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31회 도쿄국제영화제①] ‘예술영화’와 ‘대중영화’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2018-11-14
글 : 이주현
영화의 기쁨을 나눈다
연출작 <더 화이트 크로>를 들고 도쿄국제영화제를 찾은 레이프 파인즈.

제31회 도쿄국제영화제가 10월 25일부터 11월 3일까지 도쿄 롯폰기 일대에서 열렸다. 개막작은 브래들리 쿠퍼의 <스타 이즈 본>, 폐막작은 시즈노 고분, 세시타 히로유키 감독이 연출한 애니메이션 <고질라: 별을 먹는 자>였다. 대중적인 할리우드영화와 일본 괴수물의 자존심인 <고질라> 시리즈를 개·폐막작으로 선정한 데서 최근 도쿄국제영화제의 지향점을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외신 기자들은 이것이 상징하는 바를 잘 알았다. 히사마쓰 다케오 도쿄국제영화제 페스티벌 디렉터와 외신 기자들이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관련 질문이 나왔다. “(심지어 아시아 프리미어도 아닌) 할리우드영화 <스타 이즈 본>을 개막작으로 선정한 데는 어떤 의미가 있나?” 히사마쓰 다케오 페스티벌 디렉터는 기자들의 직구를 정직하게 받았다. “특별한 의도는 없다. 관객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선정했을 뿐이다.” 야타베 요시 경쟁부문 프로그래밍 디렉터도 말했다. “관객에겐 근사한 개막작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올해만이 아니다. 지난해 개막작은 인기 만화가 원작인 <강철의 연금술사>(2017)였고, 2년 전은 메릴 스트립, 휴 그랜트 주연의 <플로렌스>(2016)였고, 2014년엔 디즈니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2014)가 개막작이었다. ‘예술영화’와 ‘대중영화’의 경계를 지우려는 시도는 최근 도쿄국제영화제가 보여준 행보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다. ‘영화의 기쁨을 나눈다’는 기조 아래 이루어진 관객 친화적 행보는 올해도 계속되었다.

개막식 무대에 선 폐막작 <고질라: 별을 먹는 자>의 감독과 배우들.

레이프 파인즈의 연출작 <더 화이트 크로>의 상영

30회를 맞은 지난해, 히사마쓰 다케오 페스티벌 디렉터는 세개의 비전을 제시하며 영화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세 가지 비전은 확장하는(Expansive), 강화하는(Empowering), 밝히는(Enlightening)이다. ‘확장하는’은 모두에게 다양한 영화를 제공한다는 의미다. 예술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부터 상업영화를 좋아하는 일반 관객이 그 ‘모두’의 대상에 포함된다. ‘강화하는’은 관객, 창작자, 언론 등 영화제를 찾는 사람들이 긴밀히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며, ‘밝히는’은 젊은 학생 및 창작자들이 영화제를 통해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끔 미래의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영화제의 주인은 영화제를 찾는 관객이며 창작자라는 것을 분명히 한 비전이다.

도쿄국제영화제의 메인 섹션이라 할 수 있는 경쟁부문에서, 올해 관객을 위한 최고의 팬서비스 중 하나는 레이프 파인즈의 연출작 <더 화이트 크로> 상영이 아니었나 싶다. 레이프 파인즈는 도쿄국제영화제의 빅 게스트였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 <해리 포터> 시리즈로 유명한 레이프 파인즈는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도쿄를 찾았다. <더 화이트 크로>는 <코리올라누스: 세기의 라이벌>(2011), <인비저블 우먼>(2013)에 이은 레이프 파인즈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도쿄에서 <더 화이트 크로>가 처음 공개되던 날 시사회 좌석이 일찌감치 매진된 것은 물론이고 저녁에 열린 기자회견장 대기 줄도 30분 전부터 길게 이어졌다. 다행히 영화는 기대를 실망으로 바꿔놓지 않았다. <더 화이트 크로>는 소련 출신의 전설적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의 삶을 그린 전기영화다. 억압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예술적 돌파구를 찾고 싶어 했던 루돌프 누레예프(올레그 이벤코)가 소련 키로프발레단 단원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하던 중 파리 공항에서 끝내 망명을 신청하는 사건이 영화의 중심 서사다. 루돌프 누레예프가 예술의 도시 파리에 속절없이 매료되듯, 관객은 루돌프의 압도적인 춤에 사로잡히고 만다. 예술가의 세계로 인도하는 중요한 장치가 곧 예술(발레)인 영화였기에, “연기를 잘할 수 있는 훌륭한 발레 댄서를 찾는 일이 중요했다”는 레이프 파인즈의 말은 당연해 보였다. 아쉽게도 루돌프를 연기한 올레그 이벤코에겐 남우주연상이 돌아가지 않았지만, 레이프 파인즈는 <더 화이트 크로>로 예술공헌상을 수상했다.

