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③ 최규학 전 문화체육관광부 기획조정실장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은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
2017-05-29
글 : 김성훈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아는 선에서 다 얘기하겠다.” 1급 공무원이었던 최규학 전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기획조정실장은 전화기 너머로 “허허” 하고 웃었다. 2014년 9월 당시 ‘김용삼 문체부 종무실장, 신용언 문화콘텐츠산업실장과 함께 유진룡 문체부 장관, 조현재 문체부 차관에 동조해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의 적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성분불량자’로 분류돼 사직서 제출을 요구받아 31여년 만에 공직 생활을 ‘강제로’ 끝내야 했던 그다. 그의 실직은 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인사 학살’인 셈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모태펀드 블랙리스트 취재 때문에 전화 통화만 주고받다가 약 5개월 만에 만나 안부 인사부터 나눴다.

-요즘 광주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들었다.

=정부의 문화 정책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다. 개괄적인 내용부터 변천사, 예산 수립 절차, 외국 사례와의 비교 같은 것을 다룬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공소장에서 처음 언급된 시기가 2014년 7월이다.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의 적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성분 불량자로 분류돼 조만간 인사 조치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 이에 대한 분위기를 감지했나.

=업무 때문에 만난 청와대 행정관들이 그런 얘기를 해줬다. 다른 국장들이 나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을 문체부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말을 하더라고 말이다.

-당신을 포함한 실장 3명이 불이익을 예상하고도 블랙리스트 실행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조현재 차관이 블랙리스트 명단을 보고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문제가 발생하면 논의를 하고 사회적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일방적으로 어떤 사람이 가진 성향을 이유로 배제해버리는 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문화 정책과 대치된다고 말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기본적으로 지향했던 문화 정책은 ‘문화 융성’이다. 문화의 가치를 모든 사회 영역을 아우르는 기본 가치로 뿌리내리자는 취지였는데, 블랙리스트 명단 작성은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박근혜 정권이 자행한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는 이명박 정권의 문화권력균형화전략에서 예견된 사태인데.

=조희문 영화진흥위원장(이하 영진위) 시절에도 영화인들과 갈등이 많았다. 하지만 MB 정권에서는 영화인들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까닭에 영화인 출신인 김의석 위원장이 취임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엔 영화인들과 소통도 잘됐다.

-청와대에서 정부가 불편해할 만한 작품을 거르라는 지시가 내려왔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박근형 연출가가 각색과 연출을 맡고, 국립극단이 제작한 연극 <개구리>가 시작이었다. 박정희·박근혜 전 대통령 부녀를 풍자한 연극을 무대에 올려도 되느냐는 이야기가 위(청와대)에서 내려왔고, 많이 혼났다. 그땐 유야무야 넘어갔다. 영화 <변호인>(2013) 엔딩 크레딧에 문체부가 올라가면서 김기춘 실장이 유진룡 장관에게 눈총을 많이 준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문체부가) 크레딧에 빠지게 됐다.

-2013년 <설국열차>가 런던 한국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가 변경되는 일도 있었는데.

=아마 그 영화제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석해서 청와대에서 그런 조치를 취한 것 같다. 원래 CJ를 불편해하기도 했고. 해외에서 영화제를 하게 되면 영화선정위원회를 만드는데, 대부분 현지 영화 관계자들이 참여한다. 한국영화프로모션을 위해 1~2명 포함되는 문화원 직원들이 목소리를 내서 작품을 빼고 넣기가 쉽지 않다고 설명하며 위에서의 지시를 무마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문체부 내부 분위기는 어땠나.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하자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끼리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2014년 9월 18일 당시 김희범 문체부 1차관으로부터 “상부 지시다, 사직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어땠나.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7월부터 명단 이야기가 나오고, 뒤에서 업무 감찰도 이루어진 직후였다.

-사직서를 떠밀려 써야 하는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던가.

=당연히 아쉽고 가슴이 찢어졌다. 문화 정책을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회를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의기투합해서 열심히 했다. 유진룡 전 장관은 문체부 최초로 밑에서부터 그 자리까지 올라간 케이스라 그를 성공한 장관으로 만들어 공무원들의 모범을 만들어보자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유 전 장관이 그만두면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 됐다.

-모태펀드 외부 전문가 풀 명단에도 올라가 있더라. 아마도 문체부 재직 경력이 반영된 게 아닌가 싶다. 모태펀드 외부 전문가 풀은 누구로부터 어떻게 제안을 받아 활동하게 되었나.

=한국벤처투자에서 전화가 왔다. 향후 투자를 위한 분석 회의를 하는데 의견을 좀 달라고 말이다. 그 뒤, 창투사에서 다시 연락이 오면서 참여하게 됐다.

-외부 전문가 풀 활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 정부 기관이 불편해할 만한 작품을 걸러내는 과정도 있었나.

=여러 편 중에 몇편을 고르는 게 아니라 이미 선정된 작품들에 대해 논의하는 식이었다. 수익을 낼 만한 작품에만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영화 외에 VR 회사 투자 건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영화인들은 “모태펀드의 각 계정이 해당 행정 부처로 이관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행정 전문가로서 이 요구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나.

=기업들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실질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운영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성을 가진 기관에서 운영하는 게 맞는 거 같기는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얘기하기는 곤란하다.

-공무원들이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는 건 어려울까.

=그게 쉽지 않다. 그런 지시는 보통 구두나 특별한 모임을 통해 전달된다. 다만 헌법이 말하는 바에 대해 공무원들이 명확한 생각을 갖고, 그에 비추어 자기 일을 해내는 상식적인 시민 의식을 갖췄으면 한다. 또한 블랙리스트 건 등에 대해 법적인 조치가 제대로 내려져서 역사가 만든 교훈으로 남았으면 한다.

-장관과 기관장 인선을 앞두고 영화계는 새로운 영진위 위원장이 누가 될지 관심이 많다. 영진위 위원장만큼은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은데.

=당연하다고 본다. 현장에서의 평가를 통해 추대가 되고 지도자로서 오피니언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을 책임자로 임명해야 한다.

-지난해 겨울, 매주 촛불시위에 나갔다고 들었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고 만들어가고 있구나, 또 나이 드신 분들이나 가족 단위로 오는 경우도 많아서 이번에는 정말 다른 세상이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재인 정부가 당신을 포함한 3인방에게 다시 문체부로 돌아와 달라고 한다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웃음) 직장을 나오기 전에는 균형 잡힌 시각에서 보려고 했는데 그 이후에는 그럴 자신이 없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회를 보고 윗사람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만약 그런 지시가 또 내려오면 그때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트라우마가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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