 아니다, 개, 돼지다. 이처럼 트위터에서 아수리언들은 극장에서 내려진 <아수라>를 계속 소환하고 있다. 한도경(정우성)의 대사 “으뜩하냐… 선모야… 이 미친 새끼야…”를 하야 피켓 문구로 패러디하는 등 명대사나 특정 장면을 현실과 연결을 짓는다(앞의 “좆이나 뱅뱅”도 한도경의 대사다).
지난 11월20일 아수리언들은 CGV대학로의 한 상영관을 대관해 ‘안남시민의 밤’이라는 이름의 상영회도 열었다. 한도경이 이민섭을 납치하라고 한 박성배의 지시를 녹음해 김차인에게 증거로 제출해야 하는 운명의 날짜가 11월 20일이다. 행사에 참석한 아수리언들은 안남시민등록증, 김차인 검사 명함(진짜 검찰 명함이다), “송월타월로 제작된” 안남시 메트로폴리스 사업발표회 수건 등 <아수라> 관련 굿즈를 선물로 받았다. <아수라>를 연출한 김성수 감독, 배우 정우성, 제작사인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가 행사에 참석했다. 아수리언들 사이에서 ‘연기의 신’이라 추앙받고 있는 정우성은 “여러분, 다들 미쳤어요?”라고 물었다. 정우성이 참석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아수리언들은 정우성에게 극중 대사 “박성배, 앞으로 나와!”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정우성은 대사를 하다가 박성배 대신 “박근혜, 앞으로 나와!”라고 외치며 아수리언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트위터 계정이 ‘박성배의 위태로운 넥타이’인 아수리언은 단관 행사를 기획한 이유를 설명했다. “뉴타운 발표장에서 박성배가 ‘무슨 동네요?’라고 물으면 청중이 작은 소리로 ‘부자동네!’라고 대답하고, 박성배가 ‘안 들립니다, 무슨 동네요?’라고 다시 물으면 청중이 큰소리로 ‘부자동네!’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그 대사를 일반 상영관에서 따라하면 아무래도 민폐라 극장을 대관해 아수리언들과 함께 외치고 싶었다.”
‘덕질’의 출발은 언제나 사심이다. <군함도> 막바지 촬영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황정민은 “그 명대사를 아수리언들과 함께하지 못해 아쉽다”고 전했다.
트위터 계정이 안남시 여성회관인 아수리언은 당시 분위기가 “부흥성회 같았다(웃음)”나. 대체 이들이 <아수라>를 이토록 열광하며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수리언마다 <아수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누구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은 나쁜 놈들을 폭력으로 처단하는 데서 오는 쾌감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카체이스 신만으로도 한국 영화사의 한획을 그은 작품”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죽이고 싶은>(2009), <원더풀 라이프>를 연출한 조원희 감독은 자신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 촬영 때문에 <아수라>를 개봉 때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을 무척 후회했다. 그는 “<아수라>는 ‘어딘가 좀 이상하게 뒤틀려 있지만 뛰어난 부분이 존재하는’ 영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각본부터 파이널 믹싱까지, 기획부터 캐스팅까지 어느 한 부분도 힘이 없는 부분이 없는 절대 ‘개’명작”이라며 “영화가 전혀 이상하지 않다. 노멀하다. 김성수 감독이 어떤 경지에 이르러 영화의 신이 된 것뿐”이라고 강력하게 지지했다. 몇몇 평론가나 <아수라>를 지지하지 않는 관객 사이에서 여전히 “알탕 영화”나 “과대 포장된 폭력영화” 같은 비판이 적지 않지만, 아수리언들 사이에서 <아수라>는 “모든 장면이 명장면”이고, 그래서 “신들이 만든 영화”(김성수 감독은 영화의 신, 정우성은 연기의 신, 이모개 촬영감독은 촬영의 신, 이재진 음악감독은 음악의 신, 김상범 편집감독은 편집의 신이라 불린다)라고 생각한다.
