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동안 지속된 봉준호 감독을 향한 우리의 조건 없는 사랑을 지탱하는 힘은 뭘까? 우선, 그가 추구하는 여정의 위대한 순수성일 것이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부터 각각의 작품들 속에서 그가 끊임없이 감수하는 위험, 놀랍도록 다양한 프로젝트, 장르, 다루는 주제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솜씨는 단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가 손대는 모든 것들은 금으로 변한다. 이제 봉 감독은 한국영화 황금기 세대의 모든 감독 중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가장 당돌하고, 가장 놀라운 천재로 인정받고 있다.
집 강탈자들
그런데 한국인이 아닌 국외의 평론가들과 시네필들의 봉 감독을 향한 사랑은 다분히 주관적인 이유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이건 무엇보다 봉준호 감독을 2004년 처음 <살인의 추억>을 보면서 느낀 절대적 경탄의 감정과 연결해 생각해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계속 그럴 것이라는 거다. 아주 보편적임과 동시에 이국적이고, 상당히 깊이 있으면서도 친숙하게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이 작품을 완전히 잊어버린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봉준호 감독은 생소한 듯 현기증을 일으키는 느낌, 그리고 <살인의 추억>으로 2000년대 초 떠올랐던 새로운 존재로 앞으로도 계속 거론될 운명임은 확실하다. 이로부터 15년 후, <기생충>에 주어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은 모범적이고 독자적임과 동시에 놀라운 감독의 경력을 보상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 이 원더보이가 고국으로 돌아가 그의 작품의 핵심 요체이자 정수인 ‘한국성’을 되찾은 것에 대한 축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국제 프로젝트(<설국열차>(2013)와 <옥자>(2017))를 연출하던 지난 몇년간, 봉준호 감독은 광기어린 한국 정서의 뿌리를 찾아 그가 고국에 비워두고 온 자리를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간간이 밝혔었다(그가 자리를 뜬 사이 나홍진 감독과 연상호 감독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생충>의 첫 번째 힘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집으로의 회귀’(back at home)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편적인 정치 우화, 장인의 미장센 연습, 완벽하게 매끄러운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었다. <기생충>은 무엇보다 훌륭한 ‘홈 인베이전’(home invasion)의 은유이고, 이는 감독이 ‘집으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고국의 커다란 빌라들과 상류층 가족에 악감정을 가지고 어마어마한 장난기로 이들을 망가뜨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기생충>의 괄목할 만한 힘은 결국 빌라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안무나 메트로폴리스식의 놀라운 표현주의적 요소(비밀 지하실에서의 추락 시퀀스나 포스트 묵시록적 소돔 성을 연상시키는 빌라로의 급하강 시퀀스)에 좌우되지 않는다.
한국 감독의 ‘스필버그’적인 재능
사실 봉준호는 이런 요소들을 갇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영웅적 서사시인 <설국열차>나 옥자의 위대한 모험을 다룬 가장 아름다운 시퀀스들에서도 얼마든지 보여줄 수도 있다. <설국열차>나 <옥자> 같은 영화들은 훨씬 덜 ‘한국적’이지만 동시에 한국 감독의 ‘스필버그’적인 재능을 분명히 증명한다. <기생충>의 눈부신 성공은, 너무나도 한국적인 잔혹성(흔히 말하는 작품 또는 ‘집’의 특산물), 그리고 봉 감독이 <마더>(2009) 이후 빈자리로 남겨두었던 친근하면서도 가족적인 광기로의 회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두려움과 유쾌함을 번갈아가며 느끼게 하는 잔혹함은, <기생충>에서 다루는 계급투쟁의 상반된 구조를 매끄럽고 잘 짜인 이야기 형태로 보여주는 대신 감정적으로 격노하여 통제 불가능한 듯 읊어대는 시처럼 보여준다. 권력구조나 통제를 기대했던 혹자의 의지와는 거리가 멀게, <기생충>은 격동하는 인간들의 감정과 이들의 넘쳐나는 돌발행동에 몸을 맡겨 취한 듯 흔들리는 배를 보여준다. 우리는 <기생충>이 별다른 목적 없이 솜씨 자랑만 하는 사회 풍자극이나 미하엘 하네케식의 가족 살육 놀이가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치 미끄럼틀에서 급락하듯 도망쳐 인물들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도시의 지하세계를 보여주는 우화적인 시퀀스는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한 방법으로 거실의 낮은 테이블과 대치한다. 또한 이 시퀀스는 넘쳐나는 하수구 장면이나 급류가 로맨틱하고 허무주의적인 방법으로 역류하는 순간과 함께 영화에서 억압된 순간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부분들이 봉준호가 차갑고 악마적인 체스게임에서 열정적 멜로드라마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하는 부분임과 동시에, 감독이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자들의 편에 완전히 자리잡고 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감독은 아름다운 장치를 깨면서 정치 프로그램을 가장 비극적인 선상으로 끌어내려버린다. 가난한 자들은 흔히 우리가 상상하는 복수심에 불타는 기생충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행 속에서 병균처럼 나뒹굴며 비천한 냄새를 풍기는(영화에서 가장의 몸에 밴 냄새처럼 말이다) 이들로 묘사된다. 이들의 유일한 범죄는 가족이 (부잣집 거실에서) 향연을 벌이는 신이나 영화의 마지막 몽환적인 신이 보여주듯, 일시적인 꿈속에서 (부자들과 함께) 상존하려 한 것이다. <기생충>은 능력 있는 작가가 자신의 솜씨를 뽐내며 보여주고 있는 걸작이 아니라 미친 사랑, 가족 그리고 저주받은 이들의 약한 면을 다루고 있는 위대한 가족 멜로드라마다. <괴물>(2006)과 <마더>가 아주 감정적인 악몽을 다루었던 것처럼(배고픈 아이들, 그리고 사라진 가족의 일원을 찾고자 괴로워하는 다른 가족들), 이 영화는 기계와 괴물들, 어리석은 거지들, 친절한 악마들이 등장하는 치명적인 희곡임과 동시에 벌거벗은 한국 사회의 야생적 초상화이고, 더 나아가 정신 나간 인류의 휘황찬란한 격분을 보여주는 초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