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한 여자가 양치를 하는 신으로 시작한다. 이후 촬영자는 여자의 일상을 생중계하는 동시에 채팅을 통해 여자의 행동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촬영자는 목소리를 포함해 화면에 일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촬영자의 정체를 알 수 없으며 예측하기도 어렵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메시지의 수신자 역시 부재하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신에서 촬영자는 내레이터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후 촬영자는 두번의 살생을 저지르며 사건의 당사자가 되지만 여전히 카메라를 통해 대상을 바라보고 논평하며 프레임 밖에 머무른다.
이어지는 공사 현장 신 역시 CCTV 화면을 통해 드러나는데 해당 신의 사운드는 현장의 것이 아니라 화면을 바라보는 관리자 공간의 소음이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비동시성으로 인해 사고의 현실감은 떨어지고 그 충격 역시 감소한다. 이후에도 영화는 계속해서 관객이 노트북, 스마트폰 화면을 경유하여 사건을 관찰하도록 한다. 이 신들의 공통점은 발신자의 공개를 가능한 한 마지막까지 유예한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관객은 정체가 불분명한 발신자들에게 이입하지 못하고 그들과 자신을 분리시켜 바라본다.
극중 인물간의 관계도 어그러지거나 결핍된 채로 존재한다. 조르주가 병원에서 돌아왔을 때 카메라는 닫힌 창문을 통해 그를 조명하는데 그사이에는 외면당한 채 홀로 짖는 개가 있다. 다음 신에서 노래하는 피에르(프란츠 로고스키)의 관객은 거울에 비친 형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인물이 타인과 마주하는 자리에서도, 즉 피에르가 피해자 가족과 대면하거나 조르주가 흑인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소통은 그다지 원활하지 않다. 이때 감독은 카메라를 후퇴시키거나 오디오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재차 관객을 영화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이처럼 감독은 인물간의 관계, 나아가 영화와 관객 사이에 계속해서 이중, 삼중의 막을 설치하며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로 인해 인물들은 파편화된 채로 존재하고 관객은 지속적으로 그들과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태도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에브(팡탄 아흐뒤엥)와 조르주(장 루이 트랭티냥)의 관계가 더욱 예사롭지 않은 것인데 둘은 여기서 유일하게 서로 교감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소원한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던 것일까. 우선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타인을 살해했으며 현재 자기 스스로도 죽음을 희망한다는 교집합이 존재한다. 이는 조르주가 문밖에서 망설이던 에브에게 안으로 들어와 앉도록 권유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문은 실제 조르주 방의 문일 뿐만 아니라 그의 삶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기능한다. SNS상에서만 솔직하던 에브는 그의 삶을 들여다보며 자신과의 접점을 깨닫고 이내 자기 과거에 대해 털어놓는다. 엄마의 외면과 아빠의 기만에 지쳐 자살을 시도했던 아이가 처음으로 진심어린 관계를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에브가 조르주의 자살을 돕는 것으로 귀결된다. 에브는 차마 그를 물속에 밀어넣지 못하고 망설이다 이내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카메라를 통해 그의 뒷모습을 조망한다. 에브의 행동은 조르주가 말했던 새에 관한 일화를 연상시킨다. 그는 TV로 시청하는 것과 실제 새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빌려 비유하자면 죽음에 관한 에브의 경험은 사실상 TV시청과 등가를 이루는 것이다. 두번의 죽음 모두 카메라를 통해 바라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정된 조르주의 죽음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시 한번 그사이에 카메라를 위치시키고 프레임 밖으로 달아나는 것뿐이다.
이처럼 영화의 마지막 신은 첫신처럼 에브가 대상의 뒷모습을 촬영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처음과 마지막 신의 구조적 유사성은 감독의 전작 <아무르>에서도 드러난다. (앞뒤 신들을 조금씩 들어낸다면) 영화는 노부부가 집으로 들어오는 신으로 시작해 함께 집을 나가는 신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두 영화 모두 수미 상응적 구성을 취하지만 각 신이 의미하는 바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무르>는 부부가 들어온 문으로 함께 나가는 신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이어지는 관계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해피엔드>에서 에브는 카메라 뒤에 홀로 서서 대상의 죽음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그는 결국 관계의 문을 여는 것조차 실패한 것이다. 언젠가 조르주가 정말 죽음을 맞이한다면 에브에게 “문을 열고 들어오라”라고 말하는 이는, 즉 제대로 된 관계를 시작하려는 이는 에브의 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에브는 또다시 스마트폰이라는 소통의 문이자 이를 가로막는 벽 뒤에 숨어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해피엔드>의 처음과 마지막 신에 차이가 있다면 죽어가는 대상만을 조명했던 첫신과 달리 마시막 신에선 조르주를 구하러 가는 앤(이자벨 위페르)과 토마스(마티외 카소비츠)가 화면에 함께 자리한다는 것이다. 관찰자이기를 자처하는 에브와 달리 앤과 토마스는 기꺼이 사건 속으로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앤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 시선은 카메라를 넘어 에브에게로, 에브와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로 향한다. 여전히 그들과 거리를 두고 바라만 보는 관객에게로. 감독은 로랑 가족의 갈등으로 위시되는 현 사회의 위기가 단순히 스크린 내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며, 앤의 시선을 통해 영화의 문제의식을 관객의 현실 속으로 전이시킨다. 다시 말해 조르주가 에브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감독은 스크린 뒤의 관객에게 이제 당신도 그만 그 문을 열고 들어와야 하지 않겠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