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근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를 지키는 시민문화연대 공동대표에게 지난 5월 19일은 “가혹한” 하루였다. 새벽에는 김지석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고, 오후에는 이용관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의 항소심 재판을 방청했기 때문이다. 1996년 김지석, 이용관 두 사람과 함께 부산영화제를 창립한 멤버로서 그의 마음은 매우 착잡했을 것이다.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이었고, 대선 기간 문재인 대통령의 부산선거대책위원회 부산영화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그에게 부산영화제 정상화와 부산지역 영화산업 기반 조성 두 가지 과제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의 장례 준비 때문에 경황이 없음에도 그는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고발과 기소는 박근혜 정권의 정치적 보복과 탄압의 결과”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칸국제영화제에서 세상을 떠난 고 김지석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과는 각별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상심이 클 것 같다.
=김지석은 고등학생 때부터 영화 이야기로 면을 튼 뒤 줄곧 단짝 친구로 지낸 ‘40년 절친’이다. 생사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아직 현실의 일로 실감하지 못하고, ‘명복을 빈다’는 등의 말로 소감을 표현할 수 있는 심경이 아니다. 지금은 마음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비통할 뿐이다. 시간이 좀 지나야 제대로 추모하고 넋을 기릴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은 김지석 부집행위원장,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전양준 전 부집행위원장 등과 함께 1996년 부산영화제 창립 멤버다. 부산영화제와 관련한 김지석 부집행위원장과의 특별한 사연을 이야기해 달라.
=비사라고 할 수 있는데, 김지석의 쌈짓돈이 아니면 오늘날 부산영화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영화제를 준비할 때 돈이 거의 없었다. 당연히 부산시에서 예산이 집행되던 때도 아니었다. 이 사정을 안 김지석이 당시 사무국장이던 내게 본인의 결혼자금으로 모아두었던 500만원을 융통해주었다. 내가 행정 경험도 일천해서 제대로 증빙 처리를 해두지 않아서 나중에 공식적으로 갚을 방법이 없었고, 결국 돌려주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그 돈 500만원이 제1회 영화제 준비를 시작할 수 있는 종잣돈이었다. 그 후 김지석은 나와 토닥거릴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그 돈 이야기를 꺼내 기선을 제압했다.(웃음)
-공교롭게도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이 칸에서 영면한 5월 19일,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의 항소심 재판이 열렸다. 재판 상황은 어땠나. 쟁점은 무엇이었나.
=재판이 열렸던 날 새벽 3시쯤, 칸에서 김지석의 사망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몇분과 상황을 공유하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날이 밝아 유족에게 비보를 전하고 오후에는 재판을 방청했다. 가혹한 하루였다. 그날 재판은 증인 신문과 검찰의 피고인 추가 신문으로 결심하고 6월 23일 선고하기로 되어있다. 재판의 쟁점에 대해서는 선고 전에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났는데 항소심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나.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긍정적으로 기대한다. 다만, 분명하게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고발과 기소는 정권 차원의 정치적인 보복과 탄압이 실행된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났고, 부산영화제도 직접적인 표적이었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다이빙벨>(2014) 상영에 따른 보복으로 감사원 감사와 검찰 고발, 기소에 이은 재판까지 어떤 매뉴얼처럼 작동된 것이다. 따라서 항소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보복과 표적 탄압으로 시작된 고발과 재판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으므로, 법원의 판결과 상관없이 이 재판은 사실상 원인 무효이기 때문이다.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은 단순히 무죄가 아니라 기소 자체가 무효이며, 오히려 블랙리스트 실행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과 서병수 부산시장이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닐까?
-여러 이유 때문에 부산영화제가 안팎으로 혼란스러운데. 원인이 무엇이고, 향후 수습을 위해 어떤 방안이 있다고 보나.
=지금의 혼란은 지난해 수습 국면에서 서둘러 어정쩡하게 봉합한 결과라고 본다. 수습 방안을 논의하던 지난해 상반기만 해도,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고발과 기소 등이 <다이빙벨> 상영에 따른 정권 차원의 보복이라거나 탄압이라는 주장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이 물러나고, 김동호 이사장이 들어온 것 외에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사실상 반쪽짜리 영화제만 열린 것이다. 그런데 연말에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실상이 밝혀지고,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용관 퇴출’도 표적 탄압이었음이 드러났다. 먼저 명백한 진상 규명을 통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재발 방지를 위해 조직과 인물을 전면적으로 쇄신해야 한다. 부산영화제가 자발적으로 하지 않으면 영화계가, 부산영화제의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관객이 나서야 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새 정부도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대선 기간, 문재인 대통령의 부산선거대책위원회 부산영화특별위원회(이하 부산영화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부산영화특위는 새 정부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부산영화특위는 선거용 조직이라 큰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동시에 많은 선거용 조직과는 개념이 좀 달라서 잘하면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다. 부산영화특위에서 두 가지 정책 제안을 했다. 부산지역의 명확한 현안은 ‘부산영화제 정상화’와 ‘부산지역 영화산업기반 조성’ 두 가지다. 부산영화제 정상화는 앞에서 말씀드린 걸로 대신하면 되겠고, 다른 하나는 부산영화종합촬영소(가칭)를 빨리 건립하자는 것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지역과 산업적인 연계 방안에 관한 고민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영진위가 추진하던 글로벌스튜디오니 종합촬영소니 하는 스튜디오 건립 계획은 수년간 표류했고 아직도 제자리다. 이런 일은 문화체육관광부, 영진위, 부산시를 비롯한 정부의 정책 의지에 달린 문제다. 먼저 종합촬영소 건립 계획을 전면적으로 새로 수립해야 한다. 영화인 수십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영진위 직원이 ‘계획서’용으로 만들 게 아니라 현황과 향후 운영 방안에 대한 전략과 비전을 가진 전문가그룹이 ‘실사용자’용으로 만들어야 한다. 부산지역 전문가와 영화계가 참여해서 실질적인 계획을 만들고, 정부의 의지로 가급적 이른 시일 내 착공할 수 있도록 속도를 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부산영화특위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역할을 자임하려고 한다.
-올해 초, ‘부산국제영화제를 지키는 시민문화연대’ 등이 부산영화제 사태의 책임을 물어 서병수 부산시장을 고발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내가 검찰에 나가서 고발인 조사를 받았는데, 참 답답하다. 검찰은 고발한 쪽에서 서병수 부산시장의 혐의를 입증하라는 분위기였다. 부산시장의 어떤 언행이 법을 위반했고, 부산영화제에 어떤 손해를 끼쳤는지를 피해 당사자인 부산영화제가 입증을 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부산지역에서 공익활동을 하는 변호사 분들도 주선을 하겠다고 했는데, 부산영화제쪽에서 실무적으로 별 움직임이 없으니 잠잠하다. 이러다가 검찰이 적절한 때 슬그머니 ‘증거 불충분, 혐의 없음’ 처분을 해버리면, 서병수 부산시장에게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된다.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