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회 하노이국제영화제⑤] 급성장하는 베트남 영화계 · 영화인들
2018-11-14
글·사진 : 김성훈
가족, 축구, 리메이크… 세계와 접점 꿈꾸는 베트남영화들
게스트들이 개막식 레드카펫을 입장하고 있다.

베트남 하노이 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는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호수? 베트남 최초로 아시안게임 축구 4강에 오른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베트남전쟁 때 집집마다 팠다는 벙커(땅굴)? 쌀국수, 분짜, 반미 같은 베트남의 인기 음식들? 모두 맞는 얘기다. 이제는 여기에 하노이국제영화제도 추가해야 할 듯하다. 최근 급성장하는 베트남 영화산업의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하노이국제영화제는 매우 의욕적이고 야심만만했다. 지난 10월 27일부터 31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5일간 열린 제5회 하노이국제영화제 소식을 전한다. 베트남 영화국 국장인 응오 프엉 란 하노이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단편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리 타이 중 촬영감독, 베트남판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주연을 맡은 배우 카 응언, 영화 <디자이너>에 출연한 배우 디엠 마이를 만났다.

장편·단편 경쟁부문 심사위원들이 개막식 무대에 올라 인사하고 있다.

“빵빵.” 버스가 경적을 울릴 때마다 앞에서 달리던 시클로, 오토바이, 자동차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길을 양보했다. 버스에 탑승한 영화제 게스트들은 그 광경이 신기했는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연신 “오 마이 갓!”을 내뱉었다. 경찰차의 호위를 앞세운 덕분에 대형 버스는 악명 높은 하노이의 러시아워를 가볍게 뚫고 개막식 행사장에 제때 도착했다.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영화제다운 일사불란함을 하노이에 도착한 첫날부터 화끈하게 실감했다.

“대체 하노이는 왜?” 하노이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평소 알고 지내는 베트남 영화인 몇몇과 베트남에서 베트남영화를 만들고 있는 한국인 프로듀서에게 “하노이에서 만나자”라고 연락했더니 그들은 의아해했다. 베트남 북쪽에 위치한 하노이가 베트남의 정치·사회·경제의 중심지라면 남쪽 도시인 호찌민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지라 베트남 영화인과 영화사 대부분 호찌민에 모여 있다는 게 그들의 얘기다. 호찌민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영화제들은 민간 기업이 주최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하노이국제영화제는 베트남 정부가 직접 운영한다. 서울에서 전주나 부산에서 일하는 영화인들을 오라고 한 셈이다. 영화제를 취재하면서 베트남 영화 제작사까지 방문할 계획은 기자의 무지 탓에 수정이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하노이국제영화제가 5회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준비가 철처했고, 호찌민에서 많은 영화인들이 찾은 덕분에 급성장하는 베트남 영화산업의 에너지와 영화제가 그리는 큰 그림을 하노이에서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200파운드 뷰티>

베트남 영화산업의 현재

‘두강 사이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하노이는 강이 범람해 만들어진 호수만 무려 300개가 넘는다. 하노이를 두고 ‘강 안에 있는 땅’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이중 하노이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호수는 호안키엠 호수다.-편집자). 수많은 호수들 사이에서 열리는 하노이국제영화제는 올해로 5회째를 맞았다. 횟수로는 5회지만 영화제는 그보다 더 오래전에 시작됐다. 하노이 정도(定都) 1천주년(100년이 아니라 1천년!)이었던 지난 2010년, 베트남 정부와 하노이는 정도 1천주년 기념 행사 중 하나로 베트남국제영화제를 열었다. 리 왕조의 시조인 태조 리콩우언이 1010년 하노이를 도읍으로 정한 뒤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1천년이나 이어진 수도 자리에 국제 영화제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베트남국제영화제는 그해 일회성 행사로 열렸다가 2012년 지금의 하노이국제영화제로 이름을 바꾼 뒤 매년 열리고 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상영작 선정 범위는 점점 넓어져갔다. 3회 때까지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제작된 영화들을 주로 틀다가 지난해 동남아시아와 북미, 유럽 등 전세계로 넓힌 뒤 올해는 동아시아까지 아우르게 됐다. 베트남 영화국 국장이기도 한 응오 프엉 란 하노이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앞으로 우리는 재능 있는 젊은 영화인들과 그들이 만든 새로운 영화를 발굴할 것이다. 아시아 지역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를 과감하게 한 영화들을 관객에게 선보일 생각”이라고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자동차 경적, 출퇴근길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물결,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한 맥주 거리, 밤이 되면 화려하게 빛나는 호안키엠 호수, 높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 마천루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변화하는 다이내믹한 하노이와 달리 하노이국제영화제는 반듯한 모범생 같았다. 기자를 포함한 초청작 감독, 장·단편 경쟁부문 심사위원 등 영화제 게스트들은 투레 호수가 한눈에 보이는 대우호텔을 베이스캠프 삼아 매일 국립영화센터(National Cinema Center)로 출퇴근하며 상영작을 보았다. 영화제 상영관은 국립영화센터뿐만 아니라 베트남 멀티플렉스 BHD, 어거스트 시네마 극장, 킴동문화센터 상영관, 호안키엠 호수 야외 상영관 등 총 5군데다. 정부가 운영하는 영화제답게 모든 상영작이 무료다. 아시아 각국에서 온 젊은 영화인들에게 영화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인 하니프 캠퍼스와 BHD가 진행하는 마켓 행사인 프로젝트 마켓은 대우호텔에서 열렸다. 정해진 일정을 칼같이 소화하는 시스템이라 눈에 띄는 사건, 사고가 없었고, 그래서 다소 심심한 면도 없지 않았다.

