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름 극장가 대격돌②] <인랑> 제작기_ 액션, 스파이,멜로 그리고 디스토피아
2018-08-01
글 : 김현수
이모개 촬영감독, 조화성 미술감독, 모그 음악감독

김지운 감독이 또 한번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을 했다. 동명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하는 프로젝트 <인랑>은 어떤 식으로든 한국 SF영화 역사에 한획을 그었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케르베로스 사가’라는 이름으로 실사영화, 애니메이션, 만화에 이르기까지 십수년에 걸쳐 만들어왔던 세계는 강대국들이 이권 다툼을 하는 동북아 정세에 휩싸인 2024년의 한국으로 바뀌었다. 과연 그 결과물은 어떤 고민을 통해 만들어졌을까. 기획 단계 때부터 새로운 독자적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고심했던 이모개 촬영감독, 조화성 미술감독, 모그 음악감독으로부터 영화의 제작과정을 둘러싼 이모저모를 들어봤다.

황폐한 서울 시내 뒷골목을 묘사한 <인랑>의 컨셉 아트와 실제 장면.
황폐한 서울 시내 뒷골목을 묘사한 <인랑>의 컨셉 아트와 실제 장면.

2024년의 서울 풍경

<인랑>의 시대 배경은 전운이 감도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남과 북이 생존 전략의 일환으로 통일을 전격 발표하고 5년의 준비기간을 두기로 한 2024년에서 2029년 사이의 시기다. 처음엔 유신 정권 시대를 고려하기도 했지만 “현실 기반의 하이테크 미래보다는 자원이 고갈되고 낙후된 세기말의 풍경을 보여주는” (조화성 미술감독) 미래로 가닥이 잡혔다. 민주시민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광화문이 반통일 테러단체 섹트의 폭력 시위로 폐허처럼 보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이같은 풍경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조직원들에게 폭탄을 나르는 소녀 재희(신은수)를 따라 펼쳐지는 뒷골목 거리는 조화성 미술감독에 따르면 “변두리 빈민가처럼 보이게끔” 디자인했다. 휘황찬란한 상상 속 미래 도시의 마천루는 <인랑>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재희의 죽음으로 연을 맺게 된 특기대 소속 임중경(강동원)과 재희의 언니 이윤희(한효주)가 남산타워에서 만나 성수동 책방으로 이동하는 장면은 처음으로 둘 사이의 드라마를 형성해야 하는 장면. 이때 보이는 서울 풍경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만난 두 사람이 약간의 여유를 즐기지만 결국 시대의 암울한 환경을 만나는 공간” (조화성 미술감독) 이다. 모그 음악감독에 따르면 이 장면은 “복고풍의 멜로가 떠오르는 장면”으로 김지운 감독이 엔야의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추천했다. 이모개 촬영감독이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결정할 때는 <블레이드 러너>(1982)나 <칠드런 오브맨>(2006)의 풍경을 참고했다. “<블레이드 러너>의 거리 조명과 이상한 색감처럼 일상과는 다른 색감을 내기 위해” 후반 색보정 작업도 오랫동안 진행했다. “테스트 촬영 때 윤희와 보라색이 어울린다는 김지운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도시 전체에 보라색을 입혀봤다. 아마도 미래의 밤은 보라색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모개 촬영감독)

