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북한영화③] 북한영화의 역사와 미학 - 194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2018-06-27
글 : 정영권 (영화평론가)
‘혁명’의 전통, 주체의 기치
<꽃파는 처녀>

북한영화란 명칭은 모순적이다. 북한에서 당연히 북한영화라는 말은 없다. 자신들의 국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따온 ‘조선영화’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American cinema’를 미국영화라 부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후자는 다른 언어를 전제하지만 전자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성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이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휴전선 이북지역은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또 다른 국민국가다. 따라서 해방 이후 현재까지 남한영화와는 다른 역사를 전개해온 북한영화를 살펴보는 것은 민족동질성이라는 관점에서 또 하나의 민족문화예술을 짚어보는 것이 아니다. 그런 관점은 ‘나’를 하나의 중심에 놓고 ‘또 하나’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분단 70년이 넘은 만큼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하고 그들의 관점으로 보면서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시각만이 북한영화를 온전히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한 녀학생의 일기>

민족해방에서 ‘조국해방전쟁’까지

1945 ~ 50년대

해방 이후 북한영화계는 빈궁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듯이 문화예술은 서울 중심이었다. 이렇다 할 촬영소도 감독(북한에서는 ‘연출가’로 불림)도 배우도 마땅치 않았다. 해방된 이북지역 영화관을 채웠던 것은 소련영화였다. 해방 직후 남한에서 미국영화가 득세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도 남한에서는 <자유만세>(1946), <새로운 맹서>(1947), <민족의 새벽>(1947) 같은 극영화들이 소위 ‘광복영화’라는 이름으로 제작됐지만 북한에서는 기록영화만 근근이 제작될 뿐이었다. 1948년 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만인 1949년에야 북한 최초의 극영화(북한 용어로 ‘예술영화’) <내 고향>이 탄생했다. 남한 배우 최민수의 외할아버지 강홍식이 연출하고 식민지 시절 ‘삼천만의 연인’으로 불렸던 문예봉이 출연한 이 영화는 일제의 학정에 고통받는 농민들과 이에 맞서 싸운 농민 출신 항일유격대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말미에는 해방 직후 김일성의 토지개혁이 인민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단행됐다는 정치선전도 잊지 않는다.

<내 고향>에서 유격대원 관필 역을 맡은 유원준은 이 영화로 데뷔한 이래 199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북한 인민들과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큰 사랑을 받았던 북한의 ‘아버지상’으로 남아 있다. 남한으로 치면 1960년대의 김승호나 1980년대 이후의 최불암을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강홍식, 문예봉 등은 분단되기 전 이북에서 태어났지만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활동했기에 월북 영화인으로 불리는데 김일성이 친일영화 경력도 있는 이들을 극진히 대우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그들은 척박한 황무지 같은 북한영화에 귀중한 씨앗을 뿌린 문예일꾼이자 선전일꾼이었던 것이다. <내 고향>과 같은 해 제작된 <용광로>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새 조국 건설에 매진하는 노동계급의 근로의욕을 고취하기 위해 제작된 영화다. 이로써 북한영화의 두개의 유구한 전통, 즉 항일 유격대 영화와 노동계급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북한영화에서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또 하나의 장르가 있다면 전쟁영화다. ‘조국해방전쟁’이라 불리는 6·25전쟁(한국전쟁) 시기 북한에서는 <소년 빨치산>(1951), <또 다시 전선으로>(1952), <전투기 사냥군조>(1953) 같은 전쟁영화들이 제작됐다. 남한에서 <정의의 진격>(1951) 등 전시 다큐멘터리가 주종을 이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국가의 지원하에 얼마나 발빠르게 전쟁 소재를 극영화로 재현했는지 알 수 있다.

<명령 027호>

천리마의 기치를 내걸고 혁명적 대작을 향하여

1960년대

북한에서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은 사상과 주제에 미학과 형식을 종속시킨다. 훌륭한 미학이란 훌륭한 사상을 전달하는 매개이며, 주제를 떠난 형식 실험은 ‘부르주아 퇴폐예술’에나 부합하는 것이다. 남한에서 문예라 하면 문화예술을 가리키는 데 반해, 북한에서는 문학예술을 지칭한다. 그만큼 문학성이 중요하며, 이는 음악, 미술 같은 예술형식보다 문학이 주제와 사상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문학을 중심으로 창작지침이 내려지면 여타 예술도 그 창작지침에 맞게 주제와 사상을 표현해야 한다. 1960년대까지 ‘씨나리오’로 불린 영화각본이 김정일의 지시로 ‘영화문학’이 됐다는 사실도 이러한 인식에 근거한다.

