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름 극장가 대격돌①] 김지운 감독의 <인랑>,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원작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어떻게 영화로 도약했는가
2018-08-01
글 : 장영엽 (편집장)
허를 찌르는 시각적 활력, 그 에너지를 즐기다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애니메이션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오시이 마모루는 원래 <인랑>을 실사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루머에 따르면 제작사 반다이 비주얼은 그가 실사영화의 연출을 맡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인랑> 이전에 오시이 마모루가 연출한 두편의 실사영화, <붉은 안경>(1987)과 <케르베로스: 지옥의 파수견>(1991)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이다. 혼란의 일본 사회 속에서 범죄자들을 과격하게 진압하는 특수경찰조직, ‘특기대’를 조명한 오시이 마모루의 SF 시리즈 ‘케르베로스 사가’의 시작을 알렸던 이들 영화는 대중과 평단에 처참히 외면당했다. 그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제작비에 맞추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영화계의 생리에 익숙지 않았던 오시이 마모루는 자신이 연출을 맡은 두편의 실사영화에서 프로덕션을 효과적으로 운영하지 못했다. 또 다른 문제는 오시이 마모루의 작품 세계가 영화라는 매체에 유기적으로 섞여들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후 수많은 마니아를 양산했던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철학적인 독백은 영화 관객에게 파편적이고 혼란스럽게만 느껴졌던 듯하다. 이처럼 위험 부담이 큰 실사영화 대신 반다이가 오시이 마모루에게 제안했던 건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였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은 오시이 마모루는 <인랑>의 실사화를 포기하고 자신은 기획과 각본에 관여하는 것으로 물러났다. 애니메이션 <인랑>의 감독직은 결국 <아키라>의 원화가이자 <공각기동대>의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던 오키우라 히로유키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애니메이션 <인랑>은 ’케르베로스 사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 중 하나로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전한 대체 미래, 패전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하는 혼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살인 병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한 남자의 분열적인 내면과 갈등을 음울하면서도 독창적인 필치로 그려냈다는 평을 들었다.

원작의 시공간을 바꾸다

비주얼과 무드를 중시하는 감독 김지운이 애니메이션 <인랑>에 매료된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원작 <인랑>은 서사보다 각 장면이 품고 있는 몽환적인 정서와 강렬한 이미지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폭탄이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는 빨간 망토의 테러리스트 소녀, 총알도 튕겨내는 단단한 강화복과 철모 속에 정체를 숨긴 붉은 눈의 인간 병기들, 불타는 시가지와 엉망이 된 거리들.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특정한 이미지로부터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창작자 김지운에게, 애니메이션 <인랑>이 선보인 잊을 수 없는 디스토피아의 이미지는 영화 <인랑>의 제작을 결심하도록 이끈 결정적인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김지운을 매료시킨 건 그동안 <로보캅> <아이언맨> 등의 할리우드영화에서나 주로 볼 수 있었던 파워 슈트를 한국영화에서 구현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지하 수로를 배회하는 강화복 차림의 특기대원들. 인간보다는 기계에 가까워 보이는 이 존재들의 이질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셰이프를 한국 관객에게 선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그를 <인랑>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인랑>의 영화화 이전에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대체역사 속 혼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원작의 시공간을 한국 관객에게 어떤 방식으로 납득시킬 것인가?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여기서 과감한 변화를 준다. 영화 <인랑>의 배경은 남북한이 통일을 준비 중인 2029년의 한국 사회다. 한반도의 세력화를 견제하기 위해 강대국들은 경제적인 압박을 가하고, 경제 불황으로 위기에 빠진 한국 사회에서 통일에 반대하는 테러리스트 집단 ’섹트’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한 새로운 경찰조직 특기대, 기존의 권력 기관인 공안부의 견제와 갈등이 심화된다는 설정이다. <인랑>의 주인공 임중경(강동원)은 우연한 계기로 세 집단의 복잡한 관계에 휘말리게 된다. 자신의 눈앞에서 자폭한 섹트 출신 빨간 망토의 테러리스트 소녀(신은수)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전직 특기대원이자 공안부 차장이 된 친구 한상우(김무열)가 건네준 소녀의 유품에서 언니로 추정되는 여성의 사진을 발견한 임중경은 그녀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빨간 망토 소녀와 닮은 그녀의 이름은 이윤희(한효주)다. 그런데 이윤희에게는 감춰진 사연이 있다.

“왜 쏘지 않았어?” 원작 <인랑>에서 주인공의 친구는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빨간 망토 소녀가 폭탄을 터뜨려 테러를 가하기 전, 너는 왜 그녀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냐고. 살인 병기로 길러진 남자를 머뭇거리게 한 찰나의 순간에 대한 윤리적 질문은 원작 <인랑>이 작품에서 몇번이고 되묻는 질문이자 가장 중요한 물음이다. 영화 <인랑>은 이러한 주인공의 내면적 갈등을 조직이 개인에게 가하는 위력의 상황으로 치환한다. 영화 속 임중경은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대신, 섹트와 특기대, 공안부라는 외부 집단들이 벌이는 파워 게임에 휘말린다. 극중 끊임없이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는 임중경과 이윤희는 결국 조직의 이권에 따라 다른 위치에 놓이는 장기판의 말일 뿐이다. 인물의 내면적 갈등보다 조직간의 암투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각색의 초점을 맞춘 영화 <인랑>은 원작에 비해 첩보물로서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사건과 상황을 좇다보면 자연스럽게 인물의 동기가 드러나는 연출 방식은 김지운 감독이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시도한 접근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직과 개인의 갈등을 통해 주인공의 성장을 보여주려 하는 영화 <인랑>의 선택에는 뚜렷한 장단점이 있다. 장점은 일단 시각적으로 보여줄 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특기대와 경쟁 관계에 있는 공안부의 극중 비중이 늘어나면서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하는 총격전과 고공낙하 시퀀스, 영화의 후반부 지하 수로에서 특기대와 공안부가 펼치는 서바이벌 액션 등의 볼거리가 한층 더 풍성해지고 화려해졌다. 더불어 임중경에게 아버지와도 같은 특기대 훈련소장 장진태(정우성)의 존재감은 원작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내며 톱스타 정우성과 강동원의 대결이라는 관전 포인트를 제공한다. 단점은 한 영화에서 소화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세 집단의 동선을 바쁘게 쫓다보면 등장인물의 감정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인랑>의 시사 뒤 임중경과 이윤희의 로맨스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건 첩보전과 멜로의 서사가 효과적으로 결합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임중경의 인간다움이 부각되는 영화의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에서도 그는 두 사람(자세히 얘기하면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인물보다 프로세스에 주목한 김지운 감독의 변화는 이 영화에 활력과 피로감을 함께 가져온 듯하다.

시각적 볼거리를 기대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케르베로스 사가’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실사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충무로의 A급 스탭들이 완성한 강화복과 다양한 화기, 새롭게 해석한 공간들은(이어지는 <인랑> 제작기 참조)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시각적 볼거리들을 만들어냈다. <빨간 모자>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동화적인 내레이션과 원작의 추상적이고 파편화된 이미지 등의 만화적인 상상력도 상업영화의 포맷으로 비교적 깔끔하게 재단되었다. 완벽한 만듦새의 상업영화를 기대했다면 아쉬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참신한 시각적 쾌감을 기대했던 관객에게 <인랑>은 올여름의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허를 찌르는 시각적 활력, 그것이 바로 김지운 영화의 에너지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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