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가 남긴 유산
2017-09-25
글 : 김현수
리들리 스콧은 <블레이드 러너>라는 완벽한 꿈을 꾸는가

<블레이드 러너>는 할리우드 역사상 손꼽히는 성공한 실패작이다. 1982년 개봉 당시 난해하다는 이유로 관객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았다가, 1990년대 VHS 비디오가 대중화되면서 재평가됐고 끝내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지금에 비유하자면 평점 폭탄에다가 온갖 악플에 시달렸던 한편의 졸작이 SF영화 역사의 정전으로 둔갑해버린 셈이다. 지난 35년에 걸쳐 수많은 관객이 영화를 끊임없이 재평가하고, 감독 자신은 이에 답례하듯 재편집을 통해 무려 다섯 가지의 판본을 세상에 내놓은 이유가 뭘까. 아직 원작을 한번도 접해보지 못한 관객이라면 오리지널 <블레이드 러너>가 어떻게 한편의 완벽한 ‘최종판’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추측건대 곧 개봉할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출발점이 지난했던 원작의 재편집 과정 속에 숨겨져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1982년의 할리우드는 이상한 시기였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E.T.>, 토브 후퍼의 <폴터가이스트>, 존 카펜터의 <괴물>, 조지 밀러의 <매드맥스2>, 월터 힐의 <48시간>,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3>는 물론, <스타트렉2: 칸의 역습> <트론> <캣 피플> <리치몬드 연애소동> 등의 영화가 극장에 걸렸다. 어떤 의미인가 하면, 감독 개인의 필모그래피를 대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각 장르의 역사도 대표할 만한 영화들이 한해에 만들어진 셈이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 역시 이전과는 달랐다. 1970년대가 저물면서 미국인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새로운 시대, 즉 경제 호황기를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리들리 스콧 감독이 야심차게 내놓은 <블레이드 러너>는 장르적 특징은 차치하고서라도 애당초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먼 우울한 미래 사회를 제시하고 있었다. 필립 K. 딕의 원작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기반으로 각본가 햄프턴 팬처이 각색한 시나리오를 본 리들리 스콧은 “미래를 배경으로 한 누아르영화를 만들겠다”고 연출 방향을 잡았다. 한정된 제작비로 CG의 도움 없이 여러 특수효과 촬영을 통해 만들어진 4시간짜리 편집본을 본 스튜디오 이사진은 난색을 표했다. 영화가 너무 난해하다는 반응이었다. 각본가는 감독이 영화를 망쳤다며 화를 내기까지 했다. 궁여지책으로 감독의 의도에는 반하지만 친절한 설명을 위해 주인공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의 내레이션을 덧붙이고 재촬영을 통해 새로운 엔딩을 붙인 이후에야 ‘극장판’이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역시나 흥행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블레이드 러너> 포스터(네이버 영화)

어두운 미래 디스토피아를 구현하다

2019년 LA를 배경으로 ‘타이렐’이라는 로봇 공학회사가 인간과 흡사한 복제인간, ‘레플리컨트’를 만들지만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 사회로 숨어든다. 경찰은 레플리컨트 수사를 담당하는 ‘블레이드 러너’ 릭 데커드에게 이들을 모두 잡아들일 것을 명령하고 그는 단서를 찾기 위해 어두운 밤거리로 나선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릭 데커드가 인간 사회에 숨어든 복제인간을 찾아나서는 일종의 하드보일드 형사영화 스타일을 추구했다. 화려한 액션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영화와는 방향이 달랐다. 릭 데커드는 홍콩과 베이징, 도쿄와 같은 아시아 국가의 도시가 연상되는 네온사인과 빈민으로 뒤덮인 뒷골목을 누비고 다닌다. 일러스트레이터 시드 미드가 디자인한 미래 도시 LA의 풍경은 음습하고 황폐한, 죽은 도시에 가까웠다. 영화의 대부분을 특수효과로 촬영했기 때문에 세트 촬영의 난점을 보완하기 위한 적당한 눈속임이 필요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은 스모그가 자욱한 어두운 밤거리에 비를 내리게 하면서 난점을 가려버리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것은 그대로 영화의 그로테스크한 스타일이 되어버렸다.

