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여기에 없었다>엔 폭력이 없다. 살인 청부업자 조가 아동 성범죄 조직에 납치된 소녀들을 구하러 다니는 이 영화에선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지만 영화는 정작 폭력과 살인의 생생한 묘사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프닝 시퀀스에선 이미 임무를 끝낸 조가 망치에 묻은 피를 닦아낸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건 살육의 과정이 아닌 지난한 뒤처리뿐이다. 이후 영화는 폭력과 살인의 순간마다 CCTV나 천장의 거울로 시선을 돌려버려 폭력의 시각적 쾌감을 반감시킨다. 조가 누군가를 때리고 죽이는 것 같은데, ‘같다’는 느낌만 있을 뿐 상세히 보여지는 것은 거의 없다. 조가 과거에 겪은 폭력의 경험들이 트라우마처럼 떠오를 때도 영화는 그 잔해들을 응시할 뿐 구체적인 폭력의 행위는 보여주지 않는다.
폭력이 없다면 이 영화엔 무엇이 있을까. 이 영화엔 ‘걸음’이 있다. 이 영화는 세상을 떠도는 조라는 남자의 걸음을 집요하게 잡아내려는 일종의 로드무비에 가깝다. 그런데 그의 야수 같은 몸의 육중함과 달리 그의 걸음은 차라리 깃털처럼 가볍고 발레리나처럼 유려하다. 예컨대 오프닝 시퀀스에서 방을 나와 쓰레기를 버리고 경찰차를 피해 모텔을 빠져나가는 조의 걸음을 은유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무척 부드럽고 유동적이어서 그의 걸음이 마치 우아한 왈츠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 카메라는 조의 걸음을 종종 놓친다. 조가 있는 음수대와 공중전화, 문과 계단과 복도를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잡아보려 하지만 이미 그곳엔 조가 없다. 또는 조가 걸을 때 그는 종종 거리의 어둠 속이나 CCTV의 사각지대 안에 있으며, 차와 기차와 인파가 그를 가려버린다. 그는 그렇게 ‘여기에 없었던’ 것처럼 세상을 스쳐간다.
그런데 조의 빠르고 유려한 걸음들이 영화 중간 지점부터 속도감과 균형감을 잃고 허탕을 치기 시작한다. 성범죄 조직에 연루된 부패 경찰들에게 다시 니나를 빼앗긴 조가 중개소의 존, 연락 매개체 앤젤, 어머니를 차례대로 찾지만 그를 마주하는 것은 그들의 죽음뿐이다. 영화 전반부에서 카메라가 조의 걸음을 한발씩 놓쳐왔다면, 영화 후반부에는 조가 범죄 조직원들의 걸음을 한발씩 놓쳐간다. 조의 뒤늦은 걸음은 활력을 잃고 죽음 이후를 맴돈다.
조는 죽음의 자장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을 다뤄온 감독 린 램지의 지난 영화들의 인물을 총집합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폭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조의 아이 같은 면모는 <쥐잡이>의 위악적인 소년 제임스를 떠올리게 하며, <모번 켈러의 여행>에서 자주 텅 빈 곳을 응시하던 모번의 눈빛은 조를 닮았다. <케빈에 대하여>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집 안을 닦던 에바의 걸레질은 어머니로 인해 거품으로 뒤덮인 욕실을 닦는 조의 걸레질과 조응한다. 그런데 <너는 여기에 없었다>의 위력은 조가 앞선 인물들을 대신해 보여주는 의연한 걸음에 있다. 조는 친구와 가족을 모두 잃은 순간에도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다시 꿋꿋이 걸어간다.