해방 직후 전쟁 시기까지 북한 문학예술을 지배했던 사조는 이른바 ‘고상한 사실주의’였다. 쉽게 말하면 새로운 국가의 기풍에 맞는 고상한 인품과 덕성을 겸비한 긍정적 모범인물을 창출하는 것이다. 보통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1930년대 소련에서 정초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는데, 해방 직후 북한이 아직 사회주의 단계가 아닌 인민민주주의 단계라 여겨 이와 같은 명칭이 붙은 것이다. 그러다가 1950년대 중·후반 전후 복구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생산력이 증진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사회주의 리얼리즘)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아울러 이 시기부터 북한이 자국 인민의 노력동원을 가장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천리마운동이 시작된다. 천리마운동은 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 시기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에선 농민들이 노동요를 부르며 너무도 즐겁게 농작물을 경작하는 모습이 담긴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뮤지컬’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 시기 북한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갈매기호 청년들>(1961), <붉은 꽃>(1963), <정방공>(1963) 등은 모두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생산력 증대가 곧 사회주의 건설의 기반이라는 ‘적색 개발주의’ 영화들이다. 같은 시기 개인적 계몽과 국가적 재건을 표방하며 나온 남한의 ‘조국 근대화’ 영화들인 <상록수>(1961), <쌀>(1963), <또순이>(1963) 등과 비교해보면 일종의 ‘거울 이미지’가 형성될 것이다.

1960년대 북한 문학예술의 또 하나의 조류이자 오늘까지 이어지는 창작원리 중 하나는 ‘혁명적 대작’이다. 천리마운동 소재 영화들이 당대의 북한 현실을 다룬 ‘사회주의 현실주제’ 영화라면 혁명적 대작 영화는 보다 큰 역사적 시기를 무대로 해서 혁명투쟁의 투사로 성장하는 주인공을 묘사해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편의 영화로는 부족했고 여러 편이 하나를 이루는 소위 ‘다부작’ 영화들이 요구됐다. 특히, 이러한 특성은 당시 북한이 추구하는 ‘남조선 혁명’ 전략과도 맞닿아 있었다. 남한의 4·19혁명은 북한지역을 ‘민주기지’로 하여 무력을 통한 ‘남반부 해방’을 주창했던 전쟁 노선이 실패로 돌아간 북한에서 남조선 혁명 노선의 변화를 가져왔다. ‘남조선 인민’들의 혁명 역량을 높게 평가한 김일성이 남조선 혁명은 남조선 인민들의 힘으로 이뤄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김정일이 처음으로 현장 지도했다는 2부작 영화 <성장의 길에서>(1964∼65)는 그렇게 탄생했다.

4·19혁명 전야 부패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미국에의 예속과 빈곤으로 점철된 남한의 현실을 고발하며 혁명전선에 나선 의대생 진명의 투쟁기를 그린 <성장의 길에서>는 동원된 군중 장면의 압도적 규모, 역사적 전형 창출에 성공한 탄탄한 각본, 현재의 북한영화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대담한 몽타주 기법 등 1960년대 북한영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1964년에 제작된 1부가 4·19혁명을 다루고 있다면 그 이듬해에 제작된 2부에서는 놀랍게도 현재진행형이었던 6·3항쟁(한·일회담 반대투쟁)까지 재현하고 있다. 이는 5·16 군사 쿠데타로 4·19혁명을 제대로 재현한 적 없는 남한영화의 현실을 생각해볼 때 부럽기조차(?) 한 일이다.

<성장의 길에서>

‘불후의 고전적 명작’과 북한영화의 전성기

1970 ~ 80년대

그러나 북한 영화사는 최초의 극영화 <내 고향>도, 혁명적 대작 <성장의 길에서>도 자신들 영화의 혁명전통에서 맨 위에 놓지 않는다. 그 자리는 언제나 청년 김일성이 항일유격대 시절 직접 창작했다는 ‘불후의 고전적 명작’이 차지하고 있다. 영화뿐 아니라 소설, 연극, 가극 등 모든 예술의 형태로 개작되는 이 작품들은 <피바다>(1969), <꽃 파는 처녀>(1972), <한 자위단원의 운명>(1975),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1979) 등으로 이어진다. 이 영화들이 북한 영화사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과정은 김일성이 주체사상을 통해 유일체제를 확립하는 시기, 김정일이 후계자로 인정받는 시기, 북한 문학예술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서 주체사실주의로 넘어가는 시기와 겹친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사회구조와 인간행위의 변증법적 과정을 균형 있게 바라본다면 주체사실주의는 ‘사람 중심’의 주체사상답게 인간의 의식성과 행위성을 지고의 가치로 여긴다. 이것은 영화를 포함한 예술작품에서 수령과 당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어떤 구조적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극도의 주관주의적 인물로 뻗어나간다. 한편, 김정일이 집필했다는 <영화예술론>(1973)은 특유의 ‘종자론’을 펼쳐, 1970년대 이후 영화뿐 아니라 모든 문학예술의 규범이 되었다. 여기에서 종자란 작품의 사상적, 예술적 핵이며 종자를 제대로 심으면 주제와 사상이 식물이 성장하는 것처럼 발전한다는 논리다. 종자가 제대로 뿌리내려야만 예술의 생산속도를 높이는 ‘속도전’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영화가 교조적인 대작 중심의 영화들이었다면 1980년대는 두개의 대조되는 갈래를 보여준다. 그 하나는 ‘수령 형상’ 영화이고, 또 하나는 ‘숨은 영웅 형상’ 영화이다. 이전 영화들에서 김일성은 대사로 설명되거나 상징적인 암시로 드러날 뿐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김일성이 드디어 캐릭터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이 10부작 영화 <조선의 별>(1980~87)이다. 1920~30년대 청년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다룬 이 영화는 오늘날까지도 영화관, TV 등을 통해 북한 인민들이 가장 많이 본 영화로 기록된다. ‘불후의 고전적 명작’을 도맡아 제작해온 백두산창작단의 이 연작영화는 4·15문학창작단이 김일성 가계인물의 ‘혁명투쟁사’를 충실히 서술한 수령 형상 문학의 전범 <불멸의 력사> 총서와 그 궤를 같이한다. <조선의 별>은 그 후속 연작인 5부작 <민족의 태양>(1987~91)으로 이어졌다.

