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23번째 장편영화 <강변호텔>(2018)을 보면서 오즈 야스지로의 마지막 흑백영화 <동경의 황혼>(1957)을 떠올린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끊임없이 변모해온 홍상수의 영화 세계에 다른 감독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게으른 접근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강변호텔>이라는 영화가 가지는 모종의 기운과 정념들이, 어떤 야심이나 욕구보다는 무언가를 한없이 투명하게 바라보는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곱씹다보면 접근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로움에 다가가기 위해 문득 떠오른 오즈의 영화 한편을 말하고 싶어진다.
<만춘>(1949) 이후 가족극을 주로 그려온 오즈의 멜로드라마 <동경의 황혼>은 종종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외도처럼 여겨져왔다. 봄에서 가을까지의 계절을 배경으로 하는 대부분의 작품들과 달리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소수의 영화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 배경과 연결되는 우울하고 침울한 분위기의 영화라는 것 역시 <동경의 황혼>을 독특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실제로 개봉 당시 관객에게 이 잔인하도록 서늘한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반면 홍상수는 가족보다는 연애에 초점을 맞춰온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서 부모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하하하>(2009)와 <자유의 언덕>(2014) 등 다섯편의 영화에서 어머니로 분한 윤여정이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의 김자옥 등이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통영이나 게스트하우스라는 공간의 다른 이름으로서 존재하거나(윤여정), 딸을 떠나가버림으로써(김자옥) 서사 안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가지진 못했다. 어머니보다 더 찾기 힘든 존재는 아버지였다. 홍상수의 인물들은 ‘아버지 없이’ 맨몸으로 세상을 떠도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강변호텔>의 주인공 영환은 시인이기 이전에 아버지다.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착한 며느리의 근황이 궁금하며, 아들들에게 무엇이라도 손에 들려 보내야 할 것을 고민하는 사람이다.
가족을 들여다보던 오즈가 만든 비극적 멜로드라마, 짝 찾기에 몰두하던 홍상수가 만든 가족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아 보인다. 서사적으로도 두 영화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사랑을 좇아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간 부모가 등장하며, 실연으로 고통받는 젊은 여성이 존재한다. 아버지와 자식간의 대화는 어긋나기 일쑤고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던 인물이 영화의 마지막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요약하자면 <동경의 황혼>과 <강변호텔>은 “어떤 인물이 사랑과 언어에 실패한 뒤 죽게 되는 영화”다. 그렇다면 오즈 야스지로와 홍상수는 이 비슷한 실패와 죽음의 여정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어떤 것이 비슷하며 또 어떤 것이 다를까.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1. 외딴섬과 미로의 공간, 언어의 실패 공유되는 지점들을 살펴보자. 우선 공간의 문제다. <동경의 황혼>에는 오즈의 영화에서 숱하게 등장한 다다미방과 좁은 복도의 일본식 가정집이 등장한다. 아버지와 두딸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적어도 아버지 슈키치와 큰딸 다카코에게 집은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에게 조언해줄 수 있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작은딸 아키코는 그 과정에 자주 부재한다. 아버지와 언니는 아키코의 삶과 미래를 걱정하지만, 아키코의 반응은 불안정한 표정과 의도적인 회피뿐이다. 말하자면 <동경의 황혼>에서 아키코에게 집은 하나의 봉합적 공간이라기보다는 정서적 거리감을 가진 외딴섬들의 집합으로서 존재한다.
<강변호텔>의 공간은 호텔이다. 집을 떠나온 두명의 독립된 투숙객(영환, 상희)이 있고 그들을 각각 찾아온 아들들(경수, 병수)과 친구(연주)가 있다. 호텔은 수많은 방들의 총체적인 공간이다. 물리적으로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수많은 벽과 문과 창이라는 경계 짓기를 통해 정서적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래서인지 영환과 아들들은 자꾸만 어긋난다. 호텔 1층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부자는 서로를 발견하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유리창 밖에 있는 아버지의 말은 아들들에게 닿지 못한다. 병수는 아버지 영환을 찾아 호텔 화장실을 뒤진다. 영환은 술래를 피하듯 아들들에게서 도망쳐 자신만의 공간으로 숨는다. 저녁을 먹은 식당에서도 그들의 ‘술래잡기’는 계속된다. 저녁 식사 후 사라진 영환은 아들들에게 먼저 가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아들들이 차를 타고 가자 기다렸다는 듯 식당에 다시 나타난다. <강변호텔>에서 영환과 아들들이 공유하는 공간은 무수한 미로로 이루어진 술래잡기의 공간에 가깝다.