옴니버스 프로젝트 ‘아시안 스리-폴드 미러 2018: 여행’의 감독들이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경쟁부문 16편의 영화에는 프루트 챈의 신작도 있었다. 그러나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신작 <세명의 남편들>은 과도한 노출 신과 섹스 신의 의미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평을 들어야만 했다. 두편의 일본영화도 경쟁부문에서 상영됐다. 우선 이마이즈미 리키야 감독은 <종이달>의 원작자로 유명한 가쿠타 미쓰요의 소설을 각색한 멜로영화 <저스트 온리 러브>를 선보였다. 사랑으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감정을 세심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사카모토 준지의 <어나더 월드>는 특별한 야망을 가지기엔 너무 늦은 나이 같고, 그렇다고 야망을 포기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 같은 40대의 남자 동창 세명이 친구와 가족을 통해 삶을 돌아보는 이야기다. 야타베 요시 프로그래밍 디렉터가 “올해 최고의 일본영화 중 한편”이라고 언급한 <어나더 월드>는 이나가키 고로, 하세가와 히로키 등 스타배우들이 출연한 덕인지 관객상을 수상하며 보편적 드라마로서의 매력을 인정받았다.

도쿄국제영화제의 경쟁부문은 젊은 신인감독들을 대상으로 한 경쟁이 아니다. 야타베 요시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자국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더 인정받을 필요가 있는 중간 경력 감독들을 위한 장이 도쿄의 경쟁부문”이라면서 “올해도 좀더 주목받을 필요가 있는 감독들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야타베 요시는 또한 올해 경쟁작 16편 중 8편만이 월드 프리미어 상영인 것에 대해서도 솔직한 의견을 들려주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더 많은 월드 프리미어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하지만 영화 관계자가 아닌 평범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어쩌면 월드 프리미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에겐 영화가 재밌는 게 더 중요할지 모른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제도, 장르도, 스타일도 각양각색인 16편의 영화만큼 경쟁부문 심사위원의 면면도 다채로웠다. 올해 도쿄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5명은 필리핀의 영화감독 브리얀테 멘도사(심사위원장), 할리우드 프로듀서 브라이언 버크, 이란의 배우 타라네 알리두스티, 일본 배우 미나미 가호, 홍콩의 감독이자 제작자 관금붕이다. 히사마쓰 다케오 페스티벌 디렉터는 심사위원단의 조합을 이렇게 설명했다. “필리핀에서 독립예술영화를 만드는 브리얀테 멘도사 감독과 할리우드에서 <미션 임파서블>과 <스타워즈> 시리즈를 제작한 브라이언 버크 프로듀서가 같은 영화를 보고 어떤 얘기를 나눌지 너무 궁금하다. (웃음) 영화의 다양성만큼 심사위원의 다양성이 흥미로운 결과를 가져다주리라 기대한다.” 심사위원들의 생각도 비슷해 보였다. 브라이언 버크 프로듀서는 심사위원 기자회견장에서 “영화를 만든 감독이 누구인지,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지, 의도적으로 알지 않으려 했다. 아마도 우린 좋은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영화산업에서 쉬운 일이란 없다. 그러니 경쟁부문에 선택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들은 대단한 거다”라는 말로 영화에 대한 기대를 피력했다. 브리얀테 멘도사 역시 비슷한 말을 했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다. 어떤 영화적 마법이 펼쳐질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이드 라인을 따르기보다 그 영화가 얼마나 마음을 움직이는지, 또 어떻게 영화적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에겐 영어가 아닌 영화라는 공통의 언어가 있었다.

경쟁부문 심사위원단. 브라이언 버크, 미나미 가호, 브리얀테 멘도사, 타라네 알리두스티, 관금붕(왼쪽부터).