강화복을 착용한 임중경(강동원)과 한상우(김무열)의 특기대 시절 모습
캐릭터 디자이너 에디 양이 원작의 디자인 중 가장 공들여 만든 투구 모습

특기대와 인랑, 가장 중요한 설정

혼란스러운 치안을 다스리기 위해 신설된 경찰 조직 내 가상의 조직, 수도경비 특수기동대, 일명 특기대는 원작 애니메이션의 존재감을 거의 복사하듯 그대로 이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강화복의 디자인은 <아이언맨>의 슈트를 담당했던 얼라이언스 스튜디오의 캐릭터 디자이너 에디 양의 손을 거쳐 재탄생했다. 이미 <로보캅>(2014) 리메이크 슈트 디자인에도 참여한 전력이 있는 그는 원작의 디자인을 그대로 3D프린팅해서 주형을 뜬 다음 40여벌의 슈트를 제작했다. 실제 이 강화복의 무게는 거의 40kg에 육박하는데 촬영 내내 배우들이 직접 입고 액션을 펼쳤다. 방탄, 방호 등의 기능이 탑재된 강화복을 입은 특기대원들은 테러조직 섹트와 공안부 요원들과 여러 차례 대치 상태에 놓인다. <인랑>의 액션을 담당하고 있는 특기대 내 ‘인랑’이라는 사조직은 무시무시한 암살 계획을 서슴지 않는 킬러들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랑>의 액션은 크게 특기대원들의 훈련 장면과 남산타워와 지하 수로에서의 총격전, 그리고 후반부 다찌마와리 액션 등으로 나뉜다. 사실 원작에는 강화복을 입은 인물들이 서로 액션을 주고받는 장면이 없다. 이모개 촬영감독에 따르면 “촬영하던 중에 타격감이 있는 액션이 추가되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김지운 감독도 후반부 지하 수로 장면을 촬영하던 중 약간의 타격 액션을 찍어본 뒤에 힘을 받아 추가됐다. 강동원, 정우성 두 배우가 만들어가는 엄청난 후반부 액션은 그렇게 탄생했다. 게다가 정우성은 현장에서 스턴트 대역을 쓰지 않았고 본인이 직접 액션 연기를 하겠다고 자처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강화복을 옷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해보니 히어로의 슈트 같은 느낌이 들더라.” (이모개 촬영감독) 참고로 <인랑>에는 16종, 44점의 총기가 등장한다. 섹트는 반정부 무장단체 조직이기에 베트남전에 사용됐던 AK 소총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사용했던 란체스터 기관단총 MK1 등이 쓰였고 공안부 차장 한상우(김무열)는 M4카빈 소총을 주로 사용한다. 공안부는 남산타워에서 Glock17, MP-5k, MP-5A5 기관단총을 사용한다. 후반부에 공안부는 PGF3 로켓포까지 사용한다.

고대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의 분위기마저 풍기는 영화 속 특기대의 훈련 공간.

첩보전, 비극적 서사의 굴레를 강조하라

김지운 감독의 <인랑>은 원작의 다른 요소는 윤색하되, 첩보전의 색깔은 ‘확장’시켰다. 공안부장 이기석(허준호)은 성공에 눈이 먼 부하 한상우를 내세워 특기대 해체 스캔들을 만들려고 작전을 펼치는데 이들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은 공안부 건물 내부다. 그리고 공안부의 움직임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추격전을 벌이는 특기대 김철진(최민호)과 섹트 대원 구미경(한예리)의 공간은 주로 낮의 서울 골목. 이들이 각각의 공간에서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역시 미술과 촬영, 음악에 힘입어 더욱 극대화된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공안부의 실내를 통해서 “기능성에 입각한 날카롭고 칼에 베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벽의 질감을 표현했고, 김철진과 구미경의 낮 추격 장면에서는 “각각의 인물들이 건조하게 앞만 보며 걷는 와중에 어두컴컴하고 고통 속에 내몰리는 갑갑함”을 표현했다. 영화에 묘사되는 서울 시내 거리가 온갖 정치 선전 벽보들로 뒤덮여 있는데 이는 조화성 미술감독이 “거리의 벽보를 어떤 시대의 현상처럼 느끼도록” 유도한 장치다. 갑갑한 첩보전의 현실인 서울의 뒷골목은 특히 김철진과 구미경은 원작에는 없는 새로운 캐릭터라서 이들의 추격전은 김지운식 누아르 첩보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모개 촬영감독이 <인랑>의 첩보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김지운 감독과 이야기했던 레퍼런스 영화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2011)다. “경찰과 공안부 간부들이 만나 회동하는 이발소 장면에서도 첩보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장면을 비롯해 카메라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찍어보기도 했다. 실제 영화에 쓰인 촬영은 약간의 카메라 움직임이 들어갔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투사 구미경(한예리)이 활약하는 뒷골목은 2024년 서울의 낮과 밤을 대변하는 장소다.
공안부장 이기석(허준호)의 집무실은 2024년 서울의 낮과 밤을 대변하는 장소다.