외딴섬과 미로의 공간에서 <동경의 황혼>과 <강변호텔>의 가족들은 결코 제대로 소통할 수 없다. 그들의 말은 그들이 속한 공간의 성질을 따라 서로 어긋나버리고 튕겨나간다. <동경의 황혼>에서 아버지와 언니는 아키코의 반항을 질책하고 아키코는 속내를 털어놓지 않으며, <강변호텔>에서 아들들은 아버지의 ‘죽을 것 같다’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이혼 사실을 알지 못한다. 언어의 실패는 의도치 않게 거짓말과 비밀을 만들어낸다.
먼저 <동경의 황혼> 속 아버지와 딸들의 대화. 아키코가 오해로 인해 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어느 날 밤, 집으로 돌아온 아키코에게 슈키치가 질책하자 아키코 대신 다카코가 답한다. 분위기가 격앙되어가자 다카코가 아예 아키코를 방으로 들여보낸다. 그렇게 아버지와 언니는 아키코가 부재한 자리에서 그녀를 걱정한다. ‘어머니 없이 외롭게 커서 그렇다’는 언니의 진단과 ‘아버지로서 편애해서 저렇게 되었다’는 아버지의 진단은 아키코가 품고 있는 비밀에 다가가지 못한다. 그들은 아키코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키코의 사연은 그녀에 대해 떠들어대는 동네 사내들의 말 속에서 옮겨진다. 그녀를 괴롭게 하는 소문이 오히려 그녀에 대해 아버지와 언니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동경의 황혼> 속 언어의 실패가 만들어낸 더없이 슬픈 풍경이다.
<강변호텔>에서 세명의 남자와 두명의 여자가 나누는 대화를 비교하는 것은 언어의 실패를 더욱 또렷하게 살펴보게 만든다. 비슷한 장면이 있다.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과 그들을 찾아오는 손님간의 전화 통화. 호텔 1층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영환의 말은 커피를 샀으니 객실로 올라가겠다는 경수의 말로 튕겨나가고, 몇호실이냐는 경수의 질문은 영환으로부터 답을 얻지 못한다. 반면 상희와 연주의 대화는 물 흐르듯 막힘없이 이어진다. 몇호냐는 연주의 질문에 상희는 201호라고 대답한다. 필요한 것이 있느냐는 연주의 질문에 상희는 커피를 부탁한다. 케이크도 사간다는 연주의 말에 상희는 좋다고 답한다. 상희와 연주의 대화는 마치 꼭 맞는 블록을 끼워 맞추듯 순행하며 서로를 감화한다. 두 여인의 대화와 달리 세 부자의 대화엔 종종 헛도는 고성과 어색한 침묵이 오간다.
세속적 욕망과 복잡한 관계의 뒤엉킴 속에서 엇갈리고 엇나가던 남녀간의 불화와 달리 불현듯 서로를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했던 여성들간의 모습은 <해변의 여인>(2006)에서 연적처럼 보였던 문숙과 선희가 보여준 모종의 연대의 순간과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에서 고통받는 영희를 다독이는 지영과 준희를 포함해 <클레어의 카메라>(2016)에서 해고된 만희를 위로해주는 클레어에게서도 드러났지만 <강변호텔>의 상희와 연주의 관계는 더 특별한데, 그 특별함은 두 사람이 보살피는 자와 보살핌 받는 자의 위치를 계속해서 바꿔가는 움직임에 있다. 상희를 눕혀서 양말을 벗겨주는 연주의 움직임과 곧바로 연주를 눕히고 창문을 닫으러 간 상희가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눕는 일련의 움직임은 서로에 대한 보살핌으로 수렴되는 부드러운 연민의 리듬으로 작동된다.
