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캐피탈>(2012) 이후 7년 만의 신작을 들고 부산을 찾았다. 제24회 부산영화제가 신설한 아이콘 섹션에 초청된 <어른의 부재>는 감독의 고국 그리스의 재정위기 사태를 극복하고자 했던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 정권의 노력, 특히 전 재무장관이었던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노력을 재조명하는 작품. “한국 관객이 어떻게 봐줄지 궁금하다”는 그의 신작은 전세계 금융권을 소재로 인간의 탐욕과 권력의 암투를 소재로 했던 전작의 연장선상에서 혹은 그가 언제나 천착해왔던 정치영화의 확장판으로서 논의할 가치가 많은 작품이다. 이 영화의 출발점, 그리고 고국의 정치경제 현실에 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당시 그리스 재무장관에 발탁됐던 경제학자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책 <어덜츠 인 더 룸>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어떻게 이 책을 영화화할 생각을 했나.
=그리스 재정위기 사태가 발생한 2009년 무렵부터 이미 각종 뉴스, TV프로그램을 섭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심각한 위기라 판단했고 그리스를 비롯해 유럽 전체에 미칠 여파가 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정작 회담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리스의 채무가 너무 많아 갚을 능력이 없었음에도 주변 국가,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그리스에 빚을 지라고 하고 또 갚으라고 하는 상황 자체가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급진좌파연합인 시리자 정권이 들어섰는데 당선 전에 내세웠던 공약들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도 심각했다. 선거 당시에는 많은 걸 바꿀 것처럼 하더니 하나도 바뀐 게 없는 상황이 지속되는 와중에 마침 바루파키스의 책을 읽게 된거다.
-야니스 바루파키스 전 장관을 찾아가 영화화 계획을 논의했다던데, 영화화 계획에 대해 뭐라고 조언해주던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C),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으로 구성된 트로이카 채권단의 구제금융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었을 때 반대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진 후에 재무장관만 사퇴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그를 찾아가 물었더니, 재무장관 재임 당시 유럽과의 각종 회담 관련 자료를 보여주더라. 심지어 회의 당시 녹음 파일도 들려줬다. 그런 회담들은 전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국가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후대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야니스는 그것을 미리 눈치채고 휴대폰으로 모든 회의내용을 몰래 녹음해뒀다고 한다. 내가 그 녹음 파일에 관심을 보이니 자신이 책을 쓰고 있으니까 그걸 바탕으로 영화화해보라고 허락해줬다. 그가 책을 쓰는 와중에 내게 챕터별로 원고를 보내준 덕분에 그의 회고록 저서 집필과 나의 시나리오가 동시다발적으로 쓰일 수 있었다. 녹음 파일이 있으니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팩트 체크도 할 수 있었다. (웃음)
-이번 영화는 대표작인 정치 스릴러 <Z>(1969) 이후 거의 50여년 만에 자국의 정치경제 상황을 다룬 영화다.
=그리스와 나의 관계에 대해 항상 생각한다. 과거 그리스를 떠날 당시에 중소득층이었던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왕당파가 집권한 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우린 탈출하는 심정으로 고국을 떠나야 했다. 그러다 프랑스에서 자리 잡고 살다 보니 그리스에 독재정권이라는 위기가 찾아오더라. 그래서 <Z>를 만들었고 그 이후에 잠잠하다가 최근에 또 다른 위기가 왔다고 느꼈다. 나는 그리스 재정위기 사태의 주범은 사태 이전의 전 정부와 이러한 위험에 대해 아무런 예고도 하지 않았던 유럽연합위원회 둘 다라고 생각한다.
-이 사태의 본질을 관객에게 전달할 목적으로 영화 형식을 고민한 것 같다. 마치 재현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회담과 회담, 즉 대화의 연속으로 이뤄져 있다.
=영화를 통해서 당시 회의 장면과 회의실 내부를 조명하고 싶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런 형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눈 회담이 결국에는 어떻게하면 은행을 보호할 것인지를 연구한 것이기 때문에 그 회담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한국도 최근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의 위기 상황에서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재검토하려는 시도를 소재로 한 극영화 <국가부도의 날>(2018)을 만들었다.
=그 말을 들으니 위안이 된다. 한국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재정위기도 재벌들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나 독일의 금융 재벌들이 수많은 금융상품을 그리스에 쏟아붓듯이 빌려줘 민주화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자본의 횡포로 인해 고통받는 현실을 묘사해온 수많은 영화들과 달리 그 비극적 현실을 초래한 장본인들의 ‘밀실’ 대화로만 이뤄진 영화라는 점이다. 주제와 스타일, 형식 면에서 독특한 접근이다.
=영화 속 회담, 협상 과정을 보면 유럽과 작은 나라 그리스는 경제적인 면에서 극명한 대비가 있는 협상 주체다. 이 영화를 통해 권선징악이나 선과 악의 대비를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 상대 국가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관철시키려고 하는 주체들의 모습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급진좌파 정당이었던 시리자 정권의 지난 행적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갖고있나.
=시리자 정권은 우리에게는 큰 희망이었다. 임기 내에 그들은 중요한 성과도 많이 냈지만 마무리가 좀 아쉽다. 애초 공약과 정반대의 노선을 취하기도했다. 물론 전 총리였던 알렉시스 치프라스는 법적으로 문제되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모두 의회 상정과 표결을 거쳤다. 그럼에도 윤리적으로 잘한 것이냐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야니스의 재무장관 사퇴 이유도 그런 맥락과 함께 이해하며 보면 좋을 것 같다.
-시리자 정당 사람들도 영화를 봤나.
=얼마 전 그리스에서 개봉했다. 아직 그들의 반응을 직접 들을 기회는 없었는데 시사 후 반응은 괜찮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은 알렉시스를 좀더 영웅처럼 그려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나는 일자리가 없어 조국을 떠난 50만명의 그리스 젊은이들을 생각한다. 그 인재들을 누가 다시 돌아오라 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