아수리언들은 트위터 같은 SNS에서 대사나 장면을 패러디하고, 단관을 진행하며, 영화 관련 굿즈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영화의 배경이자 가상 공간인 안남시를 온라인 네트워크로 끄집어내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처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가상의 공간에 자신이 만들고 싶은 도시를 건설하는 게임 <심시티>처럼 말이다. 안남시는 실제 도시처럼 매일 성장하고 있다. 모든 지자체가 그렇듯이 안남시청 홈페이지(http://iannam.net)가 생겼다. 트위터 계정이 ‘안남시청 정보통신과’인 아수리언이 <아수라> VOD에서 안남시청 로고를 따서 만든 것이다. “시청 홈페이지에 (재개발 관련) 게시물이 500개나 달렸다”는 박성배의 대사를 재현하기 위해 아수리언들은 안남시청 홈페이지 시민게시판에 들어가 게시물 500개를 남겼다(지금은 홈페이지가 ‘재개발’되고 있어(공사 중) 게시물을 찾아볼 수 없다). 또 얼마 전에는 안남시 전입시험도 치렀다(문제지를 입수해 실었으니 한번 풀어보시라. 난이도가 만만치 않아 쉽게 들어가 살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덕력은 현실 세계를 향한다
시청 홈페이지 하단 오른쪽에는 안남시 여성회관, 안남시체육회, 안남문화재단, 국립 안남대학교, 안남시의회 같은 트위터 계정이 바로가기 서비스에 연결돼 있다. 안남시 여성회관은 “안남시에서 무언가를 만든다면 여성회관을 설립하고 싶다. 여성 복지를 좋아하기도 하고, 2000년대 초·중반 이후로 지자체마다 신설해 스포츠센터, 여성창업개발, 지역(산후, 돌봄, 가사)도우미 같은 복지를 담당하고 있다”고 안남시 여성회관 트위터 계정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이 밖에도 안남 퀴어타운, 안남 시립도서관, 안남공인회계사회, 안남수도사업본부, 안남 시민일보, 안남시립미술관 등 어느 도시에서나 있을 법한 다양한 계정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김성수 감독은 “이분들이 안남시를 끄집어내는 솜씨를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촬영 전, 장근영 미술감독, 이모개 촬영감독과 함께 안남시가 어디에 있는 도시인가부터 어떤 색깔의 공간인지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며 미장센을 만들었는데, 아수리언들이 안남시라는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독창적으로 해석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등장인물에 감정이입해 ‘팬심’(fan心)을 드러내는 보통의 영화 팬들과 달리 아수리언들은 안남시를 <아수라>의 세계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보다 배경에 더욱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고있는 것도 그래서다.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이들이 자신의 ‘덕력’을 온라인 세계에만 쏟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매주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펄럭이는 안남대 리볼버과와 안남시민연대 깃발은 온라인 네트워크에서만 존재하던 안남시가 오프라인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방증이다. 이들이 깃발을 들고 광화문으로 나오기까지는 꽤 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여러 시민단체들이 시국선언을 냈을 때 아수리언들 사이에서 안남대학교 이름으로 함께해야 하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었다. 팬덤 문화도 정치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어떤 아수리언이 안남시민연대를 해시태그로 붙여 영화 대사를 인용해 박근혜 게이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수리언들도 동참했다. 박근혜와 최순실이 안남 시민 48만명의 명예와 긍지를 훼손시켰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단체로 광화문에 나가게 된 것이다.
“안남 시민(아수리언) 대부분이 20, 30대다. 민주화 이후 세대들이다. 온갖 부정부패와 비리는 전 세대들에게는 당연한 풍경이지만, 우리는 살면서 그런 풍경을 본 적 없다. 세월호 같은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도 사회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작동할 거라고 믿었다. 영화 속 박성배 같은 사람이 할 법한, 우리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부정부패들 때문에 <아수라>와 현실이 더욱 조응하게 되는 것 같다”는 게 안남시 여성회관의 설명이다. 그들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영화 대사를 패러디한 문구가 적힌 피켓을 집회에 나온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시민들은 안남대학교니 안남시민연대니 그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하다가도 피켓 내용을 보고 재미있어했다.