나를 보살펴주는 이를 안쓰럽게 여기는 마음, 아픔을 겪은 상대를 연민하는 마음이 상희와 연주의 영화적 운동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 두 여인의 비상함은 그 마음이 결코 폐쇄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두 사람에겐 겨울나무 위에 지어진 까치집을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과 눈밭 위에서 만난 노시인에게 기꺼이 악수를 청하는 마음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식당에서 영환의 시 낭송이 끝난 뒤 두 여인이 따라주는 소주는 보살핌의 연장선이며, 영환의 죽은 얼굴 숏 이후 연결되는 두 여인의 흐느끼며 잠든 얼굴은 영환의 죽음을 연민하는 행위다. 하늘의 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아들들과 달리 여인들은 갑작스레 내린 눈의 신비경에 감탄하고 감사히 여긴다. <강변호텔> 속 부자간 언어의 실패는 반대편의 세계에 존재하는 놀라운 보살핌과 절실한 연민의 마음을 포착하기 위한 필요악의 실패로서 기능한다.
2. 사랑의 실패, 죽음의 역설 두 영화의 인물들은 이미 끝나버린 사랑을 되새김질하거나 혹은 사랑의 끝머리에 놓여 있다. <동경의 황혼>에서 아버지 슈키치는 오래전 아내 기쿠코가 바람나 집을 나가버린 이후로 홀로 지내고 있고, 큰딸 다카코는 성격이 맞지 않는 남편과 별거 중이다. 작은딸 아키코는 무책임한 남자친구의 아이를 갖게 돼 수술비를 구하러 다닌다. <강변호텔>도 비슷한데 상황의 구도가 조금 바뀐다. 사랑을 좇아 가족을 버린 사람이 <동경의 황혼>에선 어머니였다면, <강변호텔>에선 아버지인 영환이다. 영환은 지금 그 사람과도 결별한 채 혼자 늙어가고 있다. 그를 찾아온 아들 중 큰아들 경수는 이혼했고 작은아들 병수는 ‘여자가 무서워서’ 연애를 하지 않는다. 한편 상희는 헤어진 연인에게 큰 상처를 받은 상태다.
부모의 사랑의 실패가 자녀에게 끼치는 영향에서 두 영화는 차이를 갖는다. <동경의 황혼>에서 딸들에게 같이 사는 아버지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집 나간 어머니다. 사랑을 좇아 가족을 버린 어머니 기쿠코는 다카코 입장에선 동생이 비행하도록 만든 근원이며, 아키코 입장에선 자신에게 ‘불결한 피’를 물려준 비극적인 운명의 굴레다. 딸들은 동네 마작방 여주인으로 재회한 어머니 앞에서 분노와 원망을 마구 털어놓는다. 그러나 <강변호텔>에서 아들들은 자신의 사랑의 실패의 근원을 아버지에게서 찾지 않는다. 그들은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를 반기며 안는다. ‘인간으로서의 단 하나의 미덕도 찾아볼 수 없는 괴물 같은 존재’라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비난을 웃음 섞인 목소리로 전달하는 경수를 생각해보건대 <강변호텔>의 아들들에게 아버지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나 의무를 가진 아버지로서 존재하기보다는 나약함과 과오를 가진 동등한 인간으로 존재한다. 영환에겐 <동경의 황혼>에서 기쿠코가 겪은 자녀들과의 회한과 눈물과 원망의 순간들이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환이 아들들에게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 주게 된 인형들은 아들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자아내지 못한다. 아들들은 느낄 수 없는 감흥과 울림은 오직 영환이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르는 철저한 타인으로서의 두 여인과 마주쳤을 때에만, 눈과 시라는 소재가 어우러지며 영화 속에 등장한다.
잇따른 사랑과 언어의 실패 끝에, 두 영화의 결말에서는 서사를 이끌어오던 중심인물이 갑작스럽게 죽는다. <동경의 황혼>에서 임신중절 수술을 한 아키코는 어느 날 밤 술집들을 배회하다 기차에 치인다. 그때 오즈의 선택은 철저한 생략이다. 남자친구의 뺨을 때리고 홧김에 술집을 뛰쳐나간 아키코를 따라가 기차에 치이는 장면을 담았다면, <동경의 황혼>의 비극적 멜로드라마로서의 시각적 충격은 극대화됐을 것이다. 그런데 오즈는 아키코가 기차에 치이는 순간을 기차의 경적과 그에 대한 술집 주인의 반응으로만 처리해버린다. 그다음의 생략은 더 잔인하다. 어느 방에서 눈을 뜬 아키코의 곁에 아버지와 언니가 와 있다. 아버지와 언니는 여전히 엄하지만, 한편으론 다정하게 느껴진다. 아키코는 울면서 “살고 싶어요. 전부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치고 아키코의 얼굴은 상처 없이 깨끗한데 그래서인지 아키코를 안심시키는 아버지의 얼굴은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시퀀스에서 마작방에 있는 어머니 기쿠코를 찾아간 다카코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아키코가 죽었어요”라는 말이다.
