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북미나 일본에 버금가는 애니메이션 강국이지만 우리에겐 아직 미지의 세계에 가깝다. 작가주의 성향을 지닌 단편 작품은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을 중심으로 해외에서도 이미 익숙하지만 극장용 장편애니메이션의 경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한편으론 그래서 이색적이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페르세폴리스>(2007)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JSBC 프로덕션의 세 번째 장편애니메이션이다. 프랑스 그래픽노블 작가 자크 타르디의 원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시작된 이야기는 <설국열차>의 원작자 뱅자맹 르그랑이 각본으로 참여하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발전한 1941년의 프랑스 파리, 불사의 약을 개발 중이던 한 과학자 부부가 정체불명의 세력에 납치된다. 사고 과정에서 할아버지도 실종되며 홀로 남겨진 딸 아브릴(마리옹 코티야르)은 말하는 고양이 다윈과 함께 거리를 떠돌며 생활한다. 비밀 아지트를 꾸리고 부모님이 남겨둔 연구를 이어받아 진행 중이던 아브릴은 정부와 정체불명의 세력에 동시에 쫓기는 처지에 놓인다. 자신을 추격하는 무리가 부모님을 납치한 이들과 같은 세력임을 직감한 아브릴은 정부요원을 피해 이들의 아지트를 거꾸로 추격하기 시작한다.
<아브릴과 조작된 세계>는 대체역사물의 하위 장르인 스팀펑크의 연장에 있다. 크리스티앙 데마르 감독은 실제로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1988), <스팀보이>(2003)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으며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쥘 베른의 소설 <해저 2만리>의 상상력과 맞닿아 있는 지점들이 꽤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상상력이 발현되는 방식이다. 1940년대 가상의 파리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모험은 파리라는 공간 특유의 고전적 분위기와 기발한 상상력이 결합해 새로운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이중으로 들어선 에펠탑이나 하늘을 나는 증기기관차 등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 탓에 재와 먼지로 가득한 파리의 풍경은 친숙함과 이질감을 동시에 안긴다.
대세가 된 3D CG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손그림 고유의 질감을 살린 작화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단순히 규모를 늘리고 눈을 현란하게 하는 방식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전체적인 톤과 상상력으로 디테일을 채워나가는 점이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저력을 증명한다. 특히 매력적인 건 블루와 그레이톤이 절묘하게 뒤섞인 색감이다. 먼지로 가득한 우울한 미래를 표현하는 회색빛 파리의 전경은 조화로운 색 조절로 분위기를 지배한다. 자크 타르디의 원화를 움직이는 그림으로 보는 기분이다. 이야기 이전에 단 한장의 그림으로 상상력을 북돋우는 작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리옹 코티야르, 장 로슈포르 등 프랑스 유명배우들의 안정적인 목소리 연기도 완성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양날의 검과 같은 과학의 위험성, 인간의 이기심과 환경 문제 등 묵직한 주제를 던지는 가운데 상업애니메이션으로서의 보편적인 즐거움도 잊지 않는 균형 잡힌 작품이다.
한줄 포인트 익숙한 이야기, 이색적인 표현, 참신한 상상력의 결합.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사샤의 북극대모험> 감독 레미 샤예
프랑스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세르크블루의 장편애니메이션. 실종된 할아버지를 찾아 북극 세계를 탐험하는 러시아 귀족 소녀 사샤의 이야기를 그린다. 2015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발 관객상, 2016년 도쿄애니메이션페스티벌 그랑프리 수상작으로, 그림책을 보는 듯한 파스텔톤 작화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일무이한 작화가 곧 이야기가 되는 작품. 12월14일 디지털 개봉을 하니 다양한 개성의 작품을 접하고 싶다면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