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영화평론 당선자들은 공통점이 있다. 영화 전공자도 아니고 특별히 이론적인 공부를 한 적도 없으며 그저 영화를 보고 이야기하는 게 좋아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라는 거다. 좋아하는 영화가 왜 좋은지, 자신이 사랑하는 말의 힘을 빌려 차분히 전달하는 것. 어쩌면 그거야말로 영화비평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원 당선자의 글은 평론의 위기라는 말조차 식상해진 지금, 새삼 영화평론의 나아갈 바를 짚어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실험이나 기발한 도전이 아니다. 영화를 향한 애정, 감상에 대한 솔직함, 아는 만큼 표현하는 용기. 그거면 족하다.
-최우수상을 축하한다.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였다.
=아직도 믿기 힘들다. 전공자도 아니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제출하는 데 의의를 두고 응모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예상 밖이다. 이론, 작품 비평 모두 안정감이 있어서 솔직히 경험자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계기로 영화평론을 처음 쓰기 시작했나.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잠깐 회사를 다녔다. 지금은 쉬면서 다른 일을 알아보는 중이다. 영화에 대한 관심은 늘 많았고 영화 관련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작가나 기자, 하다못해 방송국쪽의 일을 생각해볼 때도 평론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상상해본 적 없다. 아직은 선망하는 일이라고 말하기에도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짧게 글을 써보며 재미를 느끼는 수준이다.
-영화이론도 글쓰기도 혼자 공부한 건가.
=독학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저 좋아하는 걸 봤고 재밌다고 생각되는 일을 해봤을 뿐이다. 쉬는 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자주 읽었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영화도서가 모여 있는 790번대로 직행해서 조너선 로젠봄이나 자크 오몽, 노엘 버치 등 평론가, 이론가들의 글을 읽는다. 물론 전부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읽는 것 자체가 즐겁다. 그렇게 보다가 내가 직접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고 이번에 용기내어 응모하게 됐다.
-영화를 얼마나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지는 둘째치고 글쓰기 자체가 익숙해 보인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좋아한다. (웃음) 글은 내가 아닌 걸 다 쏟아내는 게 아니라 읽는 이의 호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글쓴이가 나와 대화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글이 좋다. 그런 취향이 쓸 때도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것 같다. 200자 원고지 70매가 넘는 정도의 글은 이번에 처음 써봤는데 혼자 떠드는 게 아니라 읽는 이를 상상하면서 썼다. 이쯤 되면 지칠 수도 있겠다, 이 정도 왔으면 다소 비약적인 표현도 받아주겠구나 하는 식으로. 초고를 쓸 땐 주절주절 전부 풀어내는 편이라 퇴고가 오래 걸린다. 거의 3분의 1 정도는 덜어낸 것 같다. 당선 자체도 기쁘지만 내 글쓰기가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행복하다.
-이론비평으로 홍상수 감독의 <강변호텔>(2018)을 썼다.
=다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홍상수의 영화를 본 것은 대학교 1학년 때 <옥희의 영화>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진 대중적인 영화를 주로 봤었는데 <옥희의 영화>를 보고 영화가 나에게 이렇게 충만한 느낌을 줄 수 있구나 싶어 충격을 받았다. 그날 홍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모두 찾아봤다. 그렇게 한꺼번에 많은 영화를 봤는데 전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건 홍상수에 대한 어떤 오해와도 관계되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홍상수의 영화가 매번 똑같은 자기반복이라고 말한다. 그런 감상도 존중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의 영화는 매번 새롭게 느껴진다. 그런 지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고 싶었다.