충격받은 어머니의 표정은 그를 지켜보는 관객의 표정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차에 치이는 순간을 생략해버린 오즈는 아키코의 죽음의 순간도 생략해버린다. 아버지와 언니 앞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 아키코는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언니의 대사와 함께 영화 속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아키코의 장례식 장면은 생략된다. 아키코에 대해 떠들어대던 동네 사내들도 더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키코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두 여자의 결단이다. 어머니는 동경을 떠나 북해도로 거처를 옮기고, 언니는 별거 중인 남편에게 돌아간다.
가족의 품 안에서 죽은 것은 <강변호텔>의 영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홍상수는 오즈와는 상반된 선택을 한다. 그는 생략이 아닌 적극적인 보여주기를 택한다. 물론 우리는 영환이 죽은 채로 경수와 병수에게 발견되기 직전 화장실에서 영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구체적으론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죽은’ 영환의 얼굴뿐이다. 오즈가 아키코의 ‘죽은’ 얼굴을 생략한 것과 달리 홍상수는 그 얼굴을 보여준다. 떠올려보면 홍상수는 이미 그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 죽음의 얼굴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엔 분명 차이가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선 효섭과 민재의 시체 옆에 피투성이의 민수가 있어 우리는 그 죽음의 원인과 과정을 떠올려볼 수 있지만, <강변호텔>의 영환의 죽음에 대해선 원인과 과정에 대한 상상은 쉽지 않다. 오히려 영환의 죽음은 효섭의 죽음보단 보경의 마지막과 흡사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마지막 신으로 돌아가본다면 우리는 신문을 읽던 보경이 돌연 신문지를 바닥에 한장 한장 깐 뒤 베란다로 걸어간 뒷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신은 분명 서사적 공백의 여지를 남겨놓았지만 우리는 밖을 바라보는 보경의 뒷모습에 아른거리는 어떤 기운의 존재감을 감각할 수 있다. 요컨대 보경의 영혼은 그 순간 죽음의 심연에 영영 박제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찰나에 느껴졌던 불길한 두려움이 영환의 ‘죽을 것 같다’는 중얼거림으로 되풀이되고, 그 공허한 무기력함이 원인과 경과를 생략해버린 채 죽어버리고 만 영환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되풀이된 것은 아닐까. <강변호텔>이 포착한 적나라한 죽음의 얼굴은 홍상수의 세계가 문을 연 순간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키코가 ‘살고 싶은 순간’ 죽었다면 영환은 ‘죽어도 되는 순간’ 죽는다. 아키코가 죽기 전에 내뱉은 말이 “살고 싶어요”라면 영환이 죽기 전에 내뱉은 말은 “이제 죽어도 됩니다”이다. 아키코의 죽음이 두 여인의 결단을 이끌어냈다면 영환의 죽음은 두 여인의 슬픈 얼굴과 연결된다. 죽은 영환의 얼굴 숏이 흐려지듯 디졸브되면 다음 숏에는 호텔 방에서 잠들어 있는 상희와 연주의 얼굴이 담겨 있다. 호텔에 머무르는 내내 자주 잠에 빠져들었던 상희와 연주는 여전히 잠든 채로 얼굴을 찡그리고 옅은 흐느낌을 내뱉고 있다.
죽을 것 같았던 사람은 아키코가 아닌 영환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사람도 아키코가 아닌 영환이었다. 그러나 <동경의 황혼>의 가족들이 조용하고 묵묵하게 아키코를 보내준 데 반해 <강변호텔>에선 상희와 연주의 서글픈 흐느낌이 영환을 배웅한다. <동경의 황혼>이 잔인하다면 그건 간절히 살고 싶던 딸의 죽음 이후 가족들이 소란스럽지 않게 삶을 견뎌나가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고, <강변호텔>이 잔인하다면 그건 죽어도 상관없다던 담담한 시인의 죽음에 흐느끼는 두 여인의 얼굴을 붙여놓는 데서 기인한다. 두개의 역설이 오즈와 홍상수의 영화 속에 내재되어 있다.