아수리언들의 <아수라> 사랑은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도 그들은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를 가로지르며 덕질을 하고 있다. 이들은 내년 9월28일에 <아수라> 개봉 1주년 기념 단체관람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2차 안남시 전입시험도 곧 나온다. 안남시 관련 굿즈도 공동구매되고 있다. 고백을 하나 하자면 기자도 안남 시민이 되었다. 기사를 준비하면서 아수리언에게 너무 몰입한 탓이다. 트위터에 새 계정 ‘안남시 씨네 21’도 만들었다. 안남시에 <씨네21>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고민에서 내린 결정이다. 프로필이 아직 달걀이니 ‘금손’ 안남시 디자인공무원의 도움이 절실하다.
‘영화의 신’ 김성수 감독 인터뷰
언제나 영화학도의 마음가짐으로
아수리언들 사이에서 김성수 감독은 ‘영화의 신’이라 불린다. 김성수 감독도 자신의 별명을 잘 알고 있다. “30년 동안 영화를 하면서 아직도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팬들께서 재미로 그렇게 불러주시는 것 같은데 영화의 신이라니 과분하다. 앞으로 잘해야 할 텐데. 허허허.” 김성수 감독은 아직도 아수리언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아수리언들은 재미로 그런 별명을 붙인 게 아니다. 정말 그가 영화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평소 SNS를 하지 않는 그가 아수리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배우 정우성과 한재덕 사나이픽처스 대표가 알려주면서다. “처음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을 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날 PD가 11월20일에 대관 시사를 한다고 알려왔다. 어떤 사람이 대관까지 하나 무척 신기했다.” 그는 한재덕 대표, 다른 일정까지 취소한 정우성과 함께 극장에 미리 가서 아수리언들이 오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상영이 시작되자 긴 대사를 억양, 악센트까지 다 외워서 따라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무척 감동받아 뒤풀이 자리까지 따라갔다.” 아수리언의 <아수라> 사랑은 흥행에 실패한 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아수라>를 처음 시작했을 때 한재덕 대표를 포함해 배우, 스탭들에게 내 생각대로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동료들이 나를 믿어준 덕분에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었다. 땅에 묻힌 <아수라>를 끄집어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김성수 감독은 내년에도 팬들이 단관 행사를 열면 참석하겠다고 밝혔다. “불러만 주시면 무척 영광이다. 내년에는 출연배우들과 함께 참석하고 싶다.
‘연기의 신’ 정우성 인터뷰
1주년 단관행사 한다면 함께하고 싶다
정우성은 아수리언들 사이에서 자신이 ‘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쑥스러워했다. “감사하다. <아수라>에 대한 애정에서 파생된 표현인 것 같다. 제 모든 연기를 보지 못한 세대의 친구들인 것 같은데….” 김성수 감독이 그랬듯이 정우성 또한 아수리언의 존재를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영화를 즐기고 향유하는 방식이 되게 새롭고 진보적이었다. 아수리언들이 만든 안남시 홈페이지(http://iannam.net/)에도 들어가봤다. 시민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불편함같은 것들을 우회해서 표현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는 아수리언들이 자신의 팬클럽과는 다른 점이 많다고 말했다. “제 오랜 팬들은 ‘배우 정우성’을 넘어서서 ‘인간 정우성’에 대한 애정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반면 아수리언들은 <아수라>와 한도경 캐릭터에 냉정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도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사회를 읽어내는 것 같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한도경은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래서 관객이 좋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지 않나. 아수리언들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에게 많은 연민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안남시의 세계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캐릭터들을 바라보는 것 같다.” 정우성에게 <아수라>는 여전히 “애정이 많은 작품”이다.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미운 오리새끼 같은 대접을 받았지만, 작업한 사람 중 한명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 내년에 <아수라> 개봉 1주년 단관 행사가 열린다면 그 역시 기꺼이 참석하고 싶다고 한다. “정식으로 초대받지 않아도 몰래 극장에 찾아가 소중한 자리를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