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불이 꺼지면 게임이 시작된다. 화면 속에 한 꼬마가 텅 빈 마트 안을 뛰어다닌다. 폐허와 같은 분위기의 마트 안에는 한 가족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다. 5명의 가족은 아무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작은 소리를 내는 것에도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꼬마가 우주선 장난감을 손에 들고 나오자 엄마, 아빠, 누나, 형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타이른다. “이건 너무 소리가 커. 아빠 말 들으렴,” 극장 안도 어느새 조용해진다. 팝콘 먹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마저 점점 잦아들고 이내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침묵에 동참한다. 숨 막히는 오프닝이 끝나고 화면에 <콰이어트 플레이스>(2018)라는 제목이 뜰 때쯤이면 극장 안이 문자 그대로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된다.
관객 참여형의 공포
존 크래신스키 감독의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침묵의 확산과 유지로 이끌어가는 호러영화다. 사실 호러는 세팅과 상황만으로 분위기의 절반 이상이 판가름나는 장르인 만큼 기발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저예산이 가능한 장르로 인식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제한된 공간과 차단된 정보를 기반으로 한다는 건 여타 장르에선 제약이지만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에서는 필수적인 기초공사와도 같다. 기왕 필요한 조건이니 제대로 써먹어주는 게 당연하다. 가깝게는 불이 꺼지면 무언가 나타난다는 설정의 <라이트 아웃>, 멀게는 현실과의 경계를 지우는 파운드 푸티지의 <파라노말 액티비티>, 나아가서는 <클로버필드> 같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도 이 연장선에 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역시 많은 정보를 생략하고 차단시킨 채 진행된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 사람들은 정체불명의 생명체에게 습격을 받는다. 남편(존 크래신스키)과 아내(에밀리 블런트), 청각장애인인 첫째딸(밀리센트 시먼스), 둘째아들(노아 주프) 그리고 막내로 이뤄진 일가족이 살아남았다. 끝날 때까지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가족은 오프닝에서 괴물의 습격으로 막내를 잃고 4인 가족이 된다. 괴물이 나타난 지 89일 만의 일이다. 이후 영화는 괴물 습격 후 472일로 한번에 시간을 뛰어넘어 진행된다. 가족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원에서 일체의 소리를 내지 않고 수화로 대화하며 끈덕지게 생활을 이어간다. 400일가량의 시간을 건너뛴 건 새로운 상황을 도입하기 위해서다. 막내를 잃었지만 그사이 엄마는 다시 임신을 했다. 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의 제약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영화는 그때까지도 이 침략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는지, 나머지 사람들이나 생존자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 괴물이 어떤 존재들인지 일정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관객이 영화 속 가족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양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 영화에 더 몰입할 수 있을 것”이란 존 크래신스키 감독의 의도는 정확히 적중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기발함은 관객 참여형의 게임과 유사한 감각을 준다는 거다. 본래 등장인물에 대한 몰입이란 드라마의 전개나 극적 구조를 따르기 마련이지만 호러영화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구현된다. 게임의 룰에 동참시키는 것이다. 룰은 심플하다. ‘소리를 내면 죽는다.’ 개봉 첫주에 제작비 181억원의 약 3배에 달하는 533억원의 수익을 거둔 흥행은 그 결과물이다. 물론 몇배의 흥행수익은 적은 제작비 덕분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이 결과가 입소문이 되어 ‘도대체 얼마나 무섭기에 그렇게 흥행을 한 걸까’라는 호기심을 부추긴다. 영화관이 테마파크라면 호러영화는 한번 즐겨보고 싶은 일체형 체험놀이기구인 셈이다.
침묵과 사운드, 긴장은 어떻게 조각되는가
일단 컨셉에 혹하고 입소문에 기대감을 품은 관객이 극장까지 찾았다면 그다음은 이 설정을 납득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성패의 절반은 오프닝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가장 빼어난 장면 역시 오프닝이라 해도 좋겠다. 오프닝의 기능은 명백하다. 관객을 침묵의 게임 속으로 동참시킬 것.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소리를 조정하는 것이다. 호러가 활용하는 효과는 극단적으로 말해 단 두 가지다. 쇼크와 서스펜스. 긴장감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지하고 어떤 순간에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줄 것인가의 문제. 이 점에서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 긴장감과 관련하여 가장 강력하고 직관적으로 작동하는 영화적 요소가 바로 소리이기 때문이다.
침묵을 활용한다고 했지만 <콰이어트 플레이스>에서 완벽한 정적을 사용하는 장면은 몇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언가 튀어나올지도 모른다는 전조, 긴장감의 신호로서 소리를 활용한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구분해야 할 것은 이 영화가 말(대사)이 없는 것이지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앰비언스 사운드(공간음)를 깔고 가지만 생각보다 음악의 활용도 많다. 긴장이 필요할 땐 긴장감이 도는 음악을 깔 뿐 아니라 기쁨, 불안, 평안 등 감정적으로 직접 연결되는 음악도 제법 활용한다.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꽤 시끄러운 셈이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정적이고 조용하게 느껴지는 건 순전히 완급의 조절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설정에 맞춰 괴물이 등장하기 직전의 상황에 정적을 배치하는 방식은 긴장을 유발하는 신호의 역할을 한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룰을 만든 후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강제적인 상황들, 의외의 순간들을 꾸준히 이어 붙이는데 그것이 관객 동참형 서스펜스의 촉매가 된다. 게임 중 실수로 램프를 깨트려 불이 붙는 장면이라든지 바닥에 튀어나온 못에 발을 찔려 물건을 떨어트리는 등 일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소음들을 지속적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조용하지 않던 영화는 이런 상황 앞뒤로는 강제로 침묵을 만들어낸다. 정확히는 완벽한 정적이 아닌 조용한 공간음을 지속시킨다.
