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유럽 내 아시아 장르영화를 소개하는 가장 큰 규모의 영화제 제19회 우디네극동영화제를 가다
2017-05-10
글·사진 : 정지혜 (객원기자)
영화를 통해 꿈꾸고 여행하다

알록달록한 장식으로 꾸민 누오보 지오바니 극장 로비에서 관객이 영화를 기다린다.

강수연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홍콩영화 <뱀파이어 클린업 디파트먼트>의 조선항, 견백영 감독(왼쪽부터). 귀신을 쫓는다는 홍콩 부적을 들어 보인다. 강수연 위원장은 “2000년에 출연한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우디네를 처음 방문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영화에 이토록 애정을 가져준 영화제가 흔치 않다”고 전했다. 사브리나 바라세티 우디네극동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강수연의 <씨받이>가 리마스터링되면 우디네극동영화제에서 꼭 상영하고 싶다”고 전했다.

지난 3월 홍콩필름마트 취재를 다녀온 직후 초대장을 하나 받았다. 우디네극동영화제의 사브리나 바라세티 집행위원장과 토마스 베르타크 프로그래머로부터 우디네극동영화제에 초대한다는 정중하고 정겨운 말이었다. 홍콩필름마트에서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났을 때 우디네극동영화제를 경험한 한국의 영화인들이 ‘꼭 한번 가봐야 할 귀한 영화제’라는 추천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들을 옮긴 것이 호신호가 돼줬던 것이다. 홍콩필름마트가 아시아와 유럽 영화인들의 만남의 기항지가 돼주고 있다는 말이 그대로 체감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 한번 영화로 이어지는 인연을 좇아 이탈리아로 향했다. 4월 21일부터 9일간 열린 우디네극동영화제의 전반부를 취재하고 돌아와 이 글을 쓴다. 올해로 19회째를 맞은 우디네극동영화제는 유럽 내 아시아 장르영화를 소개하는 가장 큰 규모의 영화제다. 베네치아 마르코 폴로 공항에서 차로 1시간10여분을 달리면 도착하는 인구 10만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우디네. 어떻게 그곳에서 아시아영화가 이탈리아와 유럽의 관객을 사로잡고 아시아의 관객과 만나는 자리가 마련됐을까. 그 답은 오직 영화만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 알프스 산맥이 내다보이는 4월의 우디네는 그야말로 빛의 호위 아래 있었다. 야트막한 적벽의 집들 사이로 이탈리아 특유의 좁은 길이 이어지고, 도시의 곳곳에는 지중해와 알프스의 영이 깃든 푸르른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몸을 세운다. 따스하나 따갑지 않은 햇빛이 쏟아지면 이내 모든 게 선명해진다. 그 빛의 기운이 우디네극동영화제의 주 상영관인 우디네 누오보 지오바니 극장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로비로 들어가 고개를 들어올리면 천장의 창문으로 빛이 내리는 걸 볼 수 있다. 그 빛을 품고 우디네극동영화제의 개막식 준비가 한창이다. 영화제라고 하면 흔히 볼 수 있는 레드카펫이나 포토존, 영화제 상영작들의 커다란 걸개형 포스터는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직 공식 포스터 하나만이 상영관 입구에 큼지막하게 걸려 있을 뿐이다. 올해의 슬로건은 ‘Join the Tribe’, 올해의 이미지는 붉은 닭과 아시아의 여인이다. 그 의미는 영화제 홍보 스탭인 샤론 리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우디네극동영화제가 워낙에 격식을 따지지 않고 게스트와 관객이 친구처럼, 가족처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로 유명하다. ‘하나의 무리, 가족이 돼보자!’는 의미다. 닭은 아시아의 12간지에 따라 닭의 해를 상징한다.” 영국에서 동남아시아 스탭들과 영화 제작을 진행하고 있는 프로듀서 아제이 라이 역시 “보타이에 드레스를 차려입은 영화인들을 전혀 볼 수 없는 곳이다. 캐주얼한 차림만큼이나 영화를 보는 태도도 즐기면서, 흥겹게 보고 이야기한다. 이탈리아 현지 관객의 생생한 반응을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영화제”라며 네 번째 방문의 이유를 설명한다. 격 없는 영화제의 신나는 분위기를 직접 눈으로 목격할 시간이다. 오후 7시, 로비에서는 개막 파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화제의 막이 올랐다. 영화제쪽이 게스트와 관객에게 일일이 푸른색 깃털 브로치와 다양한 색깔의 깃털로 만든 귀걸이를 나눠준다. 저마다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면서도 우디네극동영화제라는 ‘부족’의 축제의 장에 함께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오후 8시, 이탈리아산 와인과 다과를 즐기며 개막작인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서바이벌 패밀리>(올해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이기도 하다.-편집자) 상영을 기다린다. 차임벨의 알림과 함께 관객이 일제히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극장 안에는 4층까지 이어지는 1200석 규모의 오페라하우스가 눈앞에 펼쳐진다. 영화제를 위해 개방된 공간에는 거대한 스크린과 그 앞에 무대용 너른 단이 펼쳐져 있다. 바로 그곳으로 우디네극동영화제 집행위원장 사브리나 바라세티가 경쾌하게 뛰어들어온다. 핀 조명을 받고 선 그녀는 마치 무대 위에 오른 연극배우 같다. 사려깊게 게스트를 소개하면서도 크고 힘이 넘치는 제스처로 객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녀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으로의 긴 여정과 같이 영화를 통한 우리의 여정도 19년간 이어져왔다. 영화 그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여정의 길에 기꺼이 함께해준 여러분을 환영하며 다시 또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로 환대를 표한다. 그리고 열렬한 박수 속에서 개막작 상영이 시작됐다.