3. 세상의 시선, 두개의 세계 오즈의 카메라는 인간의 눈보단 세상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이를테면 대화하는 인물들을 담아낼 때 180도 가상선을 무시해버리는 오즈의 카메라 구도는 관객에게 인물보단 그들이 자리잡은 공간에 이입하도록 만든다. 예컨대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1941)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쇼지로가 식당에서 친구들과 대화하고 있다. 오즈는 첫숏에서 쇼지로를 프레임 왼쪽에, 친구들을 프레임 오른쪽에 둔다. 숏과 숏 사이의 공간적 연속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음 숏에서 오른쪽에 있는 친구들의 좌측면 얼굴 숏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즈는 다음 숏에서 친구들의 우측면 얼굴 숏을 등장시키며 쇼지로를 오른쪽으로 친구들을 왼쪽으로 이동시킨다. 그리고 그다음 숏에선 쇼지로의 우측면 얼굴 숏을 등장시키며 다시 쇼지로를 왼쪽으로 친구들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킨다. 마치 식당이라는 거대한 공간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인물들은 식당의 변모하는 다양한 시점숏들로 포착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담담하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에서 관객은 쇼지로나 친구들에게 이입하기보단 차라리 공간이 되어 그들을 지켜보게 된다.
공간 중심의 카메라 구도는 인물의 시점숏이나 설정숏으로 분류되지 않는 일련의 풍경숏에서도 존재한다. <초여름>(1951)에서 가족을 떠나 지방에서 새 삶을 시작할 딸의 결단에 뒤얽힌 상념들은 평화로운 보리밭 숏에서 응축되며, <오차즈케의 맛>(1952)에서 우루과이로 떠난 남편이 남기고 간 담뱃갑을 쳐다보는 아내의 쓸쓸한 표정은 이어지는 텅 빈 집의 방과 복도 숏과 조화를 이룬다. <이른 봄>(1956)에서 방황을 겪은 남편의 후회 어린 얼굴은 검은 연기를 내뿜는 굴뚝 숏과 연결되며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에서 지방으로 떠나는 친구에 대한 노리코의 아쉬움은 사람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뒤 비어버린 벤치의 숏과 조응한다. 감정이 고조되거나 마무리되는 순간 인물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요한 풍경과 정물을 물끄러미 보여주는 숏들을 오즈의 여러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물들의 감정이 담긴 숏과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무인의 숏의 연쇄는 오즈의 영화 안에서 자유롭게 교착하며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낸다. 오즈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보리밭, 방과 복도, 굴뚝, 비어 있는 벤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리에서 풍경의 일부가 되어간다.
<동경의 황혼>에서는 인물이 풍경의 일부로 존재하는 동시에 다른 풍경의 움직임과 공명하며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무책임한 남자친구가 떠나버린 부둣가에 홀로 앉아 있는 아키코의 뒷모습은 하나의 풍경처럼 박제된다. 영화적 흐름과 상관없이 그 공간 안에 영원히 고립되어 있을 것만 같은 아키코의 뒷모습에서 시간의 지속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은 거센 바닷바람으로 나부끼는 그녀의 스카프의 움직임뿐이다. 아키코의 뒷모습 숏은 바다 위의 정지된 화물선 숏으로 이어지는데, 부동의 자세로 멈춰선 화물선들의 굴뚝에서 연기가 나와 바람의 방향에 따라 오른쪽 허공으로 흩어진다. 연결된 두개의 숏에서 스카프와 연기의 움직임이 시각적으로 중첩된다. 카메라는 고독하고 두려운 자신만의 시간에 포획된 아키코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잡아내는 대신 전혀 다른 상황의, 그러나 흡사한 운동을 보여주는 풍경을 포착함으로써 아키코와의 거리를 유지한다. 