<서머 인 클로즈드 아이즈>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해 의욕이 넘치는 만큼 상영작 프로그래밍에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개막작 <판타스틱 우먼>(감독 세바스찬 렐리오)을 포함해 5살 아이의 콤플렉스를 알게 된 아버지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려낸 <다크룸>(감독 루홀라 헤자지), 외국에서 일하다가 고향 폴란드로 돌아온 주인공 아담과 그의 가족의 사연을 다룬 <사일런트 나이트>(감독 피오트르 도말레브스키) 등 경쟁부문 상영작 12편은 국적도 다양하고, 장르도 골고루 포진해 있었다. 이미 한국에서 개봉했거나 영화제들에서 상영된 작품이 많아 최근의 베트남영화가 더 궁금한 터라 경쟁부문보다는 ‘베트남의 현재 영화’ 섹션 위주로 챙겨보았다.

일단, 카오 투이 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서머 인 클로즈드 아이즈>는 경쟁부문의 유일한 베트남영화로, 올해 개봉했을 때 베트남 평단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베트남 여성 하는 어린 시절 자신과 가족을 두고 일본으로 간 아버지를 찾기 위해 일본 홋카이도 히가시가와 마을로 간다. 사진작가인 아버지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하에게 계속 보내다가 갑자기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낯선 곳에서 하는 아버지의 사진 제작인 아키라를 만나고, 그와 함께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씩 좇는다. 이 영화는 베트남 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일본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하고, 일본 배우들이 출연한다.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오래전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계속 궁금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그리움, 원망, 후회 등 아버지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이 섬세하게 그려진다. 특히 하를 연기한 배우 푸엉 안 다오는 크고 작은 감정의 굴곡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인상적이다.

박항서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일으킨 축구 열풍은 베트남영화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로비 트렁 감독이 연출한 <11개의 희망들>은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축구에 재능이 많은 주인공 퐁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반대로 축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베트남 축구국가대표팀 출신인 퐁의 아버지는 시합하다가 부상을 당해 다리 한쪽이 불구가 된 비운의 선수다. 퐁의 재능을 눈여겨본 대표팀 코치는 퐁에게 대표팀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고, 퐁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과의 싸움에 나선다. <11개의 희망들>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전형적인 스포츠영화의 서사에 충실한 이야기다. 영화적으로 특별히 인상적인 부분은 없지만, 최근 베트남에서 가장 핫한 이슈인 축구를 소재로 다뤘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기획이다. 베트남영화 <내가 니 할매다>가 한국영화 <수상한 그녀>(2014)를 리메이크했듯이, 지난해 베트남에서 개봉한 영화 <200파운드 뷰티>는 김용화 감독의 <미녀는 괴로워>(2006)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와 이야기의 배경만 베트남 상황에 맞춰 바뀌었을 뿐, 줄거리도 연출도 원작에 매우 충실하다. 이 밖에도 단편경쟁부문에서 선보인 도안 홍레 감독의 <엄청 가깝고도 엄청 먼, 조상의 숲>은 개발 때문에 살던 마을을 강제로 떠나야 하는 마을 주민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다큐멘터리다.

