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쯤 정정훈 촬영감독의 초대를 받아 <그것> 촬영현장인 캐나다 토론토로 갈 뻔한 적이 있다. 여러 이유 때문에 취재가 무산되었는데 그때 그가 들려준 얘기 중에서 아직도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도, 나도 할리우드에 정착하고 있는 신인이라 서로 통하는 게 많다. 우리는 <그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장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감했고, 피와 폭력이 낭자해 비명을 지르게 하는 전형적인 공포영화와 다르게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정정훈 촬영감독의 이 말은 <그것>이 어떤 영화인지 짐작을 돕기는커녕 궁금증만 더욱 키웠다.
몇주 전, 그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만 해도 그는 미국 LA에서 <호텔 아르테미스>(감독 드루 피어스)의 막바지 촬영을 하고 있었다. <호텔 아르테미스>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스타트렉 비욘드> <미이라> 등에 출연한 소피아 부텔라, 조디 포스터와 함께 찍고 있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영화 촬영이 끝난 뒤 지난주에는 일 때문에 뉴질랜드로 가더니 지금은 잠깐 서울에 들렀다. <커런트 워>(감독 알폰소 고메즈 레존) 색보정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 그를 붙잡고 <그것>에 대한 좀더 많은 정보를 캐물었다.
-<그것>을 처음 제안받은 건 언제인가.
=<아가씨>가 끝나고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2015)를 함께 작업한 알폰소 고메즈 레존 감독의 요청을 받아 파일럿 TV시리즈인 <시티즌>을 촬영했다. 이 작품이 끝날 때쯤 스티븐 킹의 <그것>이 리메이크되고, 공포영화 <마마>(2013)를 연출했던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이 메가폰을 잡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이 어떻게 알고 미팅을 요청한 건가.
=그는 박찬욱 감독님의 팬이다. <올드보이>(2003)를 포함해 박 감독님의 영화들을 거의 다 봤다더라. 내가 촬영했던 박 감독님의 영화들이 <그것>과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알폰소 고메즈 레존 감독과 잘 아는 사이였다. 알폰소 고메즈 레존 감독에게 내가 어떤 스타일의 촬영감독인지 물었다고 하더라.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
=전형적인 공포영화와 거리가 멀었다. 아이들이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공포를 느끼게 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한다는 점에서 성장영화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공포영화가 아니야. (웃음) 역시 <그것>을 원작으로 하고, 1990년에 먼저 제작됐던 TV시리즈인 <피의 피에로>(감독 토미 리 월리스)도 챙겨봤다.
-청소년들의 성장영화는 처음 아닌가.
=따지고 보면 <올드보이>뿐만 아니라 <친절한 금자씨>(2005)도, <스토커>(2012)도, <아가씨>(2016)도 모두 성장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나와 친구, 그리고 죽어가는 소녀>도 그렇고. 주인공의 성별과 연령대가 다를 뿐이지 감춘 자아를 타인이 끄집어내주거나 스스로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성장영화를 경험해 <그것>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피의 피에로>는 어떻게 봤나.
=1990년대 당시의 기술을 활용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뭔가 좀 아쉬웠다.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다소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소설, 만화 등 어린 시절 즐겨 읽었던 이야기에 대한 공통적인 향수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해서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을 많이 했었다.
-미팅 때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었나.
=공포영화 특유의 과장된 표현보다 자연스럽게 보여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첫 미팅에서 촬영감독으로 거의 결정됐다.
-스튜디오(제작사 뉴라인시네마)도 당신의 합류에 이견을 내진 않았나.
=할리우드에서 감독이 누구와 함께 작업하겠다고 하면 스튜디오가 제동을 거는 경우가 허다한데, 운이 좋게도 별 문제 없이 합류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과 당신은 할리우드에서 이방인이지 않나. 그런 두 사람이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흥미로운데.
=미국인이 <그것>을 만들었을 때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해보면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스티븐 킹 원작의 <그것>은 지극히 미국적인 문화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동시에 충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프리 프로덕션이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캐나다 토론토로 넘어간 이유가 뭔가.
=토론토에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토론토로 곧바로 넘어가 한달 반동안 촬영을 준비한 건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이 공간에 대한 집착이 크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미국 메인주에 위치한 데리라는 도시다. 데리는 가상의 도시이지만, 메인주는 실제로 미국에서 경제 수준이 높고 안전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가장 미국적인 이야기를 찍은 셈이다. (웃음)
-왜 토론토였나.
=세금 환급 제도를 포함해 경제적인 혜택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커런트 워>도 미국 뉴욕과 피츠버그가 배경인데도 세금 환급 제도와 각종 로케이션 인센티브 혜택 때문에 영국에서 찍어야 했다. 며칠 뒤 런던으로 가서 <커런트 워> 색보정을 해야 하는데, 런던에 있는 편집실에 가면 미국 애들이 후반작업을 하고 있다. (웃음)
-촬영과 조명 컨셉은 무엇인가.
=호흡이 대체로 길었던 전작들에 비해 이 영화는 주인공이 여러 명이다보니 리듬이 매우 중요했다. 게다가 일곱 아이들의 공포의 대상인 페니와이즈(빌 스카스가드)는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캐릭터다. 페니와이즈의 내면은 어린 시절 누구나 어떤 형태로 나왔을지 모를 공포의 대상을 내포하고 있어야 했다. 이 점에서 페니와이즈의 톤을 조절하는 게 쉽지 않았다. 클래식하면서도 감각적인 톤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래서 다이내믹한 앵글을 많이 구사했고, 카메라는 일곱 아이들과 쉴 새 없이 호흡하려고 했다. <그것>의 톤은 지금까지 내가 찍었던 영화들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잘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카메라와 렌즈를 선택했나.
