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가 지난 5월 ‘남북교류협력특별위원회’를 발족하고 내년 부산국제영화제를 남북 공동 영화제로 여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라는 콘텐츠와 인력, 배경의 확장 앞에서 남북 교류를 꿈꾸는 영화인들의 청사진은 현재 무한 진행 중이다. 마침 내년은 <의리적 구토>(1919)가 나온 이후 한국영화 100주년을 앞둔 상황. 지난 100년 동안 한번도 보지 못한 영화계의 달라진 풍경을 1년 안에 보게 될지 모른다. 남북한 관계 개선에 맞춰 진행 중인 영화계의 각종 프로젝트들을 살펴봤다.
남북 영화 교류 추진 위한 전담팀 꾸린다
스크린 속 남북 영화 교류의 역사적 순간은 눈 깜짝할 순간 지나갔다. 2003년 ‘남북영화교류추진특별위원회’가 만들어진 후 남북한 영화인, 촬영지 등의 교류를 비롯해 남한 영화인들의 평양 방문, 국내 제작사가 북측과 연계하여 추진하는 기획개발 작품에 대한 기획개발비 지원 등의 계획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남한영화 최초로 북한의 장면을 담은 조명남 감독의 <간 큰 가족>(2005)과 이후 장윤현 감독의 <황진이>(2007)의 금강산 촬영이 현대아산의 중간 조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당시 <간 큰 가족> 북한촬영장을 기자도 방문했는데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육로로 금강산 관광이 진행되던 때라 버스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던 기억이 난다. 취재원 휴대 금지 목록에 휴대전화, 인터넷, MP3 플레이어, 광학성능 24배줌 이상의 디지털카메라가 있었다(이 물품들을 모두 맡긴 뒤 명찰을 걸고 북한 땅으로 들어갔다). 촬영팀에는 더 까다로운 요구사항이 있었다. 촬영 이틀 전에야 가까스로 최종 허가가 떨어졌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찍는데도, 이 상황을 알릴 플래카드는 금지됐다. 마을 집이 하나라도, 주민이 한명이라도 담기면 필름은 폐기처분해야 했다. 금강산의 수려한 경관은 허가된 범위를 넘는다는 이유로 화각에서 제외됐고, 김정숙 피양소의 12층 꼭대기 촬영도 무산됐다. 이를 제재할 감시의 눈길이 촬영장 반경 곳곳에서 감지됐다. 그렇게 애초 기획했던 동선, 그려진 콘티를 전면 수정하고 타협해서 담은 장면은 불과 5% 남짓. 그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최초로 남한의 극영화에 북한의 실제 공기를 담았다는 건 일대 사건이었다. <황진이>의 금강산 촬영 허가로 이어지며, 많은 영화인들이 개성, 평양까지 내다봤던 촬영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단절의 10년이 지난 지금, 2018년 오석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위원장은 4·27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남북 관계 개선의 급물살에 맞춰 문화예술 분야의 남북 교류 재개를 실현하기 위해 “남북 영화 교류를 추진하기 위한 전담팀을 꾸릴 예정”이라는 뜻을 내비쳐 관심을 모았다. 이는 지난 5월 15일 칸국제영화제에서의 언급이었다. 한달 반이 지난 지금, 태스크포스팀 구성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을까. 영진위는 일단 ‘남북영화교류특별위원회’ 설립을 추진 중이다. 이는 2003년 ‘남북영화교류추진특별위원회’와 비슷한 포맷의 기구로, 당시는 민간 채널이 많이 참여했다면 이번엔 정부 채널이 보다 주도적으로 추가된다. 관련 예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논의 중이며 특위 구성은 영진위 담당자뿐 아니라 감독, 제작자 등 영화인들을 선정해 의견을 적극 반영한다는 방침이다.