사운드 디자인의 첫 번째 요소는 바로 이 공간음이다. 모든 공간에는 특징적인 백색소음이 깔려 있고 영화는 이를 자연스레 재현한다. 대개 음악의 사용을 줄이면 공간음의 크기가 두드러지기 마련인데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역시 이 원칙을 지키는 가운데 한 가지 특징적인 활용을 선보인다. 바로 1인칭의 음악을 공간음마냥 활용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흥미로운 접근이다. 가령 리얼한 사운드 재현으로 이목을 끈 <론 서바이버>(2013)의 경우 이와 반대로 배우의 숨소리, 폴리 사운드(후반작업의 인공 음향) 그리고 공간음으로 음악의 빈자리를 채운다. 음악 대신 리듬감이 있는 실제 공간 사운드를 사용해 현장감과 리얼리티를 높이는 것이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반대다. 음악을 마치 공간음처럼 사용한다.
침묵은 게임의 대전제일 뿐 이 영화는 생각보다 조용하지 않다. 시종일관 감정을 지시하는 음악이 이어지고 깔려 있고 평범한 공간음마저 리듬과 박자를 가지고 배치되어 음악처럼 느껴진다. 본래 음악은 인물(혹은 관객)의 감정을 특정 방향으로 지시하는 단순명료하며 강력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물들이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그 감정과 상황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다음에야 주어지는 완전한 침묵, 그러니까 청각장애인인 딸의 시점에서 재현되는 특정 순간은 종종 삽입될 때마다 놀라운 몰입을 선사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속 침묵은 공백이 아니다. 도리어 모두의 이목을 끄는 가장 시끄러운 소리나 진배없다. 시작되면 반드시 무언가 일어난다는 신호. <콰이어트 플레이스>가 유발하는 긴장과 공포는 괴생명체가 아니라 정적의 강요에서 비롯된다. 이는 긴장의 유지라는 효과 측면에서 차라리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를 연상시킨다. 등장하지 않음으로써 영화를 지배하는 조스처럼 <콰이어트 플레이스> 속 침묵 역시 제한적으로 사용되어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침묵이야말로 극장이란 공간에서 허락된 관객의 가장 적극적인 동참 행위인 셈이다.
고전적 가족주의로의 회귀와 아버지의 자리
드라마 측면에서도 <콰이어트 플레이스>와 가장 닮은꼴의 영화는 아마도 <죠스>가 아닐까 싶다. 에밀리 블런트는 “남편과 나는 둘 다 <죠스>를 좋아하고 그 영화를 계기로 가까워졌다. 아마 스무번은 넘게 같이 봤을 거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는데 비단 효과적인 측면뿐 아니라 드라마의 뼈대도 유사하다.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침묵에 의한 긴장을 효과적으로 조율하는 것만큼 단단한 가족 드라마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오프닝에서 막내를 잃은 후 가족은 각자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간다. 막내에게 소리나는 장난감을 직접 줬던 누나는 아빠가 자신을 원망한다고 생각하고, 가족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리는 아빠는 딸이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청기를 제작한다. 자신이 막내를 두손에 안고 가야 했다는 아내의 공허는 뱃속의 아이로도 달랠 수 없고 눈앞에서 직접 동생의 죽음을 목격했던 아들은 매사 소극적이 되어간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지만 모두의 책임이기도 한 사건 뒤, 말을 하지 못한다는 상황이 더해져 서로의 진심을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그 와중에 엄마의 출산이 다가오고 괴물들의 습격이 이어지자 가족은 함께 상황을 헤쳐나간다는 공통의 목표를 수행한다. 그 끝에서 아버지의 진심을 확인한 아들은 말한다. “누나를 사랑하죠?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세요.”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침묵은 이 한마디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논의를 조금 확장해나가자면 이 영화는 미국의 가족주의에 대한 회귀를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콰이어트 플레이스>의 소재와 설정은 1950년대 미국 괴물영화를 연상시키는 것을 넘어 정서적으로도 고전적인 가족주의를 택한다. 할리우드 드라마의 중요한 동력으로 작동하는 가족주의는 한편으로는 점점 사라져가는 가치에 대한 집착이라고 볼 수도 있다. <포레스트 검프>(1994), <제리 맥과이어>(1996) 등 1990년대 가족 드라마가 주요 장르로 자리잡았던 건 그만큼 가족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사라져가는 가치를 환상으로나마 부여잡고 있었던 90년대를 지나 2000년 이후로는 이제 가족의 형태가 바뀌었음을 고백하는 영화들이 등장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2005)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이들을 무사히 아내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마감되는 이 영화의 엔딩은 가족 내 아버지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음에 대한 상징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지금, <콰이어트 플레이스>로 돌아와 영화는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말한다. “아이들을 지키지도 못하면 그게 무슨 부모야.”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이와 같은 당위를 수행하고자 하는 건 고전적인 가치로의 회귀를 소망하는 것처럼 읽힌다. 물론 장르영화로서의 기능적인 역할 수행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겟 아웃>(2017)의 경우와 같이 영리한 장르영화는 스스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필연적으로 시대를 반영하기 마련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가 우리를 설명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시대를 증명한다. 영화가 시대를 반영할 때 그 첫줄은 언제나 호러영화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