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의 위협에서 한반도를 구하더니 이번엔 통일에 반대하는 테러단체와 맞선다. <강철비>(2017)에 이어 <인랑>을 선택한 배우 정우성의 필모그래피 시계는 정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두 작품의 시대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우연”은 <인랑>의 출연진 중 오직 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극중 정우성이 연기하는 장진태는 반정부 테러단체 섹트에 맞서는 경찰조직 특기대의 브레인이다. 다른 이들보다 몇수 앞서 판을 읽고 전략을 세우는 그의 치밀함은 <인랑>의 이야기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인랑>으로 김지운 감독과 11년 만에 재회했다.
=<강철비>를 촬영하기 직전쯤 감독님의 연락을 받았다. 작은 배역인데 맡겨도 될까 하며 조심스럽게 연락하신 것 같더라. 마침 ‘센’ 작품들을 연달아 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부담 없이 <인랑>을 선택했다. 김지운 감독은 물론 <아수라>(2016)를 함께한 이모개 촬영감독 등 스탭들에 대한 신뢰도 컸고. 다시 만난 감독님은 많이 유연해지셨더라. 다른 친구들은 감독님이 현장에서 말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땐 굉장히 말수가 늘었다. (웃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이하 <놈놈놈>)을 함께 작업할 때에는 고민을 뚫고 나오려는 치열함을 보았다면 <인랑> 현장에서는 그 고민 안에서 굉장히 유연해진 감독님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훈련소장 장진태는 경찰조직 특기대의 브레인이다. 이전까지 장기판의 말처럼 움직이는 인물들을 주로 연기했다면 이번에는 판을 짜고 전략을 세우는 역할을 맡았다.
=<아수라>의 한도경이 삶의 주관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인물이었고, <강철비>의 엄철우가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움직이는 인물이었다면 <인랑>의 장진태는 자기만의 확고한 신념 안에서 진짜 판을 내다보는 사람이다. 우연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작품을 거듭할수록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관점이 점점 더 확장되는 느낌이라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우리는 늑대의 탈을 쓴 인간이 아니고 인간의 탈을 쓴 늑대”라는 대사처럼 장진태의 말은 특기대의 정체성과 철학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진태의 대사를 어떤 느낌으로 전달해야 할지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인랑>의 대사는 문학적이다. 특유의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대사를 살리면서 너무 과하지 않은 톤으로 관객에게 장진태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했다. 김지운 감독과 함께 장진태의 목소리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찾아갔다.
-후배 강동원과의 협업이 <인랑>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라고 들었다.
=강동원과 한효주의 멜로 연기는 <인랑>의 중요한 플롯 중 하나다. 두 후배 사이에서 내가 작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임중경을 연기하는 동원이의 경우 참 연기하기 어려운 캐릭터를 맡았구나 싶었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강인한 전사가 되어야 하는 조직 내에서의 현실, 공작에 휘말리는 상황 등 레이어가 많은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는 걸 응원하고 지켜본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최근 몇년간 정우성의 행보는 스크린 밖에서도 화제가 됐다. 영화계 블랙리스트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고, 세월호 다큐멘터리 <그날, 바다>(2018)의 내레이션을 맡았으며, 난민 문제에 대한 소신 발언을 이어갔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사회 이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계기는.
=개인적인 계기보다 시대로부터 비롯된 계기가 컸다. 구성원의 다양한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았던 시대를 거치며 배우이기 전에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인가, 라는 질문을 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냈을 뿐인데 인지도를 가진 배우이다보니 더 강렬하게 비쳐진 것 같다.
-<인랑>의 배경이 되는 2029년쯤에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11년 금방 간다. (웃음) 11년 전 <놈놈놈>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김지운 감독과 다시 <인랑>을 작업했지 않나. 그때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차기작 <증인>(감독 이한)의 촬영을 올여름 시작할 예정이다.
=살인사건 변호를 맡은 변호사가 사건 현장을 목격한 자폐 소녀와의 교감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따뜻한 이야기다. 최근 몇년간 격동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인물들을 주로 연기하다보니 스스로 위로를 찾고 싶어서 선택한 작품이다. 대중에게도 따뜻한 위로가 되는 작품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