아키코와 화물선이 움직임을 통해 숏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명할 때, 관객은 흘러가는 시간을 느끼는 동시에 아키코의 뒷모습에 담겨 있는 쓸쓸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슬픔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오즈의 미덕은 결국 그것이 ‘짐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즈는 아키코의 얼굴을 찍는 대신 아키코와 카메라 사이의 절대적인 거리를 찍는다. 오즈의 영화에서 우는 여인들의 얼굴이 자주 그녀들의 두손으로 가려지듯, 우리는 그 순간 아키코의 얼굴을 보는 데 실패한다. 그 실패의 순간 그녀(들)의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슬픔이 영화적 울림을 자아낸다. 표정으로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인물들의 슬픔이 공간 안에서 시간으로 지속되고 있다. 오즈의 영화에서 관객은 편의적인 시선의 권력을 가진 자리에서 비켜나, 끊임없이 영화적 공간을 사유하며 인물들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홍상수의 경우는 어떠한가? 홍상수의 카메라는 움직임으로 세계를 포착한다. 그의 영화가 현란한 테크닉을 전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의 숏 안에서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들을 홍상수의 영화에서 목격할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에서 마당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부상용과 유신 부부를 잡아내던 카메라는 아래로 움직여 흙바닥을 기어가는 벌레를 포착하며, 마지막 신에선 구경남을 떠나 걸어가던 고순의 뒷모습을 담던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회전해 바다를 비춘다. <클레어의 카메라>에선 해고 통보를 받아 당황스러운 만희의 움직임을 따라 카메라가 의자 뒤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면 그곳에 큰 개가 평온하게 누워 있다. <밤과낮>(2007)에서 영호의 꿈속, 목욕탕에서 서럽게 울던 지혜로부터 이동한 카메라가 잡아낸 창문 밖의 돼지머리나 <밤의 해변에서 혼자> 속 함부르크의 해변에서 카메라가 고개를 돌린 사이 영희를 들쳐 업고 도망쳐버린 검은 옷 사내처럼 설명할 수 없이 기묘한 형태들이 포착되기도 한다. <풀잎들>(2017)에선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을 지켜보던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움직여 대화를 엿듣는 아름을 보여준다. <옥희의 영화>(2010)에선 아차산 공중화장실 앞에서 젊은 남자를 기다리던 옥희를 찍던 카메라가 왼쪽으로 움직이면 그곳엔 옥희의 옛 연인인 나이든 남자가 서 있다.
이처럼 홍상수의 영화에선 종종 하나의 숏 안에 두개의 세계가 얽혀 있다. 그건 벌레나 바다, 큰 개 같은 자연의 물상들이거나 돼지머리나 검은 옷 사내 같은 기괴한 초현실주의적 형상들이다. 대화를 엿듣던 제3자의 존재거나 그리워하던 옛 연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건 어떤 존재들이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다거나 누군가 그들 곁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장치라기보다는 하나의 숏 안에서 충돌하는 힘 혹은 넘쳐흐르는 정념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버티는 안간힘에 가까워 보인다. 하나의 숏에서 인물들과 그들의 감정이 충돌한다. 혹은 인물들은 어떤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과 그리움을 겪고 있다. 롱테이크로 그들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홍상수의 카메라는 컷하는 대신 어디론가 움직여 물끄러미 다른 것을 포착한다. 그곳엔 분명 다른 차원의 세계가 현존하고 있다. 그 순간 프레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하나의 숏 안에 두개의 세계가 겹쳐진다.
