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에 순위를 매기는 건 큰 의미가 없다. 편수가 워낙 많을 뿐 아니라 소설의 완성도와 영화에 대한 평가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꽤 인상적인 걸작에 못지않게 쏟아져나온 졸작도 있다. 대략 240편에 가까운 영화와 드라마 중 소설 못지않은 존재감으로 기억되는 8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팬이 아니라도 이 정도라면 보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캐리>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 1976년
사실상 스티븐 킹의 상업 데뷔작이라 할 만한 소설. 오프닝부터 샤워 신을 배치하는 등 에로틱한 분위기 속에 긴장감을 이어가지만 본질은 호러영화다. 광신도 어머니 밑에서 억압된 생활을 하던 캐리(시시 스페이섹)는 학교에서도 괴롭힘을 당한다. 졸업파티 때 다른 학생들의 계략으로 파티 여왕으로 뽑혔다가 돼지의 피를 뒤집어쓴 후 초능력이 폭주해 자연재해와 같은 참극을 벌인다. 영화 최대의 장점이 캐리 역에 시시 스페이섹이 캐스팅된 것이라 해도 좋을 만큼 스페이섹은 대체 불가한 이미지와 연기를 선보인다. 2013년 클로이 머레츠가 주연을 맡은 리메이크 버전도 나왔지만, 원작과 영화적 재창작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균형감각을 따라잡을 작품은 나오기 어렵다.
<샤이닝> 감독 스탠리 큐브릭 / 1980년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중 아마도 스티븐 킹이 가장 싫어하는 영화일 듯. 동시에 스티븐 킹 원작 영화 중 첫 번째로 손꼽히는 걸작. 소설가 잭(잭 니콜슨)이 그의 가족과 함께 인적 드문 호텔에 머물면서 벌어지는 참극을 소름끼치게 묘사한다. 원작은 잭의 아들이자 소년 대디의 초능력이 부각되는 반면 스탠리 큐브릭은 호텔의 광기에 휩싸여 미쳐가는 잭의 심리에 초점을 맞췄다. 영화사에 족적을 남길 만한 스테디캠 장면이 탄생했으며 잭은 스티븐 킹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로 꼽히기도 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스티븐 킹이 이후 직접 TV시리즈 3부작을 제작하기도 했지만 좋은 소설과 잘 만든 영화는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스탠 바이 미> 감독 롭 라이너 / 1986년
호러와 스릴러로 정평이 난 스티븐 킹이지만 사실 정통 드라마에도 일가견이 있다. <스탠 바이 미>는 스티븐 킹의 소설 <The Body>를 각색한 영화로 작은 시골 마을의 네 소년이 실종된 시체에 대한 괴담을 듣고 호기심에 모험을 떠나며 벌어지는 내용을 담았다. <The Body>는 스티븐 킹이 각 계절에 맞춰 낸 연작 ‘사계’ 시리즈 중 가을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가 자신의 유년 시절 경험을 반영했다고 한다. 리버 피닉스의 매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피의 피에로> 감독 토미 리 윌라스 / 1990년
<런닝맨>(1987), <돌로레스 클레이븐>(1994),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1998) 등 인상적인 작품이 많지만 90년대 킹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 중 한편만 더 꼽으라면 <피의 피에로>를 빼놓을 수 없다. 소설 <It>을 각색한 이 영화는 광대공포증을 극대화한 영화로 이번에 같은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다. 3권에 달하는 방대한 원작과 인물의 내면 묘사를 전부 담아내진 못해도 효과적으로 압축한 구성력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자극적인 쇼크 대신 천천히 스며들어 죄어오는 공포가 그야말로 스티븐 킹답다.
<미져리> 감독 롭 라이너 / 1990년
유명 작가 폴(제임스 칸)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고립된 지역에서 자신의 팬을 자처하는 간호사 애니(캐시 베이츠)에게 구조된다. 처음엔 자신을 정성껏 보살피는 애니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그녀가 점차 집착의 정도를 더하며 광기를 드러내자 이내 두려움을 느낀다. 광적인 팬에게 감금 후 고문당하는 작가의 모습은 스티븐 킹이 직접 꾼 악몽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하는 끔찍한 폭력이 보는 이마저 두렵게 하지만 사실 소설은 훨씬 잔혹하고 집요하다. 한정된 공간과 인물을 활용해 서스펜스의 정석을 보여주는 작품.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캐시 베이츠의 연기는 명불허전.
<쇼생크 탈출>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 1994년
스티븐 킹의 <Rita Hayworth and Shawshank Redemption>을 원작으로 했다. 원작은 106쪽가량의 짧은 소설임에도 142분에 달하는 드라마가 탄생했다. 영화가 이야기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지에 대한 모범답안.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남자가 쇼생크 교도소를 탈출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탈출극은 맥거핀일 뿐 감옥 안에서의 인간적인 교감이 관객의 마음을 적신다. 스티븐 킹 원작 영화를 줄 세우면 제일 앞자리를 다툴 걸작. 스티븐 킹이 프랭크 다라본트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게 된 작품.
<그린 마일>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 1999년
<그린 마일>은 톰 행크스를 캐스팅하는 등 공을 들였지만 아쉬운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스티븐 킹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힐 수작이다. 판타지적인 상상력과 기묘한 분위기, 감동적인 드라마가 절묘하게 섞여 있는 보기 드문 영화. 1935년 미국 남부의 교도소를 배경으로 거구의 흑인 사형수 존 커피(마이클 클라크 덩컨)와 교도소 간수 폴(톰 행크스) 사이의 교감을 다룬다. 위압적인 외모와 달리 선한 심성을 지닌 흑인 사형수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을 치료하는 모습은 여러 가지 상징과 해석을 가능케 한다. 2012년 세상을 떠난 마이클 클라크 덩컨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미스트> 감독 프랭크 다라본트 / 2007년
이쯤 되면 프랭크 다라본트는 스티븐 킹이 사랑하는 감독, 스티븐 킹을 사랑한 감독이라 할 만하다. 자신의 소설을 각색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스티븐 킹이 이례적으로 원작과 다른 결말을 허락하고 지지한 걸로 유명한 영화. 스티븐 킹의 일관된 코드 중 하나인 맹목과 광기를 긴장감 있게 살려낸 수작이다. 또 하나의 장기인 미스터리와 초자연적 존재는 최대한 절제해서 사용하고 폐쇄된 집단 내에서의 광기를 촘촘하게 그려나간다. 마샤 게이 하든이 맡은 카모디 부인은 주연이 아님에도 스티븐 킹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 중 하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