<11개의 희망들>

베트남전쟁, 사회 비판 다루기엔 소극적

올해 극장 개봉한 베트남영화는 상반기에만 20편이 넘는다. 지난해까지 매년 평균 38~42편의 베트남영화가 개봉했는데 올해는 그 수가 휠씬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상영관은 약 180개, 스크린 수는 818개를 기록하고 있고 흥행작도 증가했다. 수치만 보면 베트남 영화산업이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베트남영화계는 “지지난해부터 정체기에 접어든 것 같다”라며 걱정하는 분위기다. 한국과 공동 제작해 800억동(39억2800만원)을 벌어들인 영화 <내가 니 할매다>를 포함해 <콩: 스컬 아일랜드>(2017), <분노의 질주: 더 익스트림>(2017) 등 할리우드영화들이 크게 흥행한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제외하면 흥행을 주도한 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2014년, 2015년에 영화시장이 성장하고 베트남영화가 인정받으면서 완성도가 낮고 급하게 기획된 코미디영화가 줄줄이 나왔던 탓에 베트남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감이 많이 떨어졌다. 최근 베트남 극장가가 개봉 첫주와 둘쨋주 안에 최대한 많은 관객을 불러모으지 못하면 극장에서 바로 내리는 추세라 할리우드영화에 비해 기대감이 높지 않은 베트남영화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베트남영화가 할리우드영화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고, 관객의 인식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심의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베트남 영화인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심의 제한이 거의 없는 외화와 달리 베트남영화는 엄격한 심의 대상이라 시도할 수 있는 소재가 제한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코믹하고 따뜻한 가족·코미디·로맨스영화만 계속 나오고 있다. 반대로 좀비, 이념, 베트남전쟁,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는 시도조차 하기 힘든 실정이다. “외화와 경쟁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나마 베트남 모국어, 베트남식 코미디라는 차별화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한 베트남 프로듀서의 설명이다. 한편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이었던 <디자이너>를 연출한 트란 부 로크 감독은 “검열보다는 베트남 관객의 취향이 가족 드라마, 코미디, 로맨스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도 있다 ”라며 베트남영화의 장르 편중 현상에 대해 설명했다.

<엄청 가깝고도 엄청 먼, 조상의 숲> 상영 전, 무대인사가 열렸다.

그럼에도 하노이국제영화제에서 밝은 미래를 봤다면 그건 아시아 각국의 재능 있는 학생들을 교육하는 하니프 캠퍼스 때문일 것이다. 하니프 캠퍼스는 아시아 각국에서 선발한 학생들을 연출, 제작, 연기 세 분야로 나눠 수업을 진행했다. 부산아시아영화학교 출신으로 하니프 캠퍼스에 참여한 중국의 리후이이 학생은 “프로듀서 양성을 목적으로 영화 비즈니스 프로그램이 주가 되는 부산아시아영화학교와 달리 하니프 캠퍼스는 멘토 모두 감독들이라 강의가 스토리 구성과 아이디어 구상에 더 많이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업에서 각자의 프로젝트를 피칭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피칭하고 난 뒤 프로젝트에 대한 수정 방향을 정할 수 있어서 좋았다”며 “또 연기 수업을 통해 배우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그들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베트남 영화시장이 매우 크고, 최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데다가 재능 있는 젊은 영화인들이 많은 까닭에 하노이국제영화제는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잠재력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하노이국제영화제의 성장을 지켜보는 즐거움일 것이다. 앞으로 아시아 영화시장에서 하노이가 어떤 역할을 할지 더욱 기대가 된다.

필름 프로젝트 마켓

필름 프로젝트 마켓은 베트남 영화국과 베트남 최대의 영화 투자·제작사 및 메이저 멀티플렉스인 BHD가 함께 진행한 프로그램으로, 하니프 캠퍼스와 함께 마켓 행사다. 아시아 각국에서 온 프로듀서, 감독, 시나리오작가가 투자자 앞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피칭하는 자리다. 라스 비욕 프로듀서와 브레너 앤드루 폴 감독의 , 아르덴 로드 감독 겸 시나리오작가의 <John Denber Trending>, 또 꾸억 니 응히 작가와 팜 후 응히아 감독의 <99 Lifes with You>, 청치콩 감독의 <Good Morning, and Good Night!>, 응유엔 칵 후이 감독의 <Little Fishes in Paradise>가 그것이다. 이중에서 <John Denber Trending>이 필름 프로젝트 마켓상을 수상하며 5천만동(약 24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Good Morning, and Good Night!>가 심사위원상을 수상해 BHD와 베트남 미디어그룹의 지원을 받게 됐다.

제5회 하노이국제영화제 수상 결과

장편경쟁부문

작품상_ <다크룸>(감독 루홀라 헤자지) / 감독상_ <사일런트 나이트>(감독 피오트르 도말레브스키) / 남우주연상_ 크리스천 베일(<시그널 록>(감독 치토 S. 로뇨)) / 여우주연상_ 프엉 안 다오(<서머 인 클로즈드 아이즈>(감독 카오 투이 니)) / 심사위원 특별상_ <페일 포크스>(감독 블라디미르 토도로비치)

단편경쟁부문

작품상_ <수>(감독 아이자나 카심벡) / 감독상_ <룸메이트>(감독 응유엔 르 호앙) / 다큐멘터리상_ <투 칠드런>(감독 타 쿠인 투) / 넷팩상_ <여중생A>(감독 이경섭) / 관객상_ <마이 미스터 와이프>(감독 김회성)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