이준동 영진위 부위원장은 나우필름 대표 자격으로 지난 2007년 남측 영화인들과 함께 평양을 방문을 하기도 했을뿐더러 당시 남북 합작을 꾀한 <최승희 프로젝트>를 기획개발하며 북한측과 협력을 도모하기도 했다. “남쪽의 기술력이나 자본의 참여, 북한의 인력 참여, 로케이션 같은 공간 조달 등 함께 추진할 수 있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다만 아무리 의욕을 앞세워도 정치 상황과 맞물린 일인만큼, 면밀히 지켜보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특위 구성을 진행 중인 영진위 홍보협력팀의 김영구 팀장은 먼저 “특위가 구성되면 가장 먼저 남북 영화인 교류, 학술행사 등 영화인 초청여부를 올해 안에 타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단기적으로는 <의리적 구토> 이후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행사의 파트너로 손을 잡고, 그걸 전기로 남북한의 영화 협력도 추진할 수 있다. 통일영화제를 남북한에서 격년으로 진행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아이디어다. 또 북한에 있는 프린트들을 디지털 복원하는 것 등 계획은 얼마든지 많다.
<숙제> <복무> 등 북한 촬영 가능할까
남북 관계 변화로 북한과 관련된 영화를 준비 중이던 영화인들에게도 새로운 길을 모색해볼 기회가 엿보인다. <관상>(2013), <궁합>(2015)을 만든 제작사 주피터필름의 주필호 대표가 준비하는 <숙제>는 북한 어린이가 잃어버린 숙제인 ‘장수풍뎅이 관찰기’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남한 어린이가 찾아주는 동심을 그린 드라마다. 아이들의 숙제에 얽힌 이야기지만,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어른들로 인해 남북 관계의 단면이 그려지는 작품이다. 현재 시나리오 수정 중이며 내년쯤 촬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주필호 대표는 “3∼4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가 이번에 남북 관계가 진전되면서 다시 꺼내든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그간 남북한간의 갈등, 분단을 첩보, 액션 장르에 풀어낸 작품은 많았으나 드라마적인 시도는 많지 않았다. “동심의 눈으로 만든 <공동경비구역 JSA> 같은 영화다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다룬다거나 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의 영화가 아닌 휴먼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고 전한다. 무엇보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북한 분량이 전체의 40%에 해당되는 만큼, 상황이 잘 진전되어 촬영지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이 주필호 대표의 바람이다. “북한을 배경으로 하는 순간, 사극이나 시대극처럼 세트를 지어야 하니 부담이 크다. 문화적인 교류로 이 부분들이 잘 진전되면 좋겠다”고 전한다.
장철수 감독이 오래 준비해온 북한 배경의 영화 <복무> 역시 이 시점에서 부쩍 궁금증이 높아지는 프로젝트다. 옌롄커의 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북한 병사가 상관의 아내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멜로드라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를 만들기 전부터 이미 장철수 감독이 준비해온 작품인데, 현재는 캐스팅 문제로 먼저 준비 중인 차기작 이후로 미뤄둔 상태다. “그동안 북한만 나오는, 북한 사람들의 시각으로만 보는 영화는 없었다. 남북영화라기보다 최초의 북한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장철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북한 사람들에 대해 갖는 편견을 깨려는 시도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나오고 북한에서 내려온 청년들이 너무 멋있거나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에 대해 불편을 토로하는 의견들도 더러 있었다. 영화를 통해서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복무>에서 인물들의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가진 편견을 깨고 싶었다.” 북한 사투리로 멜로영화를 한다는 것, 북한 배경의 로케이션 등 이전 영화에서 많이 보여지지 않았던 것들을 보여줄 예정이다. “노출에 대한 부담뿐 아니라 정치적 부담까지 더해져 미뤄졌던 프로젝트인데, 지금처럼 남북 관계가 나아지는 시기에 만들면 더 반응이 좋지 않을까 싶다. 특히 북한이 가진 고유한 풍경들,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미학적인 것이 영화에 녹아들어간다면 충분히 새로운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분위기가 영화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남북간에 쌓여온 그간의 편견들을 조금이나마 먼저 허물어줄 수 있는 게 영화라고 생각한다. 