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인간> 天上人間
유릭와이 / 홍콩 / 1999년 / 114분
<소무>(1997), <세계>(2004), <스틸 라이프>(2006), <천주정>(2013) 등 지아장커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유릭와이는 동시에 <천상인간>, <명일천애>(2003), <플라스틱 시티>(2008) 등을 연출하며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스크린에 펼쳐놓은 감독으로 활동해왔다. <천상인간>은 유릭와이의 감독 데뷔작으로, 세기말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홍콩 뒷골목에서 포르노테이프를 파는 아지엔(양가휘)은 레스토랑 접수계원으로 일하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아얀(여려평)과 산다. 아지엔은 대륙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남자들을 상대하며 살아가는 젊은 여자 아잉(왕녕)을 우연히 만나 가까워진다. 여기에 해난 출신의 소심한 청년 아춘(주지생)까지, 홍콩의 뒷골목에서 일상적이고 하찮은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외로운 삶이 서로서로 포개진다. 인물들이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장면조차 특별하게 만드는 촬영이 단연 눈에 들어오며, 홍콩의 뒷골목과 밤풍경에서 길어올린 씁쓸한 고독의 정서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1999년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이며, 양가휘와 관금붕이 제작에 참여했다.
<나비> 蝴蝶
얀얀막 / 홍콩 / 2004년 / 129분
고등학교 교사로, 한 아이의 엄마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던 플라비아는 우연히 마트에서 만난 젊은 뮤지션 밍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린다. 그녀는 플라비아의 억눌렸던 욕망과 잊고 지낸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플라비아는 고등학생 시절 동성 친구 입과 나눈 뜨겁고 아름다웠던 사랑의 시간을 기억한다. 중국 본토의 대학생이 되어서도 지속되던 두 사람의 관계는 1989년 봄 천안문 사태를 거치며 흔들리고 보수적인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좌초된다. 현재의 플라비아는 밍에 대한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지만, 결국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듯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다. <나비>는 사랑을 나누는 소녀와 여인들의 이야기를 과감하고 감각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15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생각하면 영화의 러브신이 더욱 과감하게 느껴진다. 가정을 지키는 대신 자기 자신을 지키는 여성의 이야기인 동시에 중국 내부의 금기와 용기에 대한 이야기다.
<대람호> 大藍湖
제시 창 취이샨 / 홍콩 / 2011년 / 104분
배우로 활동하던 청은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금의환향은 아니다. 배우가 되겠다고 부모님과 싸우고 집 나갔던 시절의 혈기는 많이 사그라들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오랜만에 방문한 집에서 그녀를 맞이하는 건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다. 집 나간 엄마를 찾아준 초등학생 동창 람도 몰라보게 어른이 되었고, 지역 축제를 앞둔 마을도 부쩍 올드 타운이 되었다. 청은 이곳에서 첫사랑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남자 사람 친구 람과 깜빡이는 기억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엄마와 평범하지만 특별한 날들을 보낸다. 제목인 ‘대람호’는 크고 푸른 강을 뜻하는 말이다. 과거의 기억을 실마리 삼아 무작정 대람호를 찾아가는 청과 람의 이야기가 알 수 없는 꿈을 찾아 떠나는 청춘들의 여정이라면, 마을 어르신들의 과거 구술이 연극의 형태로 재연되는 상황은 과거를 복기해 현재의 시간을 단단히 다지는 작업이 된다. 잊힌 것 혹은 잊고 사는 것들을 복원하는 작업은 결국 과거를 극복하는 일과 연결된다. <대람호>는 그 기억의 복원을 통해 조금은 희망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냐고 담담히 말을 건넨다. 제시 창 취이샨 감독은 이 영화로 2012년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10년> 十年
궉준, 웡페이팡, 구문걸, 주관위, 우카릉 / 홍콩 / 2015년 / 104분
2014년의 우산혁명 이후 5년이 지나 홍콩의 거리는 다시 자유와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뜨겁다. <10년>은 우산혁명 직후 만들어진 옴니버스영화로, 지금의 상황을 반영해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현재적인 느낌을 준다. 2025년을 배경으로 한 5편의 단편은 모두 희망이 아닌 절망의 시선으로 홍콩의 미래를 그린다. <엑스트라>에선 노동절에 모의되는 정치인 테러사건의 전말을 흑백의 누아르 필름처럼 그리며 국가보안법을 이야기하고, <겨울매미>는 재건축으로 철거된 친구의 집에서 깨지고 부서진 물건들을 표본으로 만드는 남녀의 이야기를 실험적 사운드와 이미지로 그리고, <방언>은 중국어 표준어시험을 통과한 택시와 그렇지 않은 택시를 구별하는 정책이 시행되는 가운데 홍콩의 광둥어밖에 쓰지 못하는 택시 기사의 애환을 이야기한다. <분신자살자>는 영국 총영사관 앞에서 벌어진 분신자살사건을 놓고 홍콩의 암울한 현실과 예기치 못한 뜨거운 연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지금의 홍콩 시위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마지막으로 <현지계란>은 홍콩의 계란 농장이 모두 사라지고 마지막으로 홍콩 ‘로컬’ 계란을 팔려는 식료품 가게 주인과 어린이 검열단이 된 그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통합’을 이유로 ‘통제’하려는 본토를 비판한다.
<프린스 에드워드역에서: 내 오랜 남자친구에게> My Prince Edward
노리스 웡 이람 / 홍콩 / 2019년 / 92분
퐁에겐 7년 넘게 연애한 남자친구 에드워드가 있다. 퐁은 에드워드와 함께 프린스 에드워드역 인근 골든 플라자에서 웨딩숍을 하며 함께 살아간다. 어느 날 에드워드는 퐁에게 프러포즈를 하지만 퐁은 그 고백이 반갑지만은 않다. 에드워드에게 말 못한 비밀이 있기 때문인데, 결혼 준비 과정에서 퐁의 비밀이 드러나고 만다. <프린스 에드워드역에서: 내 오랜 남자친구에게>는 현재 홍콩과 본토의 젊은이들이 봉착한 결혼과 일자리와 주거 문제를 오래된 커플의 연애 서사로 풀어낸다. 홍콩에 정착하려는 본토 이주민 문제와 가짜 결혼 이슈를 결합하면서 주거의 자유와 노동의 자유를 생각하게 하고, 결혼을 앞둔 30대 여성 퐁을 통해 자유와 구속의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게한다. 결혼에 대한 홍콩 남녀의 생각 차이가 한국과 비슷한 면이 많아 재밌다. TV드라마 작가로 활동하던 노리스 웡 이람의 데뷔작이며, 가수와 배우로 활동 중인 덩리신이 퐁 역할을 맡아 섬세한 감정연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