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형사들은 없었다. 이들은 형사인가 치킨집 직원인가. 개봉하기도 전에 유행어가 된 고 반장(류승룡)의 대사를 빌려 소개한, 영화 <극한직업>의 주인공 마포경찰서 마약반 형사들이다. 형사가 위장 수사를 하기 위해 치킨집을 차렸다가 맛집으로 소문난다는 영화의 설정은 만화 같다. 비현실적인 설정임에도 이야기가 생생하고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비결은 관객을 성실하게 설득한 이병헌 감독의 연출이다. <과속스캔들>(2008), <써니>(2011), <타짜-신의 손>(2014)의 각색을 맡았고, 다큐멘터리 <힘내세요, 병헌씨>(2012), <스물>(2015), <바람 바람 바람>(2018)을 연달아 연출한 그다. 개봉을 이틀 앞둔 지난 1월 21일 만난 그의 얼굴은 다소 긴장돼 보였다(1월 23일 개봉한 <극한직업>은 개봉 첫날에만 무려 관객 36만여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을 동원했다.-편집자).
-시사 반응이 좋은 것 같다.
=평소 하고 싶은 이야기였던 전작과 달리 이 영화는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게 목적인 대중영화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통쾌감을 느끼길 바랐는데 시사에서 그런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오고 있어 전작에 비해 더 떨린다.
-영화를 보니 어깨의 힘을 많이 뺐던데.
=전작 <바람 바람 바람>은 흥행 성적과 무관하게 공을 많이 들이고 신경을 많이 쓴 작품이다. 가장 좋아하는 내 영화이기도 하다. 감정을 따라가는 드라마라 만드는 내내 감정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되게 예민했었고, 그래서 몸이 굉장히 피곤했다. 다음 영화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성환 어바웃필름 대표로부터 <극한직업> 시나리오를 건네 받았다.
-처음 읽었을 때 어땠나.
=‘다른 사람에게 이 아이템을 주면 안 되겠다.’ (웃음) 내가 연출해야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고, 나 또한 이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딱 들었다. 무엇보다 <극한직업>을 하면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싶었다. 영화가 어떤 평가를 받을까 하는 걱정을 내려놓자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조폭, 경찰, 마약 등 내가 싫어하는 건 다 있었다. (웃음) 그런데 그것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치킨이 더해지니 아이러니 했다. 재미있게 풀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연출을 맡기로 하면서 시나리오의 어떤 부분을 손봤나.
=시나리오 수정을 3개월에 걸쳐 했다. <완벽한 타인>(2018) 각본을 작업한 배세영 작가가 쓴 버전을 건네받았는데 상황도 대사도 되게 재미있었다. 그 버전을 영화에 맞게 분량과 등장인물을 줄였다. 경찰 마약반이 위장 수사를 위해 치킨집을 열었다가 맛집으로 소문난다는 설정이 영화적이고 판타지에 가까운데 이 설정이 소시민 같은 형사들, 치킨이라는 대중적인 음식과 균형을 잘 이루는 것이 중요했다. 배우들의 현실적인 연기 덕분에 코미디 같은 설정과 소시민 같은 캐릭터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참고한 레퍼런스는 없나.
=이 영화만큼은 영화인이 아니라 예능인이라고 생각하고 작업했기 때문에 참고한 영화가 전혀 없다.
-마약반 형사들이 위장 수사를 위해 선택한 일이 고깃집도 김밥 가게도 아닌 치킨집인 이유가 뭔가.
=내가 설정한 장치가 아니라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영화는 이미지만큼이나 소리도 중요하다. 치킨은 기름에 튀길 때 나는 소리와 한입 베어물었을 때 바삭바삭하는 소리가 매우 좋은 음식이다. 그게 떡볶이나 김밥과 다른 점이다.
-치킨을 얼마나 좋아하나.
=집에서 직접 튀겨 먹을 만큼 좋아한다.
-촬영할 때 많이 먹었겠다.
=냄새만 많이 맡았다. 감독이 소품을 먹으면 흥행에 악영향을 준다는 미신을 충실히 따랐다. (웃음)
-경찰 마약반 형사 다섯명은 매사에 진지한데 수사가 잘 안 풀려서 어설퍼 보이는 탓에 대학 동아리 회원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들을 묘사할 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실제 형사들을 많이 만나 인터뷰를 했다. 대공 업무가 아닌 이상 체포 영장을 발부받는 게 힘들고, 도청이나 감청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형사들이 하는 일을 과장하거나 왜곡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동시에 그들의 업무를 영화적인 재미 안에서 활용했다.
-류승룡, 이하늬, 진선규, 이동휘, 공명이 연기한 마약반 형사들은 시나리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더라.
=배우들을 캐스팅할 때 얘기를 나눈 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영화는 형사 한명이 수사를 끌고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형사 다섯명으로 구성된 마약반이 주인공이다. 또 하나는 형사가 직업이지만 소상공인이나 소시민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보여졌으면 한다는 거였다. 코미디영화라고 해서 연기를 과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배우들에게 전했다.
-형사들이 가진 능력과 재주가 서사를 이끌어가는 열쇠 같은 역할을 하던데. 가령 마 형사가 수원 왕갈비집 아들이라는 설정 덕분에 그가 갈비 양념으로 재워 튀긴 닭이 맛있는 치킨으로 인정받는다는 식이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나 자신이 모르는 능력과 재주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지 않나. 모두 활용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고, 저마다 자신의 숨겨진 재주에 대한 로망과 판타지가 있다. 이 영화는 형사 다섯명의 숨겨진 능력을 시원하게 터트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후반부, 형사 다섯명의 능력들을 하나씩 공개할 때 느끼는 쾌감이 이 영화의 핵심이자 화룡점정이다. 코미디로 시작해 통쾌함으로 마무리하는 게 연출 의도였다.
-액션 신이 많던데 평소 액션 신을 찍어보고 싶었나보다.
=아니다, 액션 신에 대한 목마름이 전혀 없다. (웃음) 액션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즐겨 보지도 않는다.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촬영하기 전에 걱정을 많이 했고, 허명행, 전재형 무술감독을 믿고 가야겠다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잘 나온 것 같다.
-차기작은 JTBC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라고 들었다. 어떤 이야기인가.
=여성들의 연애담과 소소한 일상 이야기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가깝다.
-코미디를 잘 연출하는 감독이 적은 까닭에 충무로 안팎에서 많이 찾을 것 같다.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감독으로서 내 능력이 필요한 지점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찾는 전화가 많이 오진 않는다.
-앞으로도 코미디 한우물만 팔 건가.
=그렇다. 코미디는 물론이고 코미디 요소가 있는 휴먼 드라마 장르를 목표로 재미있는 작품을 계속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