<강변호텔>에서도 그런 순간이 존재한다. 상희와 연주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는다. 식당 앞에 주차된 경수의 차를 보며 관객은 그 식당 안에 영환 부자가 있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상희와 연주가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다음 숏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식당 안에 앉아 있는 영환의 뒤통수다. 상희와 연주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영환과 경수, 병수의 대화가 오간다. 마주 보고 식사 중인 세 사람을 스리 숏으로 잡아내던 카메라는 영환이 몸을 앞으로 굽히자 영환에게 줌인한다. 영환의 말이 경수와 병수에게로 넘어가자 카메라가 오른쪽의 경수와 병수에게로 움직인다. 다시 영환의 대답과 함께 왼쪽의 영환에게로 움직인다. 대화의 사운드와 카메라의 움직임이 핑퐁하듯 이어지던 순간, 갑자기 카메라가 영환에게서 왼쪽으로 움직여 뒤쪽 자리에서 밥을 먹는 상희와 연주를 포착한다. 외화면에선 부자의 대화가 사운드로 지속되고 있다. 잠시 두 여인을 잡던 카메라는 말의 힘에 이끌리듯 다시 영환 부자에게로 움직인다. 찰나지만 상희와 연주를 포착한 순간이 주는 감흥은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하나는 컷을 통해 모습을 감춰버린 두 여인이 사라지지 않고 영화 안에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이제 더이상 누군가에게 떨림을 주지 못하는 영환의 암울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순간 너무나 태연하게 밥을 먹고 있는 다른 세계가 불쑥 틈입하기 때문이다. 식당 신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우리는 상희와 연주의 세계가 프레임 안에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전부터 존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희와 연주에게로 카메라가 움직이기 전, 부자의 대화하는 목소리 사이로 프레임 밖의 어떤 잡음들이 들려온다. 수저를 내려놓고 소주잔이 부딪치고 그릇이 움직이는 무질서의 선율을 가진 경쾌한 소리. 이후 상희와 연주에게로 카메라가 움직이면 우리는 그 소리의 정체가 상희와 연주가 밥을 먹으며 내는 소리였음을 알 수 있다. 영환 부자의 프레임 안으로 끈질기게 돌출하려는 그 불규칙적인 소리의 침투가 하나의 숏 안에 존재하는 다른 세계의 존재 가능성을 감지하게 만든다. 그건 우스꽝스러우면서 신비롭고, 세속적이면서 기적 같은 광경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숏 안에서 중첩되는 두 세계의 몽타주다.
그런데 <강변호텔>에선 또 다른 세계가 등장한다. 이 세계는 세개의 신을 통해 등장한다. 첫 번째 신, 아들들을 만나 호텔에 머무른 기간과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영환의 보이스 오버와 함께 호텔 근처를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영환은 담배를 피우며 강을 바라보고, 장작을 패보기도 하고,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두 번째 신, 영환은 병수의 이름에 담긴 뜻을 알려준다. ‘하늘을 느끼는 마음과 길바닥을 걷는 마음 두 가지를 아울러 잘 살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어줬다는 영환의 말에 아들들은 귀를 기울인다. 그때, 영환의 보이스 오버 위로 다시 한번 호텔 근처를 맴도는 영환의 모습이 담긴다. 세 번째 신, 아들들이 떠나간 식당에서 영환이 상희와 연주에게 다가가 자작시를 들려준다. ‘이카’라는 조직에 갇혀 두 엄마와 헤어진 채 외롭고 어둡게 주유소에서 살아가는 한 덧니 소년의 시를 읊는 영환의 목소리 위로 시의 내용을 시각화한 희미한 풍경이 펼쳐진다.
세개의 신은 영환의 머릿속에서 상영되는 모종의 영화적 세계다.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신의 세계와 세 번째 신의 세계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전자의 신들이 <하하하>에서 청계산의 문경과 중식이 떠올리던 통영에서의 일화처럼 플래시백으로 구현되는 회상이라면, 후자의 신은 플래시백도 회상도 아니다. 전자의 주인공은 영환이지만, 후자의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 덧니 소년이다. 전자에서 호텔 주변에 갇힌 듯 맴도는 영환의 모습은 영환이 실제 경험하고 겪은 상황이라면, 후자에서 소년의 모습은 영환이 겪어본 적 없는 상상의 이미지다. 이 차이에서 영환이 죽기 전 남긴 마지막 시를 아들들이 아닌 두 여인에게 들려줄 수밖에 없던 이유를 조금은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환이 아들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기억과 정보라면, 두 여인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구상과 추상 사이의 맑은 심상이다. 영환이 아들들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면, 두 여인과는 교감을 할 수 있다. 시를 두 여인과 함께 나눈 뒤, “이제 죽어도 됩니다”고 말하는 영환의 뭉클한 목소리는 그 차이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4. 