-<강변호텔>을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의 황혼>(1957)과 엮어낸 지점이 재미있다.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때마침 <동경의 황혼>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보자마자 앉은자리에서 쭉 써내려갔다. 문득 선물처럼 좋은 소재나 영감이 다가올 때가 있는 것 같다. 오즈 야스지로는 원래부터 좋아하는 감독이었다. 홍상수를 말할 때 에릭 로메르, 루이스 브뤼엘 감독 등이 자주 언급되는데 나는 늘 오즈 야스지로와 닮았다고 생각해왔다. <강변호텔>을 보고 과거보다 맑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즈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동경의 황혼>은 오즈의 영화 중에서도 다소 자극적인 설정의 영화다. 오즈가 독해지고 홍상수가 맑아져서 중간쯤에서 만나면 그곳이 <강변호텔> 아닐까? (웃음) 이론비평 초고를 쓰고 나서 허문영 평론가의 책 <보이지 않는 영화>를 읽게됐는데, '죽음'과 <동경의 황혼>을 키워드로 한 오즈와 홍상수에 대한 글이 있었다. 평소 존경하던 분의 글이라 읽고나서 감탄함과 동시에 내 글과의 비교로 좌절도 했지만, <강변호텔>을 다루는 부분 등 디테일한 부분에선 차별점이 있는 것 같아 자신감과 믿음을 가지고 응모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고전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처럼 보인다.
=그렇진 않다. 앞서 말했듯이 대중적인 영화도 많이 보는 편이고 전위적인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남은 무언가를 곱씹는 걸 즐기는 편이다. 말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영화들이 좋다. 예를 들면 <강변호텔>의 식사 장면에서 영환(기주봉) 부자(父子)를 비추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돌려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를 비출 때 왜 카메라를 저기서 돌려야 했을까 질문할 수 있다. 거기서 컷을 나눌 수도 있고 다른 표현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카메라를 돌려야만 했던 이유. 그게 영화적인 것이라고 느낀다. 서사비평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서사로는 다가갈 수 없는 영역에 다다른다. 내가 글로 다가가고 싶은 영역도 바로 거기에 있다.
-작품비평은 린 램지 감독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로 썼다. 82편의 응모작 중에 이 영화를 고른 사람은 몇명 없다.
=일단 호아킨 피닉스를 좋아한다. 솔직히 처음엔 그렇게 와닿지 않은 영화였다. 그런데 일상에서 불쑥불쑥 치고 들어오면서 자꾸 생각이 나는 영화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론 영화가 끝나도 영화 속 인물들이 세상 어딘가 살아 있는 것 같은 영화들이 좋은데, <너는 여기에 없었다>가 그랬다.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보여주는 영화가 있고 궁금한데 전부 설명하지 않는 영화가 있다. <강변호텔> <너는 여기에 없었다> 모두 후자에 속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지점 때문이 아닐까. 굳이 말을 보태고, 설명하고, 생각을 나누고 싶어지는 영화도 그런 영화들이다.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아무도 영화평론을 말하지 않는 시대다. 굳이 지금 영화평론을 쓰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
=왠지 이 질문이 나올 것 같아 멋지게 답하려고 머리를 굴려봤는데 답이 없더라. (웃음) 이게 반드시 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이제 막 첫발을 들이는 입장에서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나는 영화 전공자도 아니고 멋진 철학적 용어를 쓰지도 못하고 이론적인 배경도 모른다. 그 영역은 할 수 있는 분들이 계속 해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기꺼이 즐겁게 그 글을 읽을 것이다. 애초에 평론가를 생각해본 적 없는 내게 지금 이 순간은 선물 같은 기회다. 한 사람의 필자로서 내가 영화로부터 받은 감정을 제대로 그리고 솔직하게 전달할 수 있는, 친한 친구처럼 수다를 떨 수 있는 평론가가 되었으면 한다.
-평론가로서 <씨네21> 지면을 통해 독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줌파 라히리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솔직하고 소박한 가운데 읽고 나면 오랜 여운이 남는다. 평론이든 창작이든, 앞으로 어떤 글을 쓰든 그렇게 되고 싶다.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으면서 너무 주변에 영합하지도 않는, 동시에 어쨌든 읽는 재미가 있는 글. 차분하게 독자와 대화하는 느낌을 주는 글. 인생을 돌이켜봤을 때 아마도 지금 이 순간이 내게 특별한 순간, 혹은 터닝포인트로 기억될 것이다. 지면의 무게와 소중함을 알고, 책임감을 가진 글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