남북 대치를 다루는 첩보 액션물과는 다른 장르의 영화들도 그래서 더 많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이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들도 지금의 화해 분위기를 타고 더 풍부해지지 않을까.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창작자들에게 여러 의미에서 북한만큼의 보고가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통일부가 주최하는 ‘2018 한반도 평화와 통일 영화 제작지원’의 일환으로 평화와 통일을 소재로 한 작품도 준비 중이다. 지난해까지는 일반 공모작을 제작하는 자유 공모 방식으로만 진행됐다면, 이번엔 지정 공모 방식을 추가해 영화를 만든 경험이 있는 연출자들도 참여가 가능해졌다. 이 두 작품은 인디스토리가 제작하고 강이관, 부지영 감독이 참여한다. 올 11월 완성을 앞두고 강이관, 부지영 감독 모두 작품에 착수한 상태. 강이관 감독은 마침 이산가족 문제를 다룬 장편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강이관 감독은 “장편도 곧 만들 예정인데 남북 관계가 급변화하면서 어떻게 지금의 상황을 소화해 영화에 반영할지 고민이 더 깊어졌다. 아마 기획 중인 작품 가운데 남북 대결 국면에서 상상력을 더한 작품들이 많아서 다들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더불어 지금의 변화에 덧붙여 연출자로서의 바람도 전한다. “북한에 가서 찍어보고 싶은 마음도 크다. 또 남북한이 같이 볼 수 있는 영화,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변화한 환경 속에서 이야기를 새로 써내려가는 두 감독의 작품이야말로 현재의 남북 관계를 반영한 영화가 될 예정이다. 제작지원을 진행하는 미디액트의 선환영 실장은 이미 이 행사의 취지부터 달라졌다고 말한다. “통일부에서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후 이 사업에 대한 고민을 더 깊게 해왔다. 원래는 ‘통일 영화’에 방점이 찍혔다면, 지금은 변화하는 분위기를 반영하기 위해 프레임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진행했던 ‘통일 영화 제작지원’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 ‘2018 한반도 평화와 통일 영화 제작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올해는 ‘평화’에 보다 중점을 두게 된 것이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 남북 영화인 교류의 장 될까
남북 관계의 변화 국면에서 주목해볼 만한 영화 행사가 또 하나 있다. 강원도와 강원영상위원회가 추진하는, 강릉, 평창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내년 6월 개최를 목표로 준비 중이다. <옥자>(2017), <강철비>(2017), <염력>(2017), <공작>(2018) 등의 촬영지로 강원도가 각광을 받으면서 최근 들어 강원영상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영화계의 기대가 부쩍 높아진 상황. 영화제는 이미 남북 문화 교류를 염두에 둔 최문순 강원도 도지사의 의지를 반영해,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이전부터 구상해왔던 행사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강원영상위원회의 방은진 위원장이 맡는다. 방은진 위원장은 “평창동계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부각된 상황에서 강원도가 평화의 교두보 역할을 할 거라고 기대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통일부, 문화체육관광부, 국가정보원 등이 협력하는 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 이제 막 시작됐다”고 말한다. 분단과 전쟁보다는 평화와 난민 문제까지 아우를 수 있는 프로그램에 주력할 예정으로, 방은진 위원장은 “감사하게도 나에게 이런 기회가 왔기에 막중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해보고자 한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중책을 맡은 그가 영화제를 통해 가장 주력하고자 하는 것은 남북한 영화인의 적극적인 교류다. “조선영화동맹 등의 실무진을 만나서 남북 영화인들의 교류, 영화제 프로그램 등을 함께 꾸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보려 한다. 폐막식을 금강산 등에서 여는 것도 추진해볼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일 아카이빙도 열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 북한측과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함께 추진할 만한 것들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전한다. 남북의 활발한 교류를 눈앞에 둔 지금, 영화계의 시나리오는 무궁무진하다. 4월 27일의 풍경이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현실이었던 것처럼, 영화인들의 시나리오 역시 조심스럽지만, 현실 가능성이 부쩍 높아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