그 걸음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에서 목격할 수 있다. 어머니의 시체를 수장하기 위해 숲속 호숫가로 간 조가 주머니에 돌을 넣은 채 어머니를 안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때 그의 걸음은 남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 움직인다. 그런데 물속에서 니나의 환청을 듣게 된 조가 니나를 구하기 위해 호수에서 올라와 숲을 빠져나간다. 그때 그의 걸음이 자갈을 밟는 생생한 사운드와 함께 스크린 위에서 오래도록 지속된다. 우리는 조의 표정과 발걸음 소리에서 그의 담대한 결단을 시청각적으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니나를 납치해간 주지사 윌리엄스의 별장 곳곳을 뒤지는 그의 걸음은 활력과 기예를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한발 늦는다.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이미 죽어버린 후의 윌리엄스다. 다시 한번 걸음의 실패를 겪은 조는 주저앉아 아이처럼 울기 시작한다. 울음을 멈춘 조가 다이닝룸에서 멍한 얼굴로 밥을 먹던 피투성이의 니나를 발견하면, 살인도구로 사용했을 칼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니나는 그에게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조의 걸음은 결국 친구와 가족과 니나 모두를 지키지 못한 채 파국을 맞이하는 것일까.
여기까지 왔을 때 우리 대부분이 눈치채지 못했을 영화상의 특징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영화가 조의 걸음들을 집요하게 포착하려고 한 것에 반해, 니나의 걸음은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단 것이다. 니나는 처음 납치됐던 건물, 지하 주차장, 모텔, 윌리엄스의 별장, 주유소와 식당 등 여러 장소를 오갔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가 걷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생략됐다. 그녀는 조에게 업히거나, 부패 경찰들에게 들쳐 업혀서, 차를 타고 수동적으로 이동해왔을 뿐이다. 영화는 니나가 걷는 모습을 마지막 시퀀스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등장시킨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두 사람의 미궁에 빠진 대화 끝에 니나가 몸을 일으켜 옅은 발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녀는 어디로 간 걸까? 혼자 남겨진 조가 우울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 스스로를 총으로 쏴버린다. 더이상 누구를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 자신의 육체성을 파괴하려는 듯 그는 스스로를 죽이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한다.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조를 깨우는 건 니나다. 정확히는 니나의 걸음과 접촉과 음성이다. 식당 손님들은 총소리는 듣지도 못했다는 듯 여유롭게 일상의 대화를 나누고, 조의 피를 뒤집어쓴 종업원이 엎드린 조에게 다가와 영수증을 놓고 간다. 테이블 위로 피가 흘러 영수증을 적시는 숏 다음, 반대편 자리로 걸어오는 니나의 숏이 삽입되면, 다음 숏에는 멀쩡한 모습의 조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엎드려 있다. 니나가 조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일어나요”(Wake up)라고 말하면 조가 몸을 일으킨다. 날씨가 좋으니 밖에 나가자는 니나와 조의 대화를 끝으로 스크린은 어두운 화면으로 뒤덮인다.
어둠이 사라지고 난 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사라져버린 비어 있는 식당이다. 영화는 다시 조와 니나의 걸음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잠깐의 어두운 화면 사이에 조와 니나는 빠르게 영화 속 시공간으로부터 탈주해버렸고,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뿐이다. 이제 영화와 카메라는,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영화가 조의 걸음을 집요하게 잡아내려 했으나 실패했듯이, 조가 조직원들의 빠른 걸음을 따라잡는 데 실패했듯이, 우리는 이제 영원히 조와 니나의 걸음을 따라잡는 데 실패할 것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두 걸음이 만나는 순간 생겨나는 기적 같은 풍경이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던 조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걸음을 견디고 니나에게로 가면, 수동의 상태에서 벗어난 니나의 자발적인 걸음이 죽어있는 조를 깨운다. 조가 니나를 구하기 위해 호숫가의 자갈밭을 걸어갔듯, 니나가 조를 깨우기 위해 조에게 걸어간다. 살인 수단으로서의 걸음과, 허무하게 실패하는 걸음의 반복 끝에 영화는 비로소 각성(wake-up)의 걸음을 목격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폭력과 살인의 자리에 변화하는 걸음의 풍경을 집어넣은 영화다. 이 영화가 액션의 활기와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한 이에게 실망을 준다면 그건 폭력과 살인의 쾌감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누군가에게 예기치 않은 영화적 감각을 체험하게 해준다면 그건 사소하지만 생생한 움직임의 제스처로 인물들의 실패와 교감의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