집에서 계절을 살다, 길을 잃고 여독을 앓다 <동경의 황혼>의 마지막, 동생의 죽음 이후 남편에게 돌아가려고 마음먹은 다카코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슈키치는 그런 다카코에게 “그래, 잘해봐. 넌 잘할 거야”라고 답한다. 그 말 속에 ‘실패할 수도 있지만…’이라는 문장이 생략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짐작일까. 슈키치가 다카코의 결정에 굳이 걱정과 두려움의 말을 덧대지 않듯, 영화 또한 다카코의 가정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막연히 희망을 품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겨울을 버티는 나무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시간을 견디는 다카코의 고요한 뒷모습을 포착한다. 슈키치는 아내와 딸들을 차례로 떠나보내며 결국 집 안에 홀로 남겨지고 말았다. 혼자 남은 집에서 먼저 죽은 딸의 사진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이 과년한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들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은 오즈의 세계에서 어떤 이유로든 결국 집을 떠난다는 것이 삶의 필연적인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강변호텔>에서 상희는 ‘기구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삶 안에서 아픔을 견디고 있다. 상희는 사랑에 실패했으며 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토로하기도 하고 몸의 상처에 붕대를 휘감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강변호텔>에서 아키코의 현현에 가까운 사람은 영환이 아니라 상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수십년이라는 시간의 간격과 동경과 강변이라는 공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아키코의 죽지 않은 미래가 상희가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아키코의 죽음의 행로를 영환의 죽음의 행로와 비교해왔지만, 우리가 또한 비교해야 할 것은 아키코의 죽음과 상희의 안간힘이다. 아키코의 죽음 이후 목격되는 초연함과 상희의 담담한 안간힘에서 느껴지는 기특함이 각각의 영화적 울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언어의 한계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랑과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서 <동경의 황혼>이 바라보는 것이 질서 안에서 묵묵히 삶을 지탱하는 슈키치와 다카코의 얼굴이라면, 사랑과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서 <강변호텔>이 바라보는 것은 죽음을 맞닥뜨리는 영환의 얼굴이며, 연민하며 애도하는 상희와 연주의 얼굴이다. <동경의 황혼> 속 슬픔이 인간의 행불행에 무관심한 자연의 흐름을 감내하는 일상 속의 순응에서 비롯된다면, <강변호텔>의 슬픔은 어둠 속에서 죽음을 견뎌내고 반응하는 흐느낌에서 비롯된다. <동경의 황혼>의 눈이 추위와 계절의 징후로서의 무심한 자연물이라면, <강변호텔>의 눈은 서글픈 과거와 불안한 미래를 모두 무용하게 만드는 순수한 현재성의 상징물이다. 요컨대 <동경의 황혼>의 겨울이 순환 과정 속에서 ‘죽고 싶지 않아도’ 절멸하는 자연의 시간이라면, <강변호텔>의 겨울은 죽음의 시공 안에서 ‘죽어도 상관없는’ 충만함을 마주하기 위해 움직이는 시인과 여인들의 시간이다.
두편의 영화를 살펴본 것만으로 오즈와 홍상수의 세계를 탐구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편의 영화에 감응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들의 세계를 유영하고자 하는 다짐으로서, 종종 언급되는 비유를 포함해 몇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오즈의 영화가 집이라면, 홍상수의 영화는 여행이다. 오즈의 인물들이 집에서 집으로의 이행이라는 삶의 순환을 경험한다면, 홍상수의 인물들은 영원히 집을 찾지 못해 거리에서 표류하는 여행자들이다. 오즈의 인물들이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다시 봄을, 아침과 저녁을 지나 밤과 새벽을 보내고 다시 아침을 맞이한다면, 홍상수의 인물들은 서촌과 북촌에서, 춘천과 제천에서, 파리와 함부르크에서, 극장과 학교에서, 카페와 호텔에서 길을 잃고 두리번거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즈의 집에서 계절로서의 소멸과 죽음을 발견하고, 홍상수의 여행에서 여독(旅毒)으로서의 실패와 죽음을 목격한다. 오즈의 영화가 인물들의 행불행을 확신하지 않은 채 거리를 유지하고, 홍상수의 영화가 인물들의 여행 끝에 채워질 수 없는 감정적 여진을 남겨놓듯, 그들의 영화는 우리가 매일 매 순간 맞닥뜨리지만, 끝끝내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삶 그 자체를 닮아 있다. 저마다의 삶이라는 집에 살며, 생을 여행하는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영화들에 치열하게 반응하고 끈질기게 응답하며 결국 그 세계를 탐험하는 것이다. <강변호텔>에 흘러넘치는 신비로운 기운과 정념은 그 탐험의 과정에서 비로소 영화적 감각으로 체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