<에이리언>을 만들었고, 희대의 SF 프로젝트였던 <듄>을 준비하다가 엎어지는 경험을 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은 자신이 어릴 때 형제들과 함께 즐겨봤던 만화가 뫼비우스(장 지로드)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취향을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가감 없이 쏟아냈다.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에서 인간성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등 어두운 미래 디스토피아의 단면을 들여다보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훌륭했으나 영화는 거액을 투자한 투자자들과 관객의 눈에 당시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스튜디오 이사진은 감독이 만든 영화의 결말이 친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해하기 쉽도록 릭 데커드의 내레이션이 깔린 해피엔딩을 추가로 만들어 덧붙였다. 인간 사회로 도망쳤던 복제인간들을 모두 추적한 뒤, 그와 또 다른 복제인간 레이첼이 LA를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는 장면이 ‘극장판’에 추가됐다. 제작진이 추가로 찍은 항공 촬영숏이 마음에 안 들었던 이사진이 <샤이닝>을 찍다가 남은 항공숏으로 대체하는 등 급하게 날조한 티가 역력한 엔딩이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후 만들어진 ‘감독판’에서 내레이션을 비롯해 이 엔딩 장면을 바로 삭제해버렸다.

그렇다고 애초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의도했던 ‘감독판’ 엔딩에 대해서도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영화에 캐스팅된 후, 촬영 내내 해리슨 포드와 리들리 스콧 감독은 극중 릭 데커드의 정체가 인간인지 복제인간인지를 두고 열띤 논쟁을 거쳤다. 둘의 의견 차이는 확고했다. 해리슨 포드는 최근 <블레이드 러너 2049> 홍보를 위해 언론에 나선 자리에서도 “릭 데커드는 인간”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릭 데커드가 인간이 아니라 복제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보다 ‘분명하게’ 가질 수 있도록 1991년에 만든 ‘감독판’에 릭 데커드의 꿈 장면도 삽입했다. 이 꿈 장면으로 인해 ‘감독판’에서의 릭 데커드는 인간인지 복제인간인지 모호하게 묘사됐다. 이에 대한 팬들의 논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드니 빌뇌브 감독을 비롯해 <블레이드 러너 2049>에 참여한 배우 라이언 고슬링 또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속편에서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속편의 이야기가 시작하는 지점, 혹은 영화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전작 <블레이드 러너>가 갖고 있던 난제도 함께 풀릴 것 같다. 물론 풀리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애초 의도했던 바는 ‘궁금증’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블레이드 러너> 오리지널 포스터

인간답다는 것의 질문

인간 사회에 숨어든 복제인간들을 찾아내어 ‘은퇴’시킬 수밖에 없는 릭 데커드는 그들을 죽이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면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자신이 복제인간인지 까맣게 모르고 살던 레이첼은 릭 데커드에게 “당신 스스로에게 복제인간 테스트를 해본 적 있느냐”고 묻는다. 레이첼이 지니고 살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릭 데커드는 반란을 일으켜 인간처럼 숨어 살고자 했던 복제인간을 통해 자신이 인간인지 복제인간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2007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된 ‘파이널컷’, 즉 최종판은 이런 감독의 모호한 의도와 궁금증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리들리 스콧 감독이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며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기획을 시작한 출발점이 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들려준 주제는 이후 영화와 음악, 미술,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분야 등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지금 보는 어떤 영화에서 연기가 자욱한 도시의 밤거리 뒷골목에서 주인공이 방황하는 SF영화를 만난다면 <블레이드 러너>의 스타일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블레이드 러너>에는 <스타워즈>나 <매트릭스> 같은 SF 시리즈가 보여주는 화려한 액션은 없지만 매우 시적인 대사들과 환상적인 음악, 기괴한 건물 디자인과 네온사인 번쩍이는 퇴폐적인 미래의 술집들, 즉 감독 스스로 “근사하게 망가진 미래”라고 표현하는 미래의 풍경을 배경으로 인간의 조건을 되묻는 낭만이 있다. 수많은 SF영화가 <블레이드 러너>의 소재와 스타일을 차용했지만 그것만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리들리 스콧 감독만의 오리지널리티다. 과연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그 뒤를 이어갈 수 있을까. 어쨌든 이번에도 개봉 전에는 궁금증을, 개봉 이후에는 의문점을 남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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