이에 반해 숨은 영웅 형상 영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일터를 가꾸는 소박한 인물들을 예찬한다. <려단장의 옛 상관>(1984), <설한령의 세 처녀>(1985) 등이 대표작이지만 가장 유명한 영화는 남한에도 잘 알려진 여배우 오미란을 1980년대 북한영화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준 <도라지꽃>(1987)이다. 오미란이 연기한 송림은 애인이 도시로 떠난 고향마을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산간마을을 개간하는 여성으로서 도시와 농촌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북한 사회에서 인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 농촌 영웅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위 두개의 형상 영화라는 북한 관제 영화사의 시각을 벗어나면 1980년대는 북한 영화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다. 먼저 남한 출신 감독 신상옥의 등장을 들 수 있다. 납북됐다가 다시 남한으로 탈출한 신상옥은 물론 북한의 공식 영화사에선 철저히 지워진 존재다. 그의 북한 시절을 북한 영화사의 독립된 한 시기로 구분하는 남한의 북한영화 연구자가 더러 있지만 이는 과장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북한영화에 끼친 상당한 영향을 부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신상옥이 북한에서 연출한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사랑 사랑 내 사랑>(1984), <소금>(1985), <불가사리>(1985) 등의 영화적 우수성은 차치하고라도, 집단창작을 중시하는 북한에서 개인 예술가의 개성을 강조한 점, 북한영화에서 좀처럼 없었던 애정표현 장면을 과감히 실험한 점 등은 확실히 변화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영향이었는지는 모르지만 1980년대 중·후반은 북한영화가 가장 오락적이었던 시기다. 1950년대 후반 이후 명맥이 끊겼던 전통 소재 영화가 부활했고, 특히 <홍길동>(1986), <림꺽정>(1987) 등은 액션과 결합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홍길동>에는 홍콩 특수효과팀이 참여하기도 했다). 확실히 액션은 1980년대 북한영화의 한 경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남한의 통합진보당 일부 당원들이 ‘수령님’(‘장군님’)에 대한 들끓는 사랑으로 감명 깊게 봤다는 <월미도>(1982)처럼 비장한 전쟁 스펙터클뿐 아니라, 남파 특수부대원들의 종횡무진 맹활약을 그린 <명령 027호>(1986)는 같은 시기 수명을 다한 남한의 국책 전쟁영화 <아벤고 공수군단>(1982)이나 <블루 하트>(1987)보다 오락적인 면에서 나으면 나았지 뒤지지 않는다.

<정방공>

<민족과 운명> 연작 그리고 고립화의 길

1990년대 이후

‘해빙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는 고립된 북한에 극도의 ‘자주노선’을 가져오게 했고 영화도 1980년대의 활력을 잃고 점점 교조화됐다. 김정일이 야심차게 기획한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1992~)은 남한, 일본,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패와 타락을 질타하면서 자국 인민들에게 ‘조선민족제일주의’를 강요했다. 더 나아가 북한 바깥에서는 거의 상영된 적 없는 이 내수용 영화를 놓고 “<민족과 운명>은 세계적인 걸작”이며 세계 인민들이 탄복해 마지않는 영화라는 밑도 끝도 없는 자화자찬을 내놓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군대를 최우선으로 하는 ‘선군정치’를 내걸고 헌신적인 군인들의 모습을 담은 ‘선군영화’ <복무의 길>(2001), <녀병사의 수기>(2003), <철령의 대대장>(2003) 등이 등장하는데, 범박하게 말해 1980년대 숨은 영웅 형상 영화의 군대 버전이라 할 만하다. 용맹한 전사로서보다 ‘인민의 벗’으로서 군인의 모습을 강조한다. 2000년대 나온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는 <한 녀학생의 일기>(2006)일 것이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북한 청소년을 그린 영화로서 칸국제영화제(필름마켓)에서 상영된 최초의 북한영화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북한영화의 역사와 미학은 온전히 김정일의 ‘영도’하에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1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북한영화는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 그것은 현 김정은 체제가 아버지 시절보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덜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미 1990년대 이후 지속된 고립화와 그에 따른 경직된 교조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국제무대에 처음 등장한 김정은의 행보가 북한영화에 자유와 개방의 물결을 가져올 수 있을까?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중국 제5세대 영화 탄생의 역사적 토대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조심스레 기대해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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