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반환 이후의 이미지들: 1997년 이후의 홍콩독립영화’에서 만난 감독들
2020-03-12
글 : 이나경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내 오래된 홍콩에서, 내 새로운 홍콩에게

1997년 이후 홍콩영화 더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

지난 12월 1일 오후 6시 20분 CGV아트하우스 압구정 아트1관에서 ‘반환 이후의 이미지들: 1997년 이후의 홍콩독립영화’를 주제로 한 대담이 열렸다. 올해 서독제는 홍콩아시안영화제와 함께 1997년 이후 주목할 만한 홍콩 독립영화 10편을 모았다. 김성훈 <씨네21> 기자의 진행으로 열린 이번 대담은 클라렌스 추이 홍콩아시안영화제 집행위원장이자 홍콩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 디렉터, 윤영도 성공회대학교 교수, <메이드 인 홍콩>(1997)의 프루트 챈 감독, <대람호>(2011)의 제시 창 취이샨 감독, <10년>(2015)의 앤드루 초이 프로듀서가 참여했다. 1997년 이후의 홍콩과 홍콩 영화산업에 대한 밀도 있는 이야기가 오간 자리였다.

-1997년은 홍콩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진 해인지, 홍콩영화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클라렌스 추이_1997년 7월 1일은 홍콩이 영국 식민지에서 특별행정국으로 바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정권뿐 아니라 홍콩 사람들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홍콩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거다. 1980년대부터 97년까지 수많은 홍콩 영화감독들, 특히 허안화나 왕가위 등이 대표적으로로 홍콩 반환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면서 이를 영화에 담으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함께한 프루트 챈 감독의 <메이드 인 홍콩>,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1998), <리틀 청>(1999) 모두 이러한 주제의 맥을 이어갔다.

=윤영도_1997년이 지금 홍콩의 첫 출발인 셈이다. 1980년대부터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92년쯤부터 텔레비전을 틀면 배우 주윤발, 주성치, 이연걸, 성룡 등이 출연하는 영화가 나왔다. 당시 영화산업이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한해 50~60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홍콩은 무려 300편을 만들 정도였다. 수치로 따지면 전세계에서 할리우드와 인도 다음이 홍콩이었고, 수출액으로 따지면 홍콩이 2위였다. 홍콩이 반환 직전의 위기상황을 겪고 있던 94년, 홍콩 영화산업은 인기의 정점을 찍자마자 썰물 빠지듯 자본이 빠져나갔고, 이후 침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해 20%씩 하락하더니, 97년에는 홍콩의 굵직한 영화사들이 전부 사업을 접기 시작했다. 일년 뒤에는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홍콩 영화시장은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후 유명한 배우들은 할리우드나 중국으로 넘어갔다.

-<메이드 인 홍콩>은 반환 직전 홍콩인들의 불안감을 그린 작품이라는 점과 8만달러 정도의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었다는 시도에서 큰 의미가 있다.

=프루트 챈_그 당시에도 나는 한두편 정도의 상업영화를 찍고 있었다. 상업영화를 찍는 감독 중 한명도 홍콩 반환을 주제로 다루려 하지 않아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각본을 쓰기 시작한 게 <메이드 인 홍콩>이다. 비록 저예산이었으나 당시 홍콩 반환에 무관심했던 홍콩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제가 진실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랬기에 내게도 더 의미 있는 영화다. 당시 영화를 찍은 후 필름이 남아서 홍콩이 반환되는 새벽에 해방군이 홍콩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찍었다. 불꽃놀이 장면도. 이게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에 들어간다. 작품에 반영해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찍은 건 아니었다. 다만 찍고 나서 보니 역사는 항상 변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시아 금융위기,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세파(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 등 홍콩 반환 직후에도 중요한 사회적 사건이 일어난다.

프루트 챈_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홍콩 영화산업은 완전히 침체됐다. 세파 협정 이후 홍콩은 중국과 합작 영화를 만들 수 있었지만 심사라는 이름하의 검열을 거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홍콩 관객은 중국과의 합작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홍콩 정부가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차츰 늘려가며 신진 감독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클라렌스 추이_조금 보충하자면 80, 90년대에 활동하던 감독들은 식민지 시절과 홍콩 반환을 함께 겪었다. 그 외에도 천안문사태 등 일련의 정치사건과 사회현상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홍콩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를 표현하는 데 젊은 세대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이드 인 홍콩>은 홍콩에서 먼저 상영하지 못하고 1997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밴쿠버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의 해외 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홍콩영화계의 침체 속에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겪으면서 더 이상 상업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수출하지 않고 영화제를 통해 해외진출을 도모한 것이다.

윤영도_기존의 영화계에 이름난 거물급 인사들은 대륙이나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의 환경은 더 열악해졌다. 중국과의 합작 시 정치적으로 중국을 비판하면 안되고 마약이나 미신 등도 등장시킬 수 없었다. 홍콩에서 기획해서 만든 영화지만 중국영화 같은 영화만 남게 되었던 게 당시의 분위기였다.

-제시 창 취이샨 감독과 앤드루 초이 프로듀서가 바로 그 젊은 세대들이다.

=제시 창 취이샨_1997년 나는 영화를 공부할 수 있는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프루트 챈 감독의 <메이드 인 홍콩>은 내게 영감을 준 영화다. 중간에 홍콩을 떠나 베이징으로 가서 일도 하고,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단편영화도 찍었고 저예산 장편영화도 찍으며 차츰 상업영화쪽으로 규모를 넓혀갔다.

=앤드루 초이_2012년 홍콩 특별행정 정부가 중국에 대한 애국을 강조하는 과목을 필수 교과로 지정하는 국민교육을 도입하려다 시민들의 반발로 철회했었다. 이는 홍콩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정체성에 큰 깨달음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우산혁명을 비롯한 여러 사건을 통해 젊은 세대가 정치나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제시 창 취이샨_앞서 이야기한 국민교육 사건 이후 홍콩 내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민들은 정치나 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 또래의 젊은 세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 나를 포함한 홍콩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런 지점들을 자연스레 영화에 담아내게 된 것 같다.

클라렌스 추이_세대간 차이도 눈에 띄지만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사이의 관계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 상업영화를 많이 찍는 배우들이 더 적극적으로 독립영화를 지지한다. 또한 홍콩의 유명 연예인들도 사회적 이슈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독립영화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고 직접 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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