도쿄국제영화제는 아시아영화계와의 네트워킹 강화에도 꾸준히 힘쓰고 있다. 2년 전 첫선을 보인 옴니버스 프로젝트 ‘아시안 스리-폴드 미러’(Asian Three-Fold Mirror)는 아시아 영화 창작자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올해는 중국의 대그나 윤 감독, 일본의 마쓰나가 다이시 감독, 인도네시아의 에드윈 감독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옴니버스 ‘아시안 스리-폴드 미러 2018: 여행’을 통해 세 감독은 각각 <바다> <헤키슈> <세 번째 변수> 라는 단편을 선보였다. 인도네시아 감독이 일본에서 일본의 스탭과 촬영을 하고, 일본 감독이 미얀마에서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해 일본 영화의 감성이 묻어나는 영화를 만드는 등 세 감독은 나라별 제작환경의 차이를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반영해 작품을 완성했다. 창작자들에게 다양한 콜라보레이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결국 아시아 영화계에 대한 장기적 투자로 이어진다. 아시안 퓨처는 젊고 재능 있는 아시아 감독들의 작품을 상영하는 경쟁 섹션인데, 대그나 윤 감독의 전작 <고별>(2015)이 2015년 도쿄국제영화제 아시안 퓨처에서 상을 받았다. 그때의 인연이 ‘아시안 스리-폴드 미러 2018: 여행’까지 이어진 셈이다. 참고로 올해 이 섹션에는 이지원 감독의 <미쓰백>이 초청됐다. <미쓰백>은 올해 도쿄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영화로, 아시안 퓨처 상영작 중 빠르게 표가 매진된 작품 중 하나다. 이시자카 겐지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밍 디렉터는 “올해 도쿄에서 상영되는 아시아영화들 중에는 마이너리티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영화들이 많았다”면서 “한국의 <미쓰백> 또한 여성의 목소리, 아동학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상적인 영화”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도쿄는 계속해서 젊은 재능을 발굴하고 소개하고 지원해왔다. 영화제에서의 상영과 수상은 젊은 감독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고 경험이 될 것이다”라며 젊은 창작자들에 대한 지원이야말로 영화제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도쿄국제영화제가 주목한 애니메이션 감독은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등으로 유명한 유아사 마사아키 감독이다.

야쿠쇼 고지가 말하는 현장 이야기

‘영화의 기쁨’을 관객과 나누기 위해 도쿄국제영화제가 마련한 기획전에는 ‘액터 인 포커스: 야쿠쇼 고지’와 ‘더 월드 오브 유아사 마사아키’도 있었다.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2017),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2017)를 만든 유아사 마사아키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손꼽힌다. 영화제 기간 유아사 마사아키는 신작 계획도 발표했다. 차기작의 가제는 <너와 함께 파도를 탈 수 있다면>. 서핑을 통해 가까워지는 두 남녀의 “심플 러브 스토리”라고 한다. 야쿠쇼 고지 기획전에선 <쉘 위 댄스>(1996), <우나기>(1997), <큐어>(1997) 등 5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5편의 영화 상영이 모두 끝난 뒤 야쿠쇼 고지와 관객과의 대화 자리가 마련됐는데, 그때마다 야쿠쇼 고지는 영화현장의 경험을 친절하게 들려주었다. 이를테면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 상영 전 열린 토크쇼 자리에서 영화의 제목인 ‘뱀장어’에 얽힌 비화라든지, 칸국제영화제에서 <우나기>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당시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 대신 무대에서 상을 받게 된 과정이라든지. 야쿠쇼 고지는 두눈을 반짝이며 과거의 기억을 하나하나 꺼내 들려주었다.

올해 배우 기획전의 주인공은 야쿠쇼 고지. <큐어>의 구로사와 기요시(왼쪽) 감독과 야쿠쇼 고지가 영화 상영 뒤 관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관객과 영화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아시아영화계와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일본영화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제시하는 장이 되었던 도쿄국제영화제는 지난 11월3일 10일간의 축제를 마무리지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하이국제영화제 등 아시아의 다른 국제영화제와 도쿄국제영화제를 비교하는 시선도 많았지만, 히사마쓰 다케오 페스티벌 디렉터는 “다른 국제영화제들과 경쟁하기보다는 여러 협업을 통해 아시아의 영화산업을 함께 키워나가면 좋지 않을까”라는 말로 상생의 계획을 공유했다. “도쿄가 많은 것이 혼합된 독특하고 흥미로운 도시인 것처럼, 도쿄국제영화제도 도시의 특성을 반영해 고유하면서도 유니크한 영화제가 되려 한다.” 마침 영화제와 핼러윈 기간이 겹쳐, 롯폰기의 거리는 온갖 개성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점령했다. 기꺼이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인 도시. 그곳에서 도쿄국제영화제는 다시 내년을 기약했다.

올해 도쿄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유일한 한국영화인 <미쓰백>의 이지원 감독.

제31회 도쿄국제영화제 수상 결과

경쟁부문

도쿄 그랑프리_ <아만다> / 심사위원 특별상_ <비포 더 프로스트> / 감독상_ <더 바이스 오브 호프> 에도아르도 드 안젤리스 / 여우주연상_ <더 바이스 오브 호프> 피나 투코 / 남우주연상_ <비포 더 프로스트> 제스퍼 크리스텐센 / 예술공헌상_ <더 화이트 크로> 레이프 파인즈 / 관객상_ <어나더 월드> 사카모토 준지 / 와우와우 베스트 각본상_ <아만다> 미카엘 에르스

아시안 퓨처 부문

아시아 영화상_ <퍼스트 페어웰> 리나 왕 / 아시아 정신상_ <우슈 오르판> 황황

재패니즈 스플래시 시네마 부문

최우수 일본 작품상_ <라잉 투 맘> 노지리 가쓰미 / 최우수 일본 감독상_ <더 건> 다케 마사하루, <멜랑콜릭> 다나카 세이지

사진 도쿄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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