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영화는 변하고 있다. 사회비판적 성격이 약해지는 가운데 다양성이 깨어나고 있는 추세다. 내외 정세가 안정될수록 다양성을 드러낼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는 가운데 해외 유학파 청년 지도자의 로망과 체제 유지의 딜레마 사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분석이 이어진다. 여기서는 김정은 정권하 제작된 북한영화를 두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려 한다. 첫째, 이 시기 북한영화의 제작 현황과 전망이다. 둘째, 김정은 집권 초 북한영화에 나타난 특징을 통해 새 지도자의 의중과 북한 사회의 향방을 가늠하는 일이다.
김일성, 김정일 정권 시기에는 해마다 수십편의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특히 김정일은 ‘예술정치’를 표방하였으며, 영화의 위상이 가장 높았다. 그런데 김정은 정권 들어 새로 제작된 영화는 극소수에 불과하다(<표1> 참조). 반면 모란봉악단을 전면에 내세운 ‘음악정치’가 두드러진다. 김정은 정권은 왜 영화 제작에 인색한가? 우선, 영화 제작에 비해 음악에 투자하는 게 가성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한류와 해외문물 유입 등으로 높아진 대중의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할 바엔 적은 비용으로 빠르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음악에 투자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또한 김정은이 영화보다 음악이나 스포츠를 선호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영화나 드라마 제작이 비교적 활발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다.
김정은 집권 초, '유아, 아동, 청소년' 주인공의 부상
만약 영화 제작에 드는 비용 부담이 핵심적인 이유라면 향후 경제사정이 나아질 때 북한영화계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될까? 이에 대한단초는 정권 계승 과도기였던 2012년, 해외 합작영화가 연이어 개봉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개봉된 세 작품은 벨기에, 미국, 중국과 각각 최초로 합작한 작품이라는 점만으로도 주목받았으며, 각종 국제영화제에 선보였다. 6년 만에 완성된 <김동무는 하늘을 난다>는 벨기에 국적의 안야 다엘레만스, 영국의 니콜라스 보너(<천리마축구단>(2002) 제작)와 조선인민군4·25예술영화촬영소가 합작한 코믹 멜로다. 탄광 노동자인 영미가 고소공포증과 노동계급이라는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고, 공중곡예사의 꿈을 이뤄간다는 내용이다. 5년여간 북한 지역 곳곳에서 촬영했다는 <산너머 마을>은 회령 출신 재미교포 배병준이 제작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병사와 북한 간호사의 사랑을 그렸다. <평양에서의 약속>은 중국이 자본을 투자하고, 북한이 인력과 물자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허난영화TV제작그룹과 조선예술영화촬영소가 3년 만에 완성했다. 북한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 <아리랑>의 안무가인 김은순과 북한을 찾은 중국의 북한 민속 무용수인 왕샤오난의 만남과 우정을 그리고 있다. 이처럼 몇년씩 공들인 해외 합작 사례는 여러 가지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본이나 제반여건이 충족되면 다양한 형태로 영화 제작이 활발해지리라 기대되는 대목이다.
한편, ‘애민정치’, ‘후대사랑’, ‘미래사랑’을 내건 김정은 집권 초 영화와 TV드라마의 특징은 ‘유아, 아동, 청소년’이 주인공으로 부상한 것이다. 아동영화(만화)라는 장르가 있어 그런지 이들이 주연인 영화는 드물다. <소년탐구자들>(2013, TV)은 중학교 과학환상소조 학생들이 과학환상대회 참가를 준비하며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전쟁 시기 무명전사들의 육성을 되살려 우승한다는 내용이다. 아마도 북한에서 “꿈”과 “환상”을 부추기는 유일무이한 영화일 듯 싶다. 김정은 시기 예술영재 전문기관으로 새 단장한 경상유치원의 실화를 소재로 한 <기다리는 아버지>(2013, TV, 2부작)는 피아노 영재들이 국제대회에서 수상하는 내용이다. 주인공 장혁은 평소 발전소 건설장에서 일하느라 떨어져 지내는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러 어머니와 함께 공항을 찾던 날 TV에는 하필 그 시각 유치원으로 현지지도를 나온 ‘아버지 원수님’과 친구들을 보게 된다. 장혁이 홀로 공항을 뛰쳐나와 유치원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40분 분량 중 6분가량을 차지한다. 그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6살 장혁이 느끼는 ‘아버지 원수님’에 대한 경외심과 혼자서만 그를 만나지 못한 안타까움에 함께하게 된다. <소학교의 작은 운동장>(2014, TV예술영화, 3부작)은 시골 어촌 마을 소학교 축구소조의 교사와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도 대항경기에서 우승하는 내용이다.
이들 작품에서 해외 유학파 청년 지도자 김정은이 지도자로서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세계화에 발맞추겠다는 체제 개선 의지가 잘 드러난다. 기존 북한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꿈”과 “환상”이라는 희망을 선사하고, 낯설고 앳된 수령을 친근하게 우러르도록 유도한다. 국가에서 주력하는 각 부문 영재들이 대회에서 우승한다는 공통된 결말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개인간 경쟁을 독려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집단에 복무하는 충성스러운 인재를 강조했다면 개인의 끼와 재능으로 초점을 이동했다. 깜찍한 키티 인형이 놓인 침대, 풍족해 보이는 아파트 주거환경, 화려한 위락시설 등 상업화된 여느 도시와 별다르지 않다.
이외에도 <벼꽃>(2015), <우리 집 이야기>(2016)는 ‘행복한 우리 집’을 강조한다. 물론 ‘어버이수령’의 품, ‘사회주의 조국’이라는 이중적 의미지만 개개인, 개별 가정의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뉘앙스가 짙다. <표창>(2015, TV), <북방의 노을>(2017, TV, 10부작)에서는 출세를 지향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확인된다. <징벌>(2013, TV, 16부작), <포성 없는 전구>(2014, TV, 5부작), <방탄벽>(2015, TV, 14부작) 등의 시대극에서는 탈북민 연구로 밝혀진 내용이지만 북한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성폭력 실태를 유추해볼 수 있다. ‘장마당’, ‘돈주’ 등으로 대표되는 시장경제로 이미 자본화가 심화된 북한 사회가 더이상 사회주의 외피에 얽매일 이유는 없어 보이지만 한편으론 여전히 체제와 정권을 유지할 명분은 필요하다는 딜레마가 있다.
개혁·개방 이후 젠더 및 계급 차별 심화 우려도
바야흐로 한반도에 순풍이 불고 있다. 싱가포르 도심에 등장한 은둔의 지도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보기 위해 인파가 몰려들었다는데 향후 북한영화도 주목받는 날이 온다고 해서 이상할 것 없다. 우선, 전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국가 주도의 공식 프로파간다라는 희소성이 있다. 김정은 시기 영화들은 이전에 비해 소외계층 및 사회비판적인 인물들의 비중이 줄어 더 심심하고 고리타분해졌다. 지금 정세가 유지된다면 평화를 기대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개혁개방이 불러올 급격한 자본주의화로 빈부 격차와 젠더 및 계급 차별의 심화도 우려된다. 영화는 결국 현실의 반영이다. 북한영화계가 활기를 띠게 된다면 그런 현실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담긴 다양한 작품도 나오지 않을까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