<인랑>이 공간을 통해서 각자의 비극적 상황, 스파이들의 굴레를 좀더 강조하고 있다면 한상우가 처음 임중경을 만나 희생된 소녀의 다이어리를 건네주는 공간, 그리고 후반부 서로 속고 속이던 인물들끼리 이해관계가 얽히는 공간은 폐허가 된 고대 원형 경기장의 느낌을 선사한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이 공간을 “주요 인물들의 자기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는 공간, 일종의 법정”으로 해석하고 실제보다 더 낡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건물 안에 시멘트 벽을 뚫고 홀로 서 있는 나무가 보인다. 메마른 땅에서 힘겹게 버티고 선 개인의 모습 같기도 한데 김지운 감독의 아이디어였다.” (조화성 미술감독) 그런데 이 비정한 김지운식 첩보전의 가장 큰 희생자는 임중경일까, 이윤희일까. 모그 음악감독은 두 사람의 가슴 밑바닥에 남겨져 있는 앙금을 “전파음 같은 노이즈로 표현했다”. 임중경이 처음 한상우로부터 다이어리를 건네받고 이윤희와 이상한 추격전으로 휘말려들 때까지 “가라앉은 주스 앙금을 흔들 때의 느낌으로” 음악을 입혔다. “이윤희는 <밀정>의 이정출(송강호)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인물이다. 상황마다 그녀가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그녀가 어떻게 판단하고 처신할지가 계속 궁금해진다. 그래서 그녀의 테마는 변화무쌍하다.” (모그 음악감독)

원작의 배경과 흡사하게 재현한 지하 수로의 모습.
원작의 배경과 흡사하게 재현한 지하 수로의 컨셉 아트.

지하 수로, 어떻게 원작에 가깝게 구현할까

지하 수로는 원작 애니메이션의 핵심 공간이다. 시대의 공기를 대변함과 동시에 모든 비극적인 사건이 펼쳐지는 곳. 김지운 감독도 이 공간만큼은 오시이 마모루 감독에게 헌정하듯 원작과 최대한 가깝게 구현하려고 했다. 이모개 촬영감독은 “조명이나 색감을 어떻게 하면 가장 원작에 가깝게 만들지를” 고민했고 조화성 미술감독은 “늑대의 본질을 닮은 공간, 고통에 내몰린 당대 사람들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공간”으로서의 수로를 표현하기 위해 수로 벽면을 빨간 벽돌로 표현했다. “원작의 수로처럼 실제 퀴퀴하고 음습한 공간보다는 오히려 컬러감을 부여하는 것이 2029년 서울의 부정적인 요소를 보여주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 때문에 강동원은 처음 세트에 들어섰을 때 “마치 유럽의 건축 양식을 보는 듯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모그 음악감독 역시 이같은 미술팀의 컨셉에 맞춰 지하 수로의 테마를 “<장미의 이름> 같은 중세 배경의 영화에서 느껴질 법한 사운드 디자인을 고민했다”. 섹트 대원들과 공안부, 그리고 특기대가 뒤엉켜 서로 추격하는 장면에서는 “청각적으로 더욱 긴장감이 느껴지는 음악을” 고민했다. 특히 “수로의 좁은 통로와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마치 소리가 거대한 금관악기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도록” 디자인했다.

이 어두운 수로 안에서 테러단체 섹트 조직원들을 추적하는 특기대의 모습은 무시무시할 정도다. 지하 수로의 구불구불한 벽면에 비치는 특기대의 그림자나 물에 비치는 이미지 등 어디 하나에도 컴퓨터그래픽이 쓰인 장면 없이 거의 실제로 촬영했다. 이모개 촬영감독은 특기대가 사용하는 독일제 기관총 MG-42를 “잔인하고 냉정한 이미지로 표현하기 위해서 불을 뿜는 총구에 강렬한 스트로보 효과를 줘서 표현했다”. 조화성 미술감독이 “한국 어디에도 이런 형태의 수로는 없다. 즉 허구의 공간이다”라고 말했듯, 지하 수로는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대변하는 공간이기도 할 터. 자칫 잘못 표현하면 실사화의 당위마저 잃어버릴 뻔했던 공간은 제작진의 여러 아이디어를 통해 리얼리티를 획득했다.

액션, 스파이, 멜로를 더해

장르의 수집가다운 면모를 보여온 김지운 감독은 그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과 함께 SF액션영화에 도전했다. 심지어 이번에 그는 애니메이션을 그대로 실사화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고 SF 장르 속에 액션, 스파이, 멜로라는 이질적인 세가지 장르의 새로운 조합을 꾀했다. “김지운 감독이 우스갯소리로 이 영화는 색이 SF다, 라고 말할 정도로 색감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이모개 촬영감독의 말처럼 <인랑>이 펼쳐 보이는 미래 도시 서울의 밤 풍경은 우리가 한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상상의 디스토피아다. “한국영화계에서 장르를 변주하는 거의 유일한 감독”이라는 조화성 미술감독의 말처럼 김지운 감독이 시청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비정한 미래는 이제 관객의 선택만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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