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는 늘 근사한 작품을 찍었다. 그리고 늘 재미있는 영화를 찍었다. <살인의 추억>(2003), <마더>(2009), <설국열차>(2013), <옥자>(2017)…, 그의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은 어떤 의문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은 이대로여도 괜찮은 걸까?” 그리고 영화가 끝난 순간에 관객의 머릿속에 또 하나의 거대한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우리의 사회는 이대로라도 괜찮은 걸까?” 우리의 ‘삶’과 ‘사회’는 분명 이어져 있을 텐데, 평소에는 그 사실을 간과해버리기 쉽다. 아니, 우리는 언제나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척해버린다.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봉준호의 영화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지금, 봉준호가 영화의 주역을 ‘어리석은 우리’ 자신에게 줌으로써 <기생충>은 걸작이 되었다.
지금까지 봉준호 영화에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조금은 깨닫고 있는 인물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옥자>에서 거대한 돼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소녀 미자(안서현)처럼. 그리고 그녀는 사회시스템을 아주 조금이나마 바꿔나갔다. 하지만 <기생충>에서 기생하는 쪽인 가난한 김씨(송강호) 가족도, 기생되는 쪽인 부유한 박 사장(이선균) 일가도, 그 누구 하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거의 마지막까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 힘에 부친다.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가지지 못한 자는 무엇이든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이고, 가진 자는 손에 쥔 것을 지키는 데 필사적이다. 물론 가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김씨 가족처럼 반지하에서 사는 건 괴롭고 비위생적인 일이다. 그곳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조금쯤 거친 방법을 택하는 것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다. 학생증을 위조하는 정도라면?(<어느 가족>(2018)에서 컵라면을 훔치는 정도라면?) 박 사장의 아내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어린 아들의 교육을 위해 필사적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를 신경 쓰지 않는 부모보다는 나은 사람일 것이다(<어느 가족>의 여자아이를 학대하는 부모보다는?).
하지만 김씨 가족은 자신들이 반지하에서 탈출하면, 다른 누군가가 반지하로 떨어진다는 가능성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야말로 일자리가 의자 뺏기 게임이 된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박 사장 부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좀더 귀를 기울여야 했고, 무엇이든 지나치게 ‘연줄’에 기대지 말아야 했다. 한국도 일본도 이른바 ‘연줄’ 사회다. 신용과 커넥션이 같은 의미가 된 지 오래고, 그것이 사회의 격차를 만드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과 지난해 황금종려상을 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 격차 사회의 문제를 훌륭한 드라마로 만들었다는 것, 아들에게 희망을 걸었다는 것, 그리고 딸들이 구제받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조금 불만이긴 하지만, 이 또한 현실이긴 하다.
김씨 가족도 박 사장 일가도, 모두, 어리석긴 하나 악인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이 희비극(Tragicomedy)을 낳는다. 즉, 우리야말로 희비극의 주연인 것이다. 그 거대한 집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의 상징이다. <기생충>에서 봉준호가 만든 멋진 제트코스터에 타고 있는 동안, 말도 안 되는 세계로 끌려간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