개막식이 진행 중인 누오보 지오바니 극장 내부.

혜영홍, 임달화, 오백이 출연한 액션영화 <미세스 케이>를 연출한 말레이시아의 호유항 감독. 혜영홍의 출연에 감사하다고 전했다. "1970, 80년대 쇼브러더스를 통해 홍콩 액션영화의 중심에 섰던 그녀의 마지막 액션영화다. <미세스 케이>가 그녀에게 완벽한 스완송이 되었길!"

영화로 경계와 장벽을 뛰어넘다

올해 우디네극동영화제는 한국, 중국, 홍콩, 일본 등을 포함한 12개국에서 온 82편을 상영했다. 그 가운데 한국영화로는 <가려진 시간> <마스터> <스플릿> <프리즌> <해빙> 등 13편이 상영됐고 이는 일본영화와 함께 가장 많은 상영 편수다. 팡호청의 <러브 오프 더 커프>, 웨이더솅의 <52Hz, 아이 러브 유>, 니시타니 히로시의 <메꽃>을 비롯해 라오스영화로는 처음으로 우디네극동영화제에 소개된 <디어리스트 시스터> 등이 눈에 띈다. 우디네극동영화제 상영작 선정의 과정이 궁금하다. 아시아 국가별로 우디네극동영화제의 자문위원에 해당하는 컨설턴트가 있다. 현지에 거주하는 영화인이거나 현지를 거점삼아 현지의 영화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영화 전문가들이다. 그들이 1차적으로 선별한 300여편의 영화를 두고 우디네극동영화제의 프로그램팀과 이탈리아 현지의 영화비평가들이 2차 선정에 들어간다. 영화제 위원장인 사브리나 바라세티와 프로그래머인 토마스 베르타크가 1년 내내 아시아 각국의 중요 영화제를 돌며 직접 영화를 보고 선별하는 건 물론이다. 홍콩필름마트,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도쿄국제영화제는 그들이 매년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바라세티 위원장은 “최고의 작품을 찾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영화를 발견하는 게 우리의 과제다. 예컨대 한국영화 중에도 블록버스터급 영화도 소개하면 좋지만 그보다는 전에 없던 스타일로 산업 내에 균열을 내는 재능 있는 신인감독들의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또한 우디네극동영화제가 시작됐던 199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는 상당한 붐업의 시기가 아니었나. 박찬욱, 봉준호 감독 이후를 대변할 새로운 영화감독들을 발견하는 것 역시 우리의 일”이라고 전한다. 최종 상영작 선정에 있어 그들이 고려하는 또 하나의 기준을 베르타크 프로그래머가 설명해준다.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장르영화를 소개하려 할 때 아시아 영화산업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반영한 영화들에 주목한다. 한국의 정치적 순간이나 모멘텀을 포착한 작품이 대표적이다. 엄태화 감독의 <가려진 시간>은 3년 전 한국에서 거대한 배가 침몰한 사건을 떠올리게 하며 그로부터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들꽃영화상 집행위원장인 달시 파켓과 영화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국제 컨설팅을 맡고 있는 조은정 PIC 실장이 우디네국제영화제에 한국영화를 추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제에서 만난 달시 파켓은 “한국에서의 흥행 성적을 떠나 만듦새가 좋은, 저평가된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디네 관객의 적극적인 피드백을 받은 감독들이 엄청난 에너지와 힘을 얻고 돌아가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계기가 되더라. 예년에는 <4등> <우리들> <범죄소년> 등 저예산 한국독립영들도 소개됐다. 그런 기회가 더 많아지길 바라본다”고 말한다. 실제로 관객은 상영 내내 극의 흐름을 좇아 감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가 하면 영화가 끝나면 모두가 큰 박수를 보내는 게 영화제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또한 우디네극동영화제는 심사위원이 따로 없고 관객이 직접 투표에 참여해 뽑은 관객상만이 있다. 올해는 일본의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클로스 닛>이 최고 관객상과 함께 시네필 전용 패스인 ‘블랙 드래곤 패스’를 지닌 관객 투표에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꼽혔다. 한국 최국희 감독의 <스플릿>과 창감독의 <계춘할망>이 나란히 관객상 2, 3위에 올랐다. 지난해 <오빠생각>이 관객상 1위를 한 데 이어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제 후반부에는 포커스 아시아 섹션을 통해 프리 프로덕션 중인 아시아, 유럽의 13작품이 제작, 배급, 투자자와 미팅을 갖는 자리도 마련됐다. 3년째 이어져오는 다큐멘터리 섹션에는 <올드보이>(감독 박찬욱)에 관한 다큐멘터리인 <올드 데이즈>(감독 한선희)가 상영됐고 회고전 섹션에는 2월 타계한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살인의 낙인>(1967) 등이 상영됐다. 우디네극동영화제는 <아부시반금련>(2016)을 들고 영화제를 찾은 펑샤오강 감독에게 평생공로상을 전달하며 깊은 우정을 나눴다. 6만여명의 관객과 영화인들이 올해의 영화제를 즐겼다. 바라세티 위원장과 베르타크 프로그래머는 “영화를 보고, 토론하고, 영화를 통해 꿈을 꾸는 이곳이 진정한 영화의 섬이 되길! 영화로 경계와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시민적 덕성(civility)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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