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운명과 분노>
2017-04-18
글 : 김수빈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펴냄

첫눈에 사랑에 빠진 남녀가 있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밤의 해변에서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부부가 된 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여자다. 무명배우인 남편은 아내의 지지와 조언에 힘입어 극본가로 진로를 바꾸고 승승장구한다. 남자는 인생의 반전을 만들어준 아내를 당연히 운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침묵해온 여자는 생각이 다르다. 두 인간이 걸어온 세계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소설은 남자와 여자의 생애를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운명’은 남편 로토의 시점에서 쓰여진 얘기다. 로토는 플로리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와 고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다. 아버지의 죽음 후, 잠시 탈선에 빠지지만 연극에 눈을 뜨며 다시금 생의 의지와 자존감을 되찾는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연극을 올리던 날, 주인공 햄릿을 연기하던 로토는 아내를 만난다. 한편 2부 ‘분노’는 아내 마틸드의 시선에서 진행되며, 1부에서 부부가 마주한 비극의 전모를 드러낸다. 오렐리는 4살 때 부모에게 버림받고 매춘부로 일하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다. 11살이 되던 해,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오렐리는 스스로 이름을 마틸드로 바꾸고 불우한 삶을 헤쳐나간다. 그가 삶을 살아온 동력은 ‘분노’다.

로맨스와 미스터리 장르를 오가는 소설 <운명과 분노>는 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이 인생을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지를 그려낸다. 남성 위주의 성공 신화에 가려진 무명인 여성들의 이야기가 로토와 마틸드의 사연을 통해 재현된다. 주인공의 삶에서 연극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만큼 현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지문은 작품이 가진 운명론적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요소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피플>과의 인터뷰를 통해 2015년 최고의 소설로 이 책을 꼽았다. 이외에도 ‘아마존’에서 선정한 ‘2015년 올해의 소설 1위’로 꼽히고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운명, 엇갈림, 분노

결혼, 서로 다른 부분들이 만나는 결합. 로토는 소란스럽고 빛으로 가득했다. 마틸드는 조용하고 신중했다. 로토쪽이 더 나은 반쪽,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쪽이라고 믿기 쉽다. 그가 지금껏 경험한 모든 것이 마틸드를 향해 차곡차곡 쌓여간 것은 사실이다. 그의 삶이 그녀가 나타난 그 순간에 대비해 그를 준비시키지 않았다면, 그들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16쪽)

그녀는 환한 조명 아래보다, 밝은 사건들보다, 소소한 일상에서 삶을 더 많이 발견했다. 텃밭의 흙을 수백번 일구었는데도 매번 삽이 흙을 비집고 들어갈 때마다 기분좋게 느껴지는 이 행위, 이 잦은 동작, 압력을 가하고 흙이 풀어지면서 퍼지는 이 진한 냄새. 체리 과수원에 지어진 이 시골집에서 그녀가 발견하는 따스함을 설명해주는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혹은 이런 것도 있다. 그들은 매일 같은 곳에서 눈을 뜨고, 남편은 커피 한잔으로 그녀를 깨운다. 블랙커피에 넣은 크림은 아직 소용돌이처럼 빙빙 돈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이런 다정함. (중략) 이런 말없는 친밀함이 그들의 결혼생활을 이루었다.(5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