=이야기 배경이 현재가 아닌 까닭에 감독이 화면 톤을 당시 시대에 맞게 보여주길 원했고, 필름으로 찍고 싶어 했던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필름과 가까운 룩을 구현할 수 있는 아리 알렉사를 쓰면서 렌즈를 다양하게 쓰는 방향을 감독에게 권했다. 파나비전에서 나온 여러 렌즈들을 테스트했는데 콘트라스트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G 시리즈와 일반 렌즈인 프리모를 섞어 쓰기로 했다. <아가씨> 때 썼던 애너모픽 호크 74 빈티지를 포함해 빈티지 렌즈들도 테스트했는데 올드하게 보일까봐 제외했다.
-이야기의 어떤 점에서 파나비전 G 시리즈 렌즈들이 필요했나.
=인물마다 콘트라스트와 색감이 다르고, 핸드헬드로 찍어야 할 장면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니와이즈를 시각적으로 어떻게 구현할지가 관건이었을 것 같다.
=오히려 그건 쉬웠다. 감독이 워낙 그림 실력이 뛰어났고, 페니와이즈가 확실히 스케치되어 있었다.
-페니와이즈를 카메라에 담아낼 때 어떤 원칙이 있었나.
=페니와이즈의 얼굴에는 무서움, 선함, 광대 모든 면모가 동시에 존재해야 했다. 배경이 어두워 강한 콘트라스트와 인물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이라이트를 통해 페니와이즈의 얼굴을 보여주려고 했다. 무엇보다 카메라와 조명을 세팅하는 시간을 줄여서 감독이 (연기) 하나라도 더 캐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려고 했다.
-촬영현장에서 아역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충무로에서 아역배우와 동물은 촬영할 때 통제하기 쉽지 않다는 속설이 있지 않나. 그런 게 전혀 없을 만큼 아역배우 모두 연기도, 태도도 매우 좋았다. 특히 주인공 빌 역을 맡은 제이든 리버허(<세인트 빈센트>(2014), <미드나잇 스페셜>(2016), <더 컨퍼메이션>(2016), <북 오브 렌리>(2017) 출연.-편집자)가 굉장히 차분해서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제이든이 내게 와서 “난 (한국인의 피가) 1/4 섞였어”라고 말해주었다. 알고 보니 제이든의 외할머니가 한국인이더라. (웃음)
-페니와이즈를 연기한 빌 스카스가드는 어땠나.
=이렇게 잘생기고 훤칠한 친구가 왜 이런 영화를 할까 궁금했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분장을 해야 하니까. 그런데 호흡을 맞춰보니 대단한 배우였다. 일곱 아이들을 변화시켜야 하는 중책을 정말 잘해냈다.
-현장에서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은 어땠나.
=감독 같지 않은 감독. 권위주의가 전혀 없고 모든 스탭들을 친구처럼 대했다.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즐겨 부르고, 피아노도 잘 치며,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농담도 잘했고. 마치 고등학교 친구 같았다. (웃음)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방식이 보통 공포영화들과 달랐을 텐데.
=우리는 이 영화를 정말 잔인하게 만들고 싶었다. 잔인해야 (메시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냥 공포영화가 아니다. 눈감고 비명 지르는 수준이 아니다.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지만 깜짝깜짝 놀라면서 흐뭇하게 웃을 수 있는 공포영화라는 얘기만 해두자. 어린 시절, 성장 과정에서 누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영화다.
-현장에서 섬뜩했던 순간이 있나.
=촬영 첫날 찍었던 장면. 스포일러와 관련된 장면이라 얘기할 수 없다. (웃음) 일정 때문에 중요하고 잔인한 시퀀스들을 촬영 초반에 찍어야 했던 까닭에 배우도 스탭도 모두 긴장했었는데, 아역배우들이 웬만한 어른배우 못지않게 해준 덕분에 결과가 잘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블라인드 시사회를 통해 <그것>을 봤다고 얘기해주지 않았나. 시사 반응은 어땠나.
=일반 관객 500명과 함께 봤다. 성별과 연령대가 각각 달랐지만 모두 웃고, 무서워하고, 박수치고, 비명을 질렀다. 시사 평점도 높게 나왔다.
-<아가씨> 이후 다시 할리우드로 건너가 <그것> <호텔 아르테미스> <커런트 워> 세편을 연달아 작업하며 할리우드에 촬영감독으로서 안착한 것 같다.
=세편 모두 장르가 다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커런트 워>는 토머스 에디슨(베네딕트 컴버배치)과 조지 웨스팅하우스(마이클 섀넌)가 전기를 개발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인 전기영화라기보다 에디슨을 비틀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소피아 부텔라, 조디 포스터와 함께 호흡을 맞춘 <호텔 아르테미스>는 근미래가 배경인데,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라 최대한 다양한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한데 다행히도 여러 시도를 할 수 있는 작업을 한 셈이다. 알폰소 고메즈 레존, 안드레스 무시에티 감독을 포함해 할리우드 커뮤니티도 형성되고 있다. 언젠가는 규모가 큰 영화도 하고 싶다. 칼을 뽑았으니 끝을 볼 생각이다. (웃음)
-다시 런던으로 가나.
=런던에서 <커런트 워> 색보정을 마무리한 뒤 9월 4일 다시 미국 LA로 가야 한다. 다음날 열리는 <그것> 프리미어 시사회에 참석해 함께 작업한 아이들과 사진 찍어야지. (웃음)
<그것>의 촬영 정보
사용 카메라_ 아리 알렉사 XT PLUS(ARRI ALEXA XT PLUS) 사용 렌즈_ 파나비전 G 시리즈, 파나비전 프리모